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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正直,Honest) (2020년 5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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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명길목사
댓글 0건 조회 3,255회 작성일 20-10-08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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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직(正直,Honest)

 

2020531일                                                                                                                                                                                                                                                                 이명길 목사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에베소서 4:25) 라고 사도 바울은 소통에 대한 권면에서 첫째로 정직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가정에서 사회에서 서로 소통으로 하나 되려면 정직해야만 가능하다. 정직한 사람들이 소통하는 사회가 진실하고 행복한 사회다. 정직이 무너지면 소통과 신뢰가 무너지고 진실이 무너지면 사회는 무질서와 사회 분열로 불안하게 되고 불신은 자본주의 경제를 망친다.

우리말 정직은 한자에서 왔고 바르고 곧다는 의미다. 우리말 큰 사전에는마음에 거짓이 없고 바르고 곧음이라 했다. 영어의“Honest”는 원래영예롭다, 존경스럽다, 믿을직스럽다는 뜻에서 왔으며속임수나 거짓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의 경우 쓰임이 다양하며 폭이 넓고 특히 사실, 가치, 찬양 등 넓고 파생어가 다양한 점을 보면 정직에 대한 깊은 관심과 표현 역사와 발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정직에 대한 성찰과 개인의 인식과 관심을 끈 단어였음을 보여준다. 대체적으로 정직은 최상급 덕목이며 가정, 사회생활의 기초적 덕목이며 특히 신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직성은 사회 경제 활동의 초석이며 또한 기둥아라고 할 수 있다. 시장 경제 사회는 크레딧(신뢰)이 숫자로 표현되는 체제다.

가장 중요한 인격의 덕목 정직을 살피려면 왜 거짓말을 하는지 살펴야 한다. “앰허스트대학의 연구에 의하면 인구 60%10분에 1번 이상 거짓말을 하고 2, 3회씩 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팰드만 교수는 사람들은 일상 대화에서 심각한 횟수의 거짓말을 한다. 우리는 보통사람의 일상생활 상당 부분이 거짓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루 잠자는 시간 빼고 100-320마디 거짓말을 하는 통계다. 미국의 통계가 그러니 한국이나 중국, 미개한 나라, 공산국가들은 훨씬 비율이 높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회는 정직한 사람이 정말 살기 참 힘들다. 왜 거짓말을 자주 할까?

거짓말하는 첫째 이유는 편리하고 간편함 때문이다. “거짓말은 외삼촌보다 낫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위기를 당했을 때 잠깐 속이면 싸우지 않고 내게 큰 유익이 오는데 거짓말보다 더 편리한 것이 없다. 이런 위기 모면의 경험이 많을수록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된다. 스스로 간단한 거짓은 필요하다고 믿어 가책이 없어진다.

둘째는 속이는 것이 더 좋다는 상황 판단 때문이다. 예로 사실은 아니지만 칭찬을 하는 경우다. 솔직한 자기감정보다는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은 당장에도 편리하고 사회 통념상 요구되는 부분이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 거짓말을 사용한다. 좋아하지 않으면서 좋아한다 말하고 야윈 얼굴을 보고 좋아졌다고 말한다. 심지어 적극적 사고로 용기 주라며 진실보다 과장이나 거짓을 덕목삼아 말한다.

셋째 사회와 문화가 거짓에 조금은 개방적이거나 용납되는 사회에서 일상적 거짓이 생활화되어 있는 경우다. 이런 사회일수록 독재정치나 강력한 정치 지도자가 많다. 비교적 비기독교 국가나 신앙심이 낮고 교육 정도가 낮은 나라들이다. 미개하고 가난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넷째 의도적으로 상대방을 속여 계획적으로 사기를 치거나 거짓으로 속이는 경우다. 대체적으로 물질, 명예 등 본인이 큰 욕망으로 삼을 만한 것들을 쉽게 얻기 위해 상대방을 속이는 거짓이다. 욕망에 사로잡힌 거짓은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킨다.

다섯째 좌파 이념 사회는 거짓을 이용하거나 조작한다. 선전 선동으로 백성을 속여 투쟁으로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때문에 거짓에 대한 가책이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기면 거짓도 정의가 되는 사회다.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이 이론이 그렇다.

거짓은 심리적으로 충동적, 의식적, 계획적 3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위급한 상황에서 자기 방어 차원의 순간적 충동인 찰나적 거짓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의식적이다. 악의든 선의든 자기 판단에 옳은 대로 거짓말을 한다. 의식적 거짓은 성장한다. 때때로 별 것 아닌 거짓도 상대방에게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래서 충동적인 거짓부터 잠시 생각하고 말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욕망이나 이익을 위해 의도적이고 계획된 거짓말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속이고 소통을 마비시킨다.

그래서 진정한 정직성은 양심과 관계가 있다. 참된 정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소통의 자각 없이는 이룰 수 없다. 무신론자들은 자신이 자기 신이기 때문에 정직성 따위는 자기희생의 선을 넘을 수 없다. 자기가 살아남는 것이 최고인데 어떻게 정직으로 자기 존재를 대체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양심이 살아야 정직한 마음이 생기고 반듯한 양심이 되어야 정직을 실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두려워하는 경외심 없이 자기가 정한 정직이 행동화될 수 있겠는가? 진정한 양심의 소유자로 자기를 희생하며 남의 존경을 받고 신뢰를 받는 사람이 되려면 기독교 신앙 없이는 불가능하다.

정직이 왜 소통의 필수일까? 인간은 타인의 마음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알 수도 없다. 말과 행동이 그 사람을 인식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가정이 하나 되고 사회가 하나 되는 것은 인격의 만남이지 수단으로 되지 않는다.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만들어 삼위도 일체 될 때 사용한 언어()”를 인간에게 주셨다. 언어 소통이 정직으로만 하나 되기 때문에 정직은 소통의 근본이며 필수 요소다.

어떻게 이렇게 중요하고 본질적 형상인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첫째 양심훈련을 해야 한다. 정직은 양심과 불가분의 관계라면 하나님 없이 스스로 온전한 정직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양심이 가책을 주지 못하는 데 내 앞에 큰 이익을 물리칠 정직이 왜 필요한가? 잠깐 속이고 잘하면 영원히 아무도 모를 유익을 내가 왜 포기하고 정직해야 할까? 속임보다 정직이 바보짓 아닌가?

둘째 거짓을 버리라고 바울은 말한다. 정직과 반대되는 거짓, 욕심, 욕망, 속이고 얻는 심리적 쾌락까지 버려야 한다. 진실과 거짓의 공존은 위선이다. 버리는 것이 인격을 높이는 필수적 우선순위이기 때문이다. 특히 거짓을 버려야 하는 것은 내가 속이는 상대방이 나의 지체이기 때문이다. 성삼위 하나님은 서로 하나님시기에 속일 수 없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속일 수 없듯 잠깐 속이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아내는 나와 한 몸이고 자식은 내 열매이며 이웃은 내가 연결된 사회 일원이 아닌가? 내가 사귀고 소통하고 나누고 함께 살아가야 할 내 분신이다.

셋째 상대방에게 이롭고 좋은 뜻의 거짓이라도 일단 작은 거짓부터 생각하고 정직하게 말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거짓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뜻으로 말한 것이라도 위선이 발각되면 신뢰 상실뿐만 아니라 심한 소통의 역풍이 불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사실을 5과 원칙으로 인식하고 전하는 습관을 익혀야 한다. 사실 인식에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5원칙이 필요하다. 누가 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도 사실만을 이에 준하여 전해야 한다. 대개 사실을 과장하는 거짓은 전하는 자의 욕심이나 심리적 쾌락 때문에 일어난다. 꼭 전해야 할 필요성을 가질 때는 5과 원칙을 살려 생각하고 전할 필요성을 확신해야 한다. 과장의 말을 듣는 자는 내 편일 줄 알지만 사실이 판명될 때 오히려 더 큰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여섯째 내가 5과 원칙으로 말해도 인식 정확도는 25%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옳다고 다른 사람도 옳은 것이 아니다. 주관이라는 선입견과 판단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 다. 사실적 인식이 절대적 사실과 다를 수 있는 점을 전제해야 한다. 빨강 안경 쓴 사람이 붉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정직이지만 남에게는 거짓이다. 내 기준과 상대방이 다른 것 이다. 겸손해야 객관과 정직이 보인다. 그래서 좋은 소통은 겸손한 마음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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