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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우한 폐렴) 의심병 (2020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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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명길목사
댓글 0건 조회 2,912회 작성일 20-10-0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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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우한 폐렴) 의심병

202053일                                                                                                                                                                                                                                                                   이명길 목사

 

하나님은 구원받고 사는데 가장 중요한 관계 개선의 근본인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믿음으로 구원 얻는방법을 쓰셨다. 전능하신 하나님이기에 다른 방법을 사용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 종교 하다못해 미신까지도 선행 혹은 고행이 구원조건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믿음으로만 구원 얻게 하셨다. 너무 쉽다. 그러나 너무 어려운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만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죽어 구원 완성하셨음을 가르친다.

인간은 선행을 존중한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고행하고 선행하면 존경받는다. 한국 불교에서 성자 취급 받는 종정 성철 스님은 평생 누워 자본 일이 없다. 그런데 그는 죽기 전 내 죄가 수미산보다 높다 했다. 죄 문제 해결 못한 그의 솔직한 고백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믿음으로만 구원받게 하셨을까? 조건 없이 쉬우니 잘못된 구원론으로 나 구원받았다 Self Claim해 스스로 천국 가는 망상에 빠진 기독교인들도 많다. 은혜 아니고 스스로 구원받았다는 자는 반드시 지옥 갈 자다.

나는 쉬웠지만 하나님은 어려웠다.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 위에 죽이셨다. 예수를 선택된 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죽이고 함께 부활시켰다(6). 이런 사람들을 성령께서 중생시켜 예수 믿는 믿음을 마음에 새겨주고 고백하게 하셨다. 결국 하나님을 믿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구원은 믿음의 회복이며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다. 내 믿음은 관계 회복의 증거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내 믿음은 내 의지가 아니고 하나님의 100% 은혜다. 내가 얻은 믿음은 관계 회복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귀한 중생의 특별 선물이다.

하나님은 관계적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부부관계로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만물을 다스리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누리게 하셨다. 또한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살게 하시려고 믿음 곧 신뢰를 삶의 기본으로 삼으셨다. 믿음은 관계적 용어다. 믿음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부부간도 부자간도 친구간도 목사와 교인간도 통치자와 국민 사이도 믿음이 행복과 평안의 관건이다. 자유도 신뢰 안에서 가능하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 활동은 믿음(Credit)으로 유지 가능하다. 크레딧이 무너지면 자본주의는 최악이 될 수 있다.

조물주와 피조물 관계를 가장 끈끈히 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었다. 바로 이런 관계 바탕을 파괴시키고 인간을 자기 손아귀에 넣고자 사탄이 사용한 것이 의심이었다. 하와를 찾아 온 사탄은 질문부터 한다. 의심의 입문이 질문이다. “모든 나무의 과일을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물음표로 시작했다. 보이지 아니하는 상대방의 심리를 과학적 증거 없이 믿음으로 좋은 관계를 설정하는 일은 모험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연애도 실패하고 형제간 동업도 망하기도 한다. 그래도 관계 때문에 믿음이 필요하다. 의심하면 파괴된다. 의심은 결국 부부관계, 친구관계, 사업관계, 정부와 국민 관계를 파괴시킨다. 목사와 교인관계, 하나님과 인간관계 파괴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가정과 사회를 재건코자 믿음으로 구원하시는데 사람들은 사람 너무 믿지 마. 그러다 큰 코 다쳐라고 경계하며 지혜라고 권면한다. 신뢰가 관계적 삶의 중심에 있음을 알면서도 의심하는 것을 지혜라고 가르친다. 사탄의 영향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일수록 남을 의심하는데 도가 터서 의심하게끔 해석하고 추리하는 자를 앞서간다고 오판할 때가 많다. 사탄의 속임 수에 빠진 증거다. 심지어 권력을 탐하는 자들은 의심을 바탕으로 거짓 선동을 이용 피 흘려 권력을 쟁취한다.

하나님은 믿음이란 구원의 무기로 행복 나라를 건설하시는데 사탄은 의심으로 관계를 훼손 나라를 파괴한다. 하나님은 믿음 충만으로 이상 사회를 건설하시는데 사탄은 의심 충만으로 불평불만 현실 사회를 형성한다. 원수 갚고 싸우고 죽이는 일을 개혁이란 이름으로 사회 혼란을 꾀한다. 그래서 공산 사회는 자식이 아버지를 고발 감옥 보내고 벌 받게 하는 것을 공의라 가르친다. 관계 파괴가 정의로 둔갑한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 본성을 잘 알기에 죄인된 인간이 믿음의 삶을 시작하게 하시려고 먼저 하나님을 믿도록 자신이 희생,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구원해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기에 의심 가는 남편도 믿어보고 친구도 믿어보고 믿다 손해 보면 하나님께서 보상하심 믿고 그래서 거짓 사회에서도 의심의 천재가 아닌 믿는 바보로 살아가려 노력한다. 결코 모자란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보배다.

요사이 코로나 사태가 사람끼리 서로 의심하고 기피하게 만든다. 저 사람이 나와 함께 협조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병균을 옮겨 나를 죽게 할 수 있는 나의 살인자로 의심하게 한다. 사람 만나는 것이 이제는 두렵다. 경찰은 사람이 다 도둑으로 보인다 한다. 의심이 상식화되면 그럴 수 있다. 코로나 의심병이 선한 상대방을 내 생명의 위협자 살인자로 둔갑시킨다. 방관해야 하겠는가? 깊이 회개해야 한다.

질병으로부터 자기 방어를 소홀이 하란 말이 아니다.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은 이런 의심병이 나의 정상적 사고 체계를 무너뜨려 생각을 혼잡하게 하고 대화를 차단하고 나쁜 감정을 폭발하게 하기 쉽다는 점이다. 남편을 의심하면서 어떻게 부부생활이 가능한가? 대화가 줄어들고 분노가 조절되지 않는 것 모두 의심이 발단이다. 의심은 선악과를 따먹게 하고 자기 잘못을 숨기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기를 가리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양 스스로를 높이는 불균형한 자기 실존을 유발한다.

사탄은 바로 이런 인간의 이기적 본능을 잘 안다. 자기 목숨 하나 살고자 의심을 정당화한다. 파렴치한 이기심, 관계 따위는 안중에 없고 고립되어도 오래 살자는 본능에 사로잡혀 자기만 아는 피해망상증 환자로 하나님과도 멀어져 산다.

필자는 불신자로 인간 낙관론에 빠진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을 싫어한다. 그들은 인간을 협력 존재, 관계적 존재로 보지 않고 대립과 투쟁의 존재라 역설한다. 무력 투쟁으로 승리하여 권력을 쟁취하고 자기들 소수만의 특권을 형성하고자 하는 마귀의 권력 찬탈 집단이다. 이들은 사탄의 후예로 주 무기가 의심이다. 의심이 발생하면 거짓, 선동, 투쟁, 살인을 정당화 거짓 이상주의로 부부, 부자, 교인 관계를 파괴한다.

하나님은 진노로 사용되는 코로나 질병 중에도 가족관계 부부관계, 각종 인간관계 회복을 위해 회개하고 내게 나아오라고 권면하신다. 그러나 사탄은 코로나 의심병 만연으로 사람 만나기를 꺼리게 하고 선한 상대를 보균 살인자로 의심하게 한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는커녕 의심을 정당화 한다. 때때로 의심과 두려움이 피해망상증을 증폭시킨다. 정상적 사고가 파괴된 스키조프레니아의 초기 증상을 보인다.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에게 쌍욕을 하고 소리를 지른다. 목사 선교사까지도 마치 살인자로 취급한다. 이런 의심 충만으로 100살까지 산다 한들 진정 무슨 가치 있는 삶인가?

막스-레닌 공산 혁명의 실패로 진로를 수정 점진적 문화침투로 서구 기독교 국가들을 말살하려는 문화 막시즘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동성결혼, 남녀평등, 난잡 성교 해방, 페미니즘, 낙태 살인 자유, 말초 신경 자극의 쾌락주의 등 반 전통 사회 파괴로 가정과 교회, 인간 가치가 무너지고 있다. 사람이 죽어가고 시체를 길거리에 버려도 회개와 자성의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병이 끝나면 의심으로 원수가 된 이웃끼리 어떻게 대화를 트고 만날 것인지 새로 불거진 사회학 숙제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산다. 관계가 망가지면 내 삶이 망가지는 것을 왜 모르고 오래 살려고만 몸부림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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