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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분노(忿怒) 조절(調節) (2020년 6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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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명길목사
댓글 0건 조회 3,296회 작성일 20-10-08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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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忿怒) 조절(調節)

 

202067일                                                                                                                                                                                                                                   이명길 목사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4:26-27). 소통 방해 요소 정직다음으로 분노를 들고 있다. 분노는 인간관계에 금이 가게하고 파괴하는 두 번째 큰 장애물이다. 바울은 분을 낼 수 있다고 여유를 두고 죄가 안 되는 분노를 시사, 분노로 죄짓지 말라 한다. 뿐만 아니라 분노 해소 없이 마음에 품는 것은 사탄에게 더 큰 죄를 짓는 기회를 제공한다 말한다. 그래서 분노를 조절하고 절제하여 상대방과의 결정적 관계 파괴를 일으키지 말기를 권면한다. 조그만 일에 삐지고 작은 비평도 수용 못하며 남에게 항상 분노하는 사람은 친한 친구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피해망상증 환자는 많은 사람에게 항상 분노한다.

사실 분노는 하나님께서 인간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생물 모두에게 주신 본능적 자기방어 수단이다. 하나님도 때때로 진노하신다. 예수님은 성전 타락상을 목격하시고 화가 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어버렸다. 성령님의 분노는 불로 태워버린다.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동물도 공격하면 화를 내어 대든다. 대부분 보통사람은 공격하면 화가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는 죄가 아니다. 정의롭고 공의로우며 절제하시고 화를 내시는 거룩한 분노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분노도 절제해야 하는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분노 조절은 대상에 따라 조절 수위를 달리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관계 두절의 정도와 영향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분노 대상을 자신, 대중, 하나님, 즉흥 공격자 등으로 나누어 생각해보자.

자신에 대한 분노는 주로 자신의 부족함, 연약함, , 실수 등에 따른 분노로 자신의 생각이나 잘못을 고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자기에 대한 분노로 성찰 회개 교정하면 자기 인격과 덕망이 높아진다. 상대방에 대한 분노보다 자신에 대한 분노를 우선하는 자는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되는 최고의 덕망이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자기를 먼저 성찰하고 자신의 죄에 대한 분노를 먼저 하라고 권면한다. 동양도 수신(修身)을 제가(齊家:가정을 다스림), 치국(治國), 평천하(천하통일)보다 앞세운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분노가 자기 비하, 자신감 상실, 좌절, 절망으로 이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신에게 분노할 줄 모르는 교만을 하나님은 가장 싫어하지만 회개한 후 하나님 손에 붙들려 능력을 덧입고 더 자신감 있게 역경과 고난을 이기기를 원하신다. 지나친 자신감 상실은 불신이며 오히려 바람직한 소통을 감소시키고 상대방에게 자유로운 접근을 방해한다. 겸손과 자기 정체성 상실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직접 공격은 아니지만 사회나 정치 집단이 상식 이하의 일로 잘못을 저지르는 데 대한 분노가 있다. 일반 다수가 분노하여 공분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치나 사회 집단의 분노는 직, 간접으로 내게 미치는 정도에 따라 분노 수위가 달라진다. 사실상 공분도 사회정의를 심히 해치고 상식을 벗어나게 될 경우 심한 분노를 일으켜 화병이 되기도 한다. 공분은 대개 집단행동으로 비화한다. 집단항거도 원인과 결과를 세밀하게 분석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상대방 횡포를 막을 수 있다. 전략과 대응 방식을 연구, 사회 정의 편에서 시행되어야 한다. 성경은 집단적 폭력은 금하고 있다. 데모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지만 집단폭력은 사회 질서를 파괴하고 항의 원인마저 약화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 지금 미국 죠지 플로이드로 인한 데모대들이 새겨들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분노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못마땅할 때 일어날 수는 있지만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것이 필수다.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잘못으로 보이던 것이 결국 나의 잘못이고 내가 문제인 것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분노 조절은 분노 표출을 대상으로 한다. 분노조절은 주로 개인적 분노 표출을 조절하라는 말이다.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서로 간 유익이기 때문이다.

분노 조절을 위해 죄짓는 분노와 거룩한 분노를 먼저 구분함이 좋다. 매우 중요한 주제다. 분노를 본능으로 주신 하나님도 분노하신다. 그래서 죄짓지 않는 분노가 때로 필요하다. 거룩한 분노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죄다. 분명히 잘못한 것을 보고도 모른척하고 무관심한 것 역시 죄다. 주사파 공산주의가 나라를 망치는 데 무관심으로 침묵하는 것은 비겁이다. 세례 요한도 독사의 자식이라고 분노하였고 예수님도 성전에서 분노하셨다. 기독교인이면 권력자들의 부정과 잘못에 대한 거룩한 분노를 표출해야 한다. 자녀가 잘못을 저지르면 사랑의 채찍을 들어야 하고 상대방의 분명한 잘못은 조심스럽게 회개토록 도와야 한다. 그것이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이고 진짜 사랑이다.

대부분 일반 사람들이 표출하는 분노는 즉흥적 감정적 분노다. 이런 분노는 정말 대화를 막고 인간관계를 단절시킨다. 조절 없는 즉흥적 분노는 성격 결함 혹은 인격부재 소치다. 때때로 이런 분노는 상대방을 압도하기 위한 잘못된 자기 신념 때문일 수 있다. 하나님은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했지 사람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지 않았다. 남자를 정복하고 다스리려는 페미니즘은 분명 죄다. 인간은 협력의 대상이지 투쟁과 복수의 대상이 아니다. 성질이 고약하고 괄괄하고 무서워 보여야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다고 착각 분노를 일삼는 자는 정말 인생을 잘못 배운 사람이다. 양순한 초식 동물은 수가 불어나도 성질 사나운 육식 동물은 멸종 위기에 있다. 폭력은 자기 멸망의 길이다. 즉흥적 분노를 삼가고 표출 방법을 심사숙고하는 습관 형성이 중요하다.

바울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한다. 분노를 하루 동안 해결하라는 권고다. 분노가 마음에 남아있으면 원한으로 변한다. 원한은 선입견을 형성해 상대방을 사사건건 오해하게 만든다. 분노가 마음에 계속 쌓이면 별것도 아닌 것에 폭발한다. 누적된 분노가 한 번에 표출되어 상대방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다. 처음 분노보다 쌓여 폭발된 분노는 그 파괴력이 훨씬 크다.

쌓인 분노는 마귀에게 죄질 기회를 준다. 사탄은 불평, 불만, 원한 등을 노린다. 하나가 되어야 할 가정과 사회를 편 갈라 투쟁하도록 만든다. 분노를 즉시 해결 않고 마음에 담아두는 것을 마귀는 잘 이용해 하나님의 만유통일을 방해하고 해친다.

한국 문화는 마음에 쌓아두는 분노를 이라고 미화해왔다.“때문에 말 못하는 여인들은 심리적 육체적 질병으로 평생을 고생했다. 한을 푸는 서편제 판소리가 생겼다. 백성들은 이 한풀이를 들으며 함께 울며 분을 삭였다. 원수 갚는 것이 선이었다. 분노는 해 지기 전 풀어야 한다. 복수할 일을 품는 것은 자기 인격 파괴다.

분노를 해결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 분노 표출의 대상을 바꾸거나 해소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다. 분노를 즉흥적으로 표출하지 말고 화가 나면 밖으로 나가 산책하며 깊이 생각해보거나 길가 돌멩이를 발로 차거나 인간 아닌 비인간 표적에게 표출하는 방법 등이다. 어떤 경영자는 자기를 비난하는 직원들의 분노 표출을 위해 드나드는 정문 앞에 자기상을 만들어 오며가며 주먹으로 치게 하였더니 불평이 사라졌다 한다. 시를 써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여행하는 방법 등 건설적 방법들이 많다. 자기만의 표출 대상과 방법을 개발해 직접 분노 폭발을 피하는 습관을 익히면 참 유리하다.

신자의 가장 좋은 간접 분노 표출은 기도로 하나님께 솔직하게 불평하는 것이다. 다윗은 성자가 아니었다. 장인이면서 시기로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에게 직접 분노하지 않고 시를 쓰며 기도했다. 하나님께 원수를 물리쳐달라고 조르기도 했고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울며 불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인을 죽일 절호의 기회에 복수하지 않았고 끝까지 분노를 조절했다. 다윗 시편의 많은 부분이 분노 시로 읽어만 보아도 위로가 된다. 기도로 마음에 원한을 쌓지 않고 정직히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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