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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惡의 根源 (2020년 6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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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명길목사
댓글 0건 조회 3,238회 작성일 20-10-08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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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根源

 

2020614                                                                                                                                                                                                                                                              이명길 목사

 

많은 불신자, 기독교에 실망하는 분들에게는 악의 문제가 최대의 걸림돌이다. 신자들도 가끔 나는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시편 73:5-5)라고 불평한다. 선하신 하나님이 수천만을 죽인 스탈린, 캄보디아 폴포트, 모택동, 김일성 왕조의 악행을 보고만 있는지 이해하기 참 힘들다. 목사 장로들 가운데도 분명히 악이 보이는데 그런 교회는 더 커지고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는 내게는 이보다 더 큰 실망이 없다. 그러나 내가 저지른 큰 죄악에도 불구하고 내 생명을 바로 취해 지옥으로 떨어뜨리지 않는 그 분에 대한 감사는 인식하지 못한다. 자기를 참으시는 하나님은 전혀 안목에도 없다. 소위내로남불은 불신자들의 일반적 관습이다. 남을 보고 일으키는 의문을 왜 자신에게 적용 못하는가?

왜 악이 존재하는가? 엉뚱한 질문이 아니라 수천 년 인류 역사에 중요한 철학적 난제로 아직까지 명쾌한 해답을 못 찾은 질문이다. 사실 성경은 이 문제를 3500년 전 모세를 통해 말해주었지만 철학자들은 하나님도 성경도 부정하니 답을 찾을 길이 없을 뿐이다. 이성으로 현실적 악을 형이상학화해서 답을 찾으려 하니 번지를 잘 못 짚은 것이다. 지금도 철학에 잡힌 이념주의자들은 살아 있는 현실을 외면하기 때문에 헤매고 있는 질문이다. 그래서 반기독교 좌파들은 전통적 용어 개념 대부분을 수정을 하고 있는 중이다. 악이란 개념이지 실체는 없는 것이기에 개념만 바꾸려 한다.

악의 근원 문제는 항상 유일신이나 유일신 철학을 주창하는 분들을 향한 공격 제목이었다. 악의 현실적 인식이 아니라 이론으로 교정하고자 했다. 특히 철학자들이 찾는 이성으로 인식되는 악은 실제보다 이념화의 개념이 되고 성서의 실질적 악의 접근을 우롱해왔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죄 혹은 악의 문제가 전부라 할 수 있다. 죄를 취급하는 것이 제사이고 구원이고 기독교이다. 유물론자들에게는 악은 변증에 필요한 과정일 뿐이다. 우선 철학자들의 죄의 근원 이론을 살펴보자.

고대 그리스 대표적 철인 풀라톤은 이데아 세계의 이상형보다 부족한 것이 악이라 했고 이 사상은 후대 기독교 신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악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선한 것으로 만들어진 의지가 자신의 질서에 배반할 때에만 악이 존재한다 했다. 이후 중세 케돌릭은 EvilWrong 두 가지 악으로 나누고 본질적으로 있어야 할 선이 부족한 것이 악이고 당연히 해야 할 길에서 벗어난 행동이 악이라 했다. 근원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결함이라 보았다. 이런 견해는 토마스 아퀴나스나 심지어 근대 신정통주의자 칼 발트도 선의 결여가 악이라 본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서 이미 말하고 있는 사탄과 인간 타락에 대해서 의심 없이 믿었다. 따로 철학적으로 논의가 필요 없었다. 문제는 17세기 이정주의자들이 이성 철학으로 성경을 난도질하면서부터 성경적 세계관과 구원론을 근본적으로 부정함으로부터 다시 악의 근원 문제가 등장하게 된다. 사실은 하나님께 죄를 돌리기 위함이었다. 이런 논의를 단절하고자 라이프니닛츠(Leibniz)는 변신론(혹은 辯義論)에서 보다 높은 선을 위하여 악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설파했고 악이 하나님의 선을 방해하지 않는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계몽주의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악은 사탄이 만들어 인간이 행동하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그 악인을 오히려 치유해서 사용 선을 이루시는 것이다(로마서 8:28).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악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역사 안에 두어 큰 안목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권 통치임을 강조한다. 성경은 악을 전능하신 주권자의 크신 구원역사 성취 방법 가운데 두셨다.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순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사탄에게까지도 적용 악을 참고 이용하셔서 의를 나타내신다. 모든 악을 없애는 것은 인간 욕망의 하나님 나라가 오기 전 하나님 방법은 아니다. 악의 문제는 17세기 계몽 철학이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인본주의 사상이 주류가 되면서 특히 유일신과 악의 문제를 연계 핑계거리를 찾아 책임 전가하는 노력에서 재기됐다. 근대 서구 퇴폐문명은 이런 반기독교 인본주의 열매다.

일반적으로 악은 도덕적인 악과 자연적인 악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도덕적인 악은 도덕 기준을 범하는 악이며 자연적 악은 자연 재앙 등으로 인간에게 고통과 손해를 주는 악이다. 자연 재앙은 근대 과학 발전으로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되어 악이라 취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도덕적 악을 벌하기 위해 자연적 악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신다. 자기 주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오히려 좋은 교훈과 연단의 도구로 삼는다. 더 좋은 선을 이루기 위해서다. 이것이 악을 없애지 않고 이루는 하나님의 전능성의 특징이다.

악 때문에 예수 믿기를 거부하는 불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제를 던져주고 싶다. 깊이 생각해보라.

1. 선악의 동기는 보거나 만질 수 없는 정신적 영적 영역이다. 마음에서 행동이 우러나온다. 성욕을 예를 들자. 성욕이 없으면 자손을 낳을 수 없다. 프로이드같이 모든 인간 문제를 성욕의 억제로 보는 심리학자가 생겼다. 성욕이 모든 심리적 질병 원인이며 성격이 성욕으로 형성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가정을 지키는 전통적 사회 제도에 악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다. 이보다 사탄이 성적 욕망을 충동 타락시키고 악을 행하게 한다는 설명이 더 사실적이며 이해하기 쉬운 설명 아닌가?

2. 스스로 자율권을 탈취 행사한다고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율권보다 훨씬 크신 존재다. 자율권으로 자신이 자기 신이 된 순간 자신을 자신이 가두어버린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 수도 볼 수도 찾을 수도 없다. 자기에 갇혀 있는 자 되게 한 사탄이 자기 상왕인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기가 끝까지 왕이라 주장한다.

3. 주권자 하나님이 악을 포함한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심을 전능성 부족으로 폄하하는 것은 유한적 존재가 무한한 신에 도전하는 무지의 표출이다. 하나님을 하나님 편에서 이해할 수 없으면 그냥 순종하는 것이 낫다. 갸롯 유다의 배신은 분명히 사탄의 영향 하에 행한 갸롯 유다의 악행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을 모든 신자들의 죄를 대속하는 어린양의 제사로 만들었다. 이것이 전능이지 무능인가?

4.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통치인 구속사의 전체적 콘택스트를 이해 못하고 악이라는 단면적 문제를 제한적 이성과 논리로 답을 찾고자 하는 자체가 오류다. 하나님은 역사 집행자로서 인류 구원 목적을 위해 그의 통치 원리인 공의와 사랑을 조화시킨다. 그래서 구원사적 이해가 요구된다. 성경을 무시하고 죄를 논하는 것은 무익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무신론자들이 악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위선에 불과하다.

5. 하나님은 세분의 서로 다른 인격체가 소통으로 하나 된 삼위일체시다. 서로 다른 인간도 모여 소통으로 하나 되라 명령하셨다. 잘나고 못난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 되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다양성이 오히려 과정과 결과를 더 풍성하게 한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악으로 병든 자)의 의원으로 오셨다. 죄인과 의인이 하나된다.

6. 사탄이 악의 원인이라고 악행을 사탄에게 돌리지 못한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기계로 만들지 않고 인격체로 만들었기에 자기 악행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7. 하나님은 악을 만드는 분이 아니다.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재앙까지 간섭하지 않으신다. 창조 질서 보존은 노아와 맺은 언약의 핵심이다. 하나님은 기적보다는 자연 현상 유지를 선호하신다. 질서를 어기는 기적보다 자연적 결과에 맡기시는 하나님을 재앙의 원흉이라 책임 전가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무신론 인본주의 횡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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