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동조, 동반, 동참의 차이(2021년 5월 9일 주일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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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同情), 동조(同調), 동반(同伴). 동참(同參)의 차이
2021년 5월 9일 주일 칼럼
요사이 주사파 정권 횡포와 부정에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한국 복음주의 지도자들과 대형교회 목사들이 자주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른다. 비교적 복음주의 설교와 성경공부로 저들이 한국 교회 지도자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국가적 위기에 침묵 동조하는 일은 아직도 기독교에 희망을 건 애국 신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실망감을 주고 있다. 성경을 인용하거나 사랑을 가장한 포용주의 중도 입장 표명은 더 심각한 사상적 혼돈을 일으켜 한국교회에 더 큰 혼란을 야기한다. 손봉호 교수를 필두 홍정길, 이동원, 김동호, 이찬수 목사들의 잘잘 흐르는 말솜씨는 이들 명성 실마리인데 그들 교회 비판에 사용되는 말솜씨가 좌파에는 침묵과 동조라니 저들이 불러온 영적 혼돈은 복음주의 회의론까지 야기시킨다. 저들이 진정 복음주의자며 기독교 지성인인가? 한 때 따랐던 필자의 실망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저들은 한국을 깨우는 것이 아니라 잠재우고자 한다.
우선 필자는 법률 공부를 한 일이 없어 법적 용어에 서툴다. 그래서 한문을 기초로 기독교 목사들의 무신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자 동성애자들에 대한 어정쩡한 태도를 분별하고자 한다. 기독교는 반 기독교자들도 전도 대상에서 제외할 수 없다. .그들에 대한 동정심을 배제해선 안 된다. 그것을 기독교의 원수 사랑이라 부르고 싶다. 그러나 기독적 신앙과 가치관에 분명하게 서 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동정심을 말한다. 다음 단계 동조와 동반은 중도 우파 중도 좌파 중간층 태도를 가진 집단이다. 이들이 문제다. 오늘 칼럼도 이들의 어정쩡한 태도에 집중코자 한다. 사이비 목사 태도 때문이다.
우선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 존재부터 분명히 하자. 성경은 불가시한 영적 존재로 성삼위 하나님이 존재하고 천사와 사탄 마귀의 존재를 분명히 가르친다. 이의를 가진 자는 기독교 신자 아니다. 성경은 복음적 사랑과 영적 전쟁의 현실을 또한 분명히 가르친다. 무신론 공산주의나 이들이 수정한 문화 맑시즘과 동성애 성해방 잰더론자들은 분명히 반성경적 여호와 하나님의 반기독교 반역자 사탄의 후손임을 분명히 가르친다. 이를 부정하는 목사나 신자는 교회를 떠나라. 빨리 옷을 벗고 공산주의자가 되든 이북으로 가든 태도를 분명히 가지라. 교회는 사랑이라는 동정심으로 원수들의 교회 내 활동을 동조하는 죄를 범하지 말고 교회 순결을 지켜야 살아남는다..
중도층 목사들이 성경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자주 인용한다. 누구든 예수 앞에 나와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없고 죄인이 없기 때문에 이들도 사랑해야 한다고 확대 해석한다. 공산주의자도 회개하고 돌아와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데 이론이 없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계속 반기독교 사상에 젖은 사람들에 대한 어정쩡한 태도나 동조하는 자세는 이미 싸워야 할 사람들에게 교회 파괴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일이다. 참 신자란 어정쩡하지 않는 유일신 하나님의 도그마를 믿는 자다.
첫 번째 단어“동정”은 어떤 신자에게나 필요하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메달아 죽이는 자들까지도 용서해달라 십자가상에서 기도하셨다.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을 향해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저들을 사랑하는 복음적 동정은 기독교인 필수다. 이 동정심은 복음 전도의 열정을 불러일으켜 만인 사랑의 하나님을 세상이 알게 한다. 그래서 동성애자, 성 해방자들이 심판받기 전 불쌍히 여기고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기도하며 무지로 죄에 빠져 자기를 잃은 사람들이기에 영혼 구원에 열정을 쏟는 것은 모든 성도들이 필요한 동정심이다. 저들 회개를 위해 죄를 죄라 분명히 지적하고 저들 잘못된 행동을 지적해야 한다. 지적하는데 반항하는 자들을 사랑이란 이름 아래 회개 전에 받아들이고 교인이라 인정하고 동료라 거짓말하고 분별없이 주는 사랑은 기독교 사랑은 아니다. 문제는 공부 많이 하고 말 잘하는 목사들의 어정쩡한 태도와 반기독교 동조다.
동조라는 말은 같이 보조를 맞춘다는 의미다. 동조자들은 자기는 기독교 목사라 말하며 반대자와 어깨를 같이하고 보조 맞추어 걷는 자들이다. 순진한 자들을 속이는 언어 혼란자다. 대부분 중도 입장이라 변명 동정, 동조 구별을 흐리게 한다. 성경적, 복음적 말 주변 때문에 사실 가장 위험하고 헷갈리게 하는 중도 우파다. 물론 저들은 아직도 복음적이고 성경적이지만 좌파나 주사파에 일리가 있다 말한다. 맑스주의 상당 부분이 성경에서 나왔다고까지 한다.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말씀 이용 하와를 유혹한 방법이다.
성경은 동조가 얼마나 위험한 잘못인지 이렇게 밝힌다. 다윗은 시편 1편에서“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않지 아니한다.”(시편 1:2). 죄인들 길에 선 동조가 이미 죄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행동적 간음 전이니 간음죄 성립 안 된다 할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 지론이다. 동조 자체가 죄다. 성경에 공산주의가 있다느니 토지 공유제가 성경적이라느니 기독교가 무신론 공산주의와 비슷하다는 동조가 더 무서운 죄다. 김동호 목사는 개인적으로 동성애 반대한단다. 그런데 목사하다 간음, 회개한 평신도로 살아야 할 자를 목사직 회복 청아람 지도자로 그 단체가 동성애 찬성하게 하는 짓은 동조를 지나 동반자 된 의미다.
웨스트민스터 출신 손봉호 박사 태도를 보자. 의사로 오신 예수님이 병자 죄인을 모아 만든 교회가 완전하지 못한 것 하나님도 아신다. 병든 교회 개혁하자는 미명하에 기윤실 조직 교회를 많이도 비판 이제 교회를 파괴하는 좌파에 동조하고 있다. 상당히 많은 대교회 목사들이 어정쩡한 태도로 침묵하며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좌파 편에 서는 것은 마귀에게 약점 잡히는 잘못된 범죄다. 동조적 포용을 사랑이라 포장하는 태도는 사탄이 준 올가미에 불과하다. 동조자 말 주변에 넘어가는 기독교인을 오도, 사상 혼돈이 너무 크다.
동반은 동조를 넘어 함께 짝 지어 행동한다는 말이다. 물론 아직 같이 Mix되어 한 몸 된 상태 이전의 사전적 의미라 본다. 새 우리말 대사전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연성에 공명하면서도 직접 그 운동에 참가하지 아니하고 그 진전하는대로만 따르던 인텔리겐차 작가”를 동반자 작가로 명명했다. 후기 근대를 사는 젊은이들이 동반자 작가 후예들 사상적 침공으로 헤매고 있는 것이 작금의 검은 현실이다. 서구와 미국을 거의 삼켜버렸다. 중도좌파의 개혁이 원래 좌파보다 무섭게 문화 개념으로 무장한 결과다. 이들의 내 맘대로 사는 국경 없는 세상 만들기는 저들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야성적이며 퇴폐한 짐승이 되어가는지 지금의 흑암이 증거하고 있다. 칼 맑스 혁명주의는 실패했다. 그러나 동반자 중도 좌파 발기 영향은 지금 한국과 미국에서 정점에 도달했다. 그들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 양심 세력은 날마다 가슴 쓰리고 아프다. 이게 짐승 세계인가 서구문명 몰락 현상인가?
사탄의 문화 맑스주의, 글로벌리즘, 박살문화, 정치교정, 성해방, 중상모략 거짓 예술 집단에 기독교 사랑이란 이름으로 결코 동조해서는 안 된다. 특히 WCC 극좌 다원화 종교 통일운동 지도자들은 이미 동조 단계 선을 넘었다. 하나님은 교회가 하나 되기 원하심을 모든 신자는 안다. 그러나 반드시 예수 안에서 하나이지 종교 통합은 망상이다. 좌파 사상 동조 단체로 하나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큰 교회 목사들이 WCC에 동조하는 태도를 회개해야 한다. 장차 하나님의 심판받을 날이 분명히 온다.
사탄과는 영적 완전 무장으로 싸우라 했지 동조하라 하지 않았다. 물론 저들은 동정 대상이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 바라는 동정심과 동조자 태도는 전혀 다르다. 동조자는 이미 악인의 길에 서서 사탄의 아들들에게 싸우지 않고 길을 터주는 태도다. 동조 중도란 현명한 정치 기술일지 몰라도 한국과 미국 같은 기독교 건국이념으로 세워진 나라에는 정치 중도도 위험하고 허용되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 건국이념이 파괴되면 천부적 인권도 자유 민주주의도 시장경제도 자본주의 소유제도도 사라지고 전체주의 독제가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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