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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만(Harry S. Truman) 대통령(2021년 12월 19일 주일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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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명길목사
댓글 0건 조회 1,502회 작성일 21-12-17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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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루만(Harry S. Truman) 대통령


지난 월요일(126) 엘에이 총영사가 알버커키에 와 한국전 참전 용사들 메달을 수여했다. 메달 수여식에 참석한 본인은 트루만 대통령 동상에 대해 영사에게 질문해보았다. 한국의 임진강 변 유엔 참전군 묘지에 멕아더 장군과 함께 있는 트루만 대통령 동상 외에는 미국도 한국도 동상이 없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일본에 원자탄 투하로 우리나라를 해방시켰을 뿐 아니라 한국전 참전으로 우리를 지켜 주신 대통령인데 참전 용사들은 기리면서 참전명령권자 트루만 대통령 군 통수권자에 대한 감사는 왜 소홀히 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알고 보니 한국전 참전으로 국민 저항을 심히 받은 때문이었다. 이제 미국도 재 역사 평가로 트루만 워싱턴 복귀 운동(Truman Back to Washington Campaign)”이 이미 시작 진행 중임을 이 칼럼을 써 알리고 싶어 쓴다.

트루만 대통령은 188454일 미주리(Missouri)주 라마(Lamar)에서 농부인 Anderson TrumanMartha Ellen Young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6세 때에 인디펜던스로 이사해 장로교에 출석 피아노 치기를 즐겼고 매일 5시에 일어나 피아노 연습하고 일을 한 부지런한 청년이었다. 1901년 인디펜던스 고등학교를 졸업 캔사스 시 스폴딩(Spalding) 상학(Commercial College)에 들어갔으나 1년 만에 그만 두었다. 돈이 없었다. 잠시 은행, 철도회사에 근무한 후 조부 농장에 돌아와 농사짓다 1917년 군대에 들어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군 복무 후 캔사스 시 법대에서 2년 공부했으나 중단 학사학위 없는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그가 법대 다닐 때 카운티 판사 선거에 낙선학교를 중퇴했고 나중 캔사스 법대에서 변호사 경력과 교육에 충분하다는 통지를 받았으나 연연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어서야 1947년 변호사 자격증을 신청했으나 1996년 미주리 대법에서 명예 변호사 자격증을 받았다.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지만 정말 훌륭한 정치가요 행정가였다. 1919628일 군 복무 마친 트루만은 고향에서 베쓰 왈레스(Bess Wallace)와 결혼 외동딸 메리 마가렛 트루만(Mary Margaret Truman)을 낳았다. 당시 캔사스 시 민주당 강력자 톰 팬더개스터 후원으로 1922잭슨 카운티 판사가 되었고 재선엔 실패 다시 도전 1926년 당선 1932년 루스벨트 대통령을 도움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후 미주리 주지사, 연방 의원에 출마하고자 했으나 팬더개스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 1934년 미주리 연방 상원에 도전 상원의원이 되었고 2선에 도전 승리했다. 이 때 독일 나치가 러시아 공산당을 침략했다. 나치가 이기면 러시아를 러시아가 이기면 나치를 도와야 한다고 한 했었다. 1940년 후반 미 군사위원의장으로 피선 루스벨트 대통령을 도왔다.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yn Roosevelt) 4선 때 34대 부통령이 되었으나 루스벨트가 취임(120) 41282일 만에 사망하자 승계 33대 대통령이 되었다.

승계된 트루만 앞에는 너무도 무거운 국내외 문제가 산재해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비밀리 개발하는 핵폭탄을 부통령에게까지도 숨겼다. 2차 대전으로 세계 경제는 말이 아니었다. 국내 문제는 오랜 사회주의 민주당 루스벨트 대통령 집권으로 계획경제에 반대한 노조와 아직 수습되지 않은 2차 세계 대전 후유증으로 파생된 경제난이었다.

무엇보다 백악관 스탶들이 겨우 10여명밖에 없어 대통령 혼자 힘으로 너무 힘들었다. 스스로 밤을 새며 일했다. 우선 대중 매체들의 기자회견과 소통이 큰 문제였다. 그 역시 불평하는 기자들을 믿지 못했다. 핵폭탄에 대해 대통령 된지 13일 후에야 전쟁부장관 Henry Stimson 보고로 알게 될 정도로 전임 대통령은 트루만을 따 돌렸다. 194586일 히로시마에, 9일 나가사끼에 원자탄 투하를 명령했다. 트루만은 지금까지의 결정 중에서 가장 힘든 결정이었다고 고백했다. 농부들은 농산물 매매를 거절했고 80만명의 노동조합이 파업을 했다. 처음 82% 인기가 경제 파탄으로 32%로 주저앉았다. 국제적으로 쏘련 팽창과 신흥 중국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전쟁 비용으로 파탄난 국내 수습과 아울러 피폐된 유럽 건설의 무거운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냉전을 대비 1947국가보안법(National Security Act)을 제정하고 중앙 정보국(CIA)를 창설하고 국가 안전국(NSA)을 신설하고 국가 안전 위원회를 구성했다. 공군을 창설하고 해군을 통합 국방부(Department of Defense) 전신인 국군부를 창설했다. 이 모두가 트루만이 시작한 부서다. 국내외로 너무 험악한 상황 하에서도 트루만의 공적은 현저하다.

1948514일 이스라엘 건국선포 수분 후에 이스라엘을 가장 먼저 승인했다. 19476.29. 흑인 지위 향상 협회(NAACP)에 최초로 참석 연설한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행정명령 9981 군대 내 인종차별을 처음으로 금지시켰다.

1948년 대통령 선거는 예상 불가의 박빙 선거였다. 여론은 공화당 토마스 듀이(Thomas Dewey)가 근소 차로 앞섰다. 11월 투표일 후 시카고 트리뷴 지는 대통령 선거 결과를 듀이 승리로 발표했다가 정정하기도 했다. 개표 결과 트루만의 승리였다.

트루만 대통령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19506.25. 한국동란이었다. 1948년에야 선출 대통령직을 시작한 트루만은 첫 국무장관 애치슨으로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선포하게 했다. 트루만은 625일이 주일이라 고향에서 휴가로 쉬고 있었다. 북괴침공을 밤에 연락받았다. 왜 애치슨 라인 밖에 있는 한국전에 미군이 급히 무리하게 참전했는지 자세한 기록이 없다. 후에 빌리 그래햄 목사 자서전에서 비화를 밝혔다. 평양 선교사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중고등학교 시절 공부한 그래햄 목사 부인 루스 벨(Ruth Bell)상해 의료 선교사 넬슨 벨(L. Nelson Bell)의 딸이었다. 선교사 자녀 교육 시설이 없어 평양 학교에 보내졌다. 남편 빌리 그래햄 목사의 한국 사랑은 부인 영향이었을 것이다. 빌리 그래햄 목사는 친한 트루만 대통령에게20만 한국 기독교인들을 공산당에게 내어줄 수 없다고 했다 한다. 돈독한 신앙에 유달리 반공주의 트루만627일 미군 1개 부대가 도착했다. 전쟁 참전은 의회 인준이 필요하다(후에 1차 파견은 인준 받음). 의회 인준 과정이 느리고 복잡해 대통령 권한으로 유엔을 이용키로 했다. 유엔 안보리 5개국 중 중국은 아직 장개석이었고 쏘련은 왠일인지 대표자가 불참 어려움 없이 안보리를 거쳐 유엔군 파병을 가결했다. 미군 파병을 반대하는 당시 국방장관 루이스 죤슨(Louis A. Johnson)을 해임하고 전 장관 마샬(General Marshall) 장군을 다시 기용 유엔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하였다. 친한 기독교인 맥아더 장군을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 38선을 넘어 북진 압록강까지 진군 큰 승리를 거두었다. 트루만 인기가 다시 상승하게 되었다. 중국 해방군이 인해전술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미군이 한국 허리를 가르고 인천 상륙 작전으로 압록강 코앞까지 올 줄은 모택동은 몰랐다. 1951년 중공군 개입은 치명적이었다. 참전군은 도합 1789천명이었고 미군만 전사자가 36,940, 실종자 3,737이며 포로 7,245 부상자92,134이었다. 만주까지 북진을 고집하는 맥아더 장군의 요청을 거절했다. 결국 그를 파면 국민들의 반전 기세 수습을 시도했지만 19522월 갤럽 여론조사22%로 폭락하고 말았다. 결국 2차 대전 후 해같이 떠오르던 트루만 대통령은 선거까지 포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귀향 한 달에 $112.56(현재 $1,089.00) 연금(그 때는 아직 대통령 연금이 없었음) 받아 연명했다 회고록을 써 팔아 겨우 살았다. 19721226일 아침 7:50 88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필자는 52년을 미국에서 살았지만 트루만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미국 전역에 동상 하나 없어 동상이라도 하나 건설하는 것이 우리 재미 한국 교회의 도리라 생각했다. 동상 건립 위원회를 구성을 시도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캔사스시에 있는 트루만 대통령 박물관 측에서 대통령 동상 건립 위원회를 조직 내년 봄 쯤 Capital Rotunda에 트루만 동상 건립 추진 중임을 알게 되었다. 동상은 거의 완성 중이나 의회의 승인을 얻는 것이 남아있다. 다행이라 생각되어 재미 한국인의 동상 건립은 접기로 했다. 지금도 동상 건립은 진행중이다. 혹 헌금하고자 하면 연락하면 된다. Harry Back to Washington Campaign 혹은 Truman Statue Campaign Donation을 인터넷에서 찾아 회원으로 등록하고 후원금을 보낼 수 있다. 우리 한인들이 첫 동상 건립에 많은 동참 바란다. 가능하면 한국 정부도 이에 동참 조금이나마 국민들 마음을 표현했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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