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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 사상의 오만(2021년 4월 18일 주일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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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명길목사
댓글 0건 조회 3,198회 작성일 21-04-16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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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도사상(中道思想)의  오만(傲慢)

 

2021418일 주일 칼럼                                                                                            이명길 목사

 

저의 조부께서는 한학자는 아니었지만산에도 살지 말고 물가에도 살지 말고 앞에 나서지도 말고 뒤에 처지지도 말라고 항상 말씀하셨다. 어려서 그 뜻을 잘 몰랐지만 피비린내 나는 왕권 싸움을 피해 전라도로 귀양살이처럼 피난 와서 살아남은 정종대왕 왕자 장천군 후손답게 살아남는 비결이 중용사상(中庸思想)이었음을 자란 후에야 깨달았다. 강대국 틈에 끼어 특히 원수 갚는 이조 정란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눈치를 키운 민족이기에 한국인 뼛속 깊이 스며든 중도사상은 필요한 삶의 비결이었을지 모르지만 한민족 진취성을 막는 폐단이며 약점이었다. 지금 같은 국난 중에 심지어 기독교 지도자들까지 이기적 잔꾀로 가득 어정쩡한 중도 침묵에 일관하는 큰 교회 목사들이 너무 실망스럽다. 중도가 외골수 하나님편에 서는 것보다는 지혜롭다는 태도는 한국 교회를 무감각증 병들게 하는 문둥병 징후다.

한국엔 중도 입장을 선호하게 하는 속담이 많다.모나면 징 맞는다”“두루뭉술 사는 것이 지혜다.”“한 편에만 서면 적이 많다.”“생선도 가운데 토막이 맛 았다 난세일수록 눈치 살피며 이쪽저쪽 아닌 중간 입장 비슷하게 양쪽에 다리 걸친 삶이 지혜롭게 보인다. 양편의 보복을 피하는 지혜로운 선택으로 보이며 많은 경우 중간층 선택자가 다수이기 때문에 내심을 숨기는 양다리 잔꾀가 대쪽같이 분명한 것보다 선호할 수 있다. 김종인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독일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분명한 좌파 경제학자다. 신념을 숨기면서 보수인척 진보인척 두루뭉술 양쪽을 다니며 대부분 정치싸움에 살아남았다. 정치가에게는 유익한 잔꾀일지 모르지만 목사는 그런 류의 사람 아니다.

기독교는 공의와 사랑에 흠이 없는 역사 주관자 창조주요 진리의 하나님을 믿는 종교다. 진리는 분명하고 날카롭다. 두루뭉술하지 않기 때문이 중립을 허용하지 않는다. 성경은 신앙에 뜨겁지도 차지도 않는 중간 자세를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WCC가 유물론에 물든 단체임이 분명한데 교단에서 정한 것이니 나만 잘 믿으면 된다며 입을 다물고 어물쩡쩡 지내는 것을 옳다 할 수 없다. 하나님 말씀 성경을 난도질한 신신학 헤겔주의 분석주의 교수들에게 배워 공산주의까지 어물쩡쩡 중간 입장에서 양다리 걸치는 신앙은 지혜도 아니고 선견지명도 아니다. 자신과 교회를 망하게 하는 짓이다. 사실상 신신학이 왕성할 때 외국에 가서 쉽게 박사학위 따 편하게 교수나 하려고 귀국 대학이나 신학교에서 그것을 팔아먹으며 어정쩡한 태도로 교인들에게는 성경을 믿는 척하며 설교하고 실제로는 WCC 맑스주의 활동에 협조하고 눈감아주는 행동은 한국과 세계 교회의 고질적 병폐다. 공산주의자 편에서 편을 가르고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자들을 마치 무식자로 프레임 씌우며 자기들이 가장 현명하고 잘 난 사람으로 오만한 큰 교회 목사님들은 지금 한국 교회가 당면한 이 위기가 자신들의 거짓된 태도 때문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평신도와 국민을 속이지 말고 성경으로 돌아와야 한다. 동양의 주 사상인 중용사상과 성경의 유일신 사상은 전혀 다르다. 신 맑스주의가 문화 맑시즘이 되어 진지전으로 침투되어 혁명 행동화가 진행되고 있는데 구태의연한 헤겔 타령이나 하고 맑시즘이니 민중신학이니 좌파의 거짓 평등사상에 놀아나는 중도 침묵자들이 어찌 기독교 지도자라 하겠는가? 중도는 기독교 반역 행위다.

중도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사상인 첫째 이유는 피조물 인간이 조물주 하나님까지 판단하는 신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구원받은 성도는 진리인 하나님 편에 선 것을 확인받은 자이다. 진리 분별 기준과 판단권은 공의와 사랑이 완전하신 하나님께만 있음을 선포한 자다. 하나님의 판단을 믿고 따르고 순종하면 된다. 본래 신의 판단을 훔친 것은 사탄이 준 죽음의 선물이다. 자율주의가 죽음이다. 불신자들이야 자기가 신이니까 그럴 수 있다 해도 은혜로 거듭난 신앙인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하나님 자녀이지 중용의 도를 철학으로 삼을 수 없다. 나는 중간을 좋아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판단 기준을 배격하는 배도행위이다. 공산주의가 반기독교 교회 파괴주의인데 우파도 좌파도 아니고 자기는 성경 공부만 하겠다는 태도는 오만과 무식의 발로이다. 왜냐면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중도 진리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진실과 거짓으로 양분하지 중도를 말하지 않는다. 중도는 인간이 만드는 인본주의 책략에 불과하다. 자기 책임 회피를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진리와 거짓을 섞지도 않고 거짓을 진리라고 바꾸지도 않는다. 근대 다원화주의가 마치 진리가 여러 개이고 진실한 것이 거짓의 중간쯤으로 말할 수 있다 할지 모르나 진리를 떠난 자들이 주장하는 거짓 선동이다. 진리가 여럿이라고 속여도 여전히 하나요 변치 않는다. 시대에 따라 진리를 재 정의할 수 있을지 모르나 글로 쓴 정의가 다르다고 진리가 다른 것은 아니다. 하나님만이 진리요 진실이요 하나님만이 의와 공도를 완전히 만족시키는 분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원래 도그마이다. 궤변 철학으로 속이지 말고 1+1=2 이지 고등수학이니 어쩌니 베베 꼬아 진리는 여러 개라 속일 수 없다.

셋째 중도가 이길 확률은 질 확률보다 결코 높지 않다. 이쪽저쪽 아닌 중도가 이익을 볼 것 같은 유혹에 빠지지 말란 말이다. 양쪽에서 유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서 손해를 보기 일수다. 욕심으로 내가 택한 것이 내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50%이상의 승률보다 실패율이 더 높다. 진리 편에 서야 할 신자가 중도를 좋아하면 실패는 불 보듯 뻔하다. 황규안 전 국무총리는 대권 행보에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좋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한 신자면 하나님 편에 서서 확고한 신념으로 좌파와 적당한 거리를 두는 김종인 부류의 사람을 데려오지 말아야 한다. 목숨 걸고 하나님 편에 서서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 한번 안 되면 다음에 하면 된다. 한국 건국 이념 자유 민주주의가 기독교에서 나온 진실한 정치철학임을 왜 전도사 국무총리가 모를까? 어정쩡한 중도를 끌어들인다고 잔머리 굴려 중도클릭 하는 결정적 실수가 그의 정치 생명을 죽여 버렸다. 중도가 실패하면 해가 더 크다. 지더라도 분명히 서면 영광스러운 명예는 지킬 수 있다. 그것이 믿음이며 용기다. 지금 중도 보수를 붙잡는다고 진리 보수 끈을 놓는 국민의 힘당은 하루 빨리 진리 편으로 색깔을 분명히 해야 한다. 중도 보수는 실패의 유혹에 불과하다.

지난 서울 부활절 연합 예배오정현 목사의 사랑의 교회에서 있었다. 오정현 목사는 좌파와 우파의 화해를 설교했다. 물론 그 뜻을 모르는 바 아니다. 지금 한국 주사파 정권은 분명 반기독교 맑스주의 정권이다. 저들은 기독교 파괴가 집권 목표다. 이런 사탄 집단과 화해를 부활절 멧세지로 선포할 수 있는가? 부활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사탄의 머리를 치고 사탄이 준 선물 죽음을 파괴한 승리인데 화해라니 제 정신인가? 바울은 천국 여정을 마귀와 전쟁으로 규정 완전무장을 교회론 에베소서에서 요구했다. 집회에 참석하여 딴소리 한 소강석 목사는 선조 때 김성일을 혜안자라 믿는 자다. 김성일은 일본에 가 전쟁준비를 보고 확인했다. 그런데 보고할 때 임금과 국가를 속였다. 원수 반대당과 같은 의견을 제시할 수 없어 다르게 말한 것이다. 장차 나라 망하고 일제 36년 강점의 기초가 된 것을 모르나? 이런 말을 멧세지로 전하는 소강석 합동측 장로교 총회장은 어정쩡한 중간자 잔꾀로 복음적 보수 장자교단을 똥칠했다. 대적 주사파 사탄 놔두고 신사참배 회개한다니 소가 웃을 일이다.

손봉호 박사 계열 학생운동도 마찬가지다. 성경공부가 교회 비판 도구가 아니다. 믿음을 증진시켜야지 의원으로 오신 예수님이 병든 교회 고쳐라 했지 비판으로 교회 파괴하라 했나? 주사파 교회 파괴에 입 닫고 방조하는 태도는 바리세적 반역이다. 예수님은 믿음을 구원 방편 삼으셨다. 석학이면 분별력을 키워 기독교 방어에 앞장서야지 성경공부로 교회 파괴한다니 될 일인가? 전에 본인의 칼럼에서 지적했듯이 그는기윤실이 아니라기신실(기독교 신앙 실천 운동)”을 했어야 했다. 보수인척 하면서 행위를 믿음 보다 강조 교회 약점을 빌미로 파괴에 앞장 서는 것은 잘못이다. 미국 초기 청교도 분리주의자들은 썩은 영국 교회와 같이 할 수 없다며 신대륙에 왔는데 바로 변질되어 이단 되었다. 썩었어도 교회는 하나라는 주류 청교도들은 영국 교회를 떠나지 않고 개혁차원에서 회중 교회를 시작 결국 장로교를 세워 미국 건국에 주춧돌이 되었다. 기독교 산 역사는 제 2 사도행전이며 성령행전이다. 교회는 언제나 개혁의 대상이다. 파괴 대상이 아니다. 목회자는 적을 바로 알기 위해 쉬지 말고 책 읽어야 한다. 신학은 역사로 보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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