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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벧엘의하나님(2020년 12월 6일 주일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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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명길목사
댓글 0건 조회 3,033회 작성일 21-03-17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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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벧엘의  하나님

 

2020126일 주일 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창세기 35:1-8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니라(7).


야곱의 인생은 벧엘과 관계가 깊습니다. 사실 그의 인생은 벧엘에서 시작하고 벧엘에서 다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벧엘은 그의 인생의 시작이며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가 형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는 도중 루스라는 곳에서 노숙할 때에 꿈에 나타나 바벨탑 모양의 탑이 나타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고 그 위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아식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길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리도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28:13-15), 그래서 야곱은 베고 잤던 돌에 기름을 붓고 벧엘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지만 한 가지 더 붙여서 하늘의 문이라는 뜻을 더했습니다. 집이요 하늘로 가는 문이 벧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꿈에서 보여주신 것은 장차 메시야 곧 야곱의 허리에서 나올 메시아(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탑 메시아)를 통해서 세상과 소통을 시작하실 것이며 인간이 하나님이 보내신 탑 메시아가 하늘로 인도하는 유일한 문이고 하나님의 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주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유한한 피조물이 스스로 하나님과 소통 불가능함으로 소통은 인간 영역이 아닌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인간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 은혜에 속한 것임을 분명히 교훈하며 야곱 스스로가 이 교훈을 따라 장차 하나님의 은혜로 벧엘의 하나님과 함께 살 그 날을 계시하시는 꿈이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중간 세겜 평야지대에서 자리를 잡고 고향에 왔지만 벧엘을 잊어버리고 살기 좋은 평야지역에서 살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그가 서약하고 시작한 삶을 다시 시작 할 때에 벧엘에 불러 인생을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1. 벧엘로 올라가라

야곱은 형 에서가 몹시 두려워 엄청난 인생 문제를 해결하고자 잔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두려움을 쫓아날 수 없었습니다.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하며 이스라엘이 된 후 에서를 만났는데 형 에서는 복수하러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막바지에서 고민하던 야곱은 강한 자기와의 싸움에서 하나님께 항복하고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가서 평범한 삶을 살며 11명의 아들과 딸 하나 네 부인과 함께 행복하게 고향 땅 근처 평야지역에서 양치며 농사짓고 살려고 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대개 특별한 사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없으면 이렇게 살고자 합니다.

그가 가나안 땅에 돌아와 살기로 작정한 땅은 벧엘이 아니었습니다. 벧엘은 산 위에 있는 동네입니다. 세겜그리심산에발산이 마주하는 비교적 살기가 좋은 지역입니다. 평야가 가까운 곳이며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야 여인이 나오는 동네입니다.

아마도 야곱은 형을 피해 망명생활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먹고 사는 문제에 힘쓰다 보니 하나님의 약속 따위는 잊어버린 듯합니다. 그는 벧엘에서의 꿈을 잊어서는 안되는 꿈이었습니다. 너무나 강력한 하나님의 만남이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절실한 것이어서 야곱이 쉽게 잊어서는 안 되는 꿈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꿈에 반응하는 약속도 야곱은 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28:22). 그런데 그는 벧엘을 지나 더 남쪽 세겜 땅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4장에 보면 외동딸 디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집밖에 나갔는데 히위족속 하몰의 아들들이 그를 강간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의분이 났습니다. 그런데 하몰의 아들 하나가 그를 연연하게 되어 아버지 야곱에게 그 딸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때 세겜 왕 하몰이 그 딸을 아들에게 주면 그 곳에서 거주할 땅을 매매하게 하고 자기들과 함께 잘살게 해 줄 테니 그렇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속으로 분이 난 형제들은 그렇게 하자고 약속하게 했습니다. 그들에게 할례를 요청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할례를 받아야 하는데 자기 딸과 결혼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 걸었습니다. 남자들은 다 할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할례는 태어난 지 8일 만에 하는 것입니다. 어려서 아프지만 인식하지 못합니다. 어른은 적어도 일주일 이상 거동이 불편하게 됩니다. 이점을 노린 것입니다. 인간적 야심을 목적으로 거룩한 성례를 이용한 것입니다. 세겜 성안에 있는 모든 히위 족속들이 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3일 만에 시므온과 레위가 성안에 들어가 모든 남자들을 다 살육했습니다. 그리고 디나를 데려왔습니다. 세겜 성의 모든 양과 소와 나귀와 모든 재물을 빼앗았고 그들 아내들을 사로잡았다고 했습니다.

이를 안 야곱은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왜냐면 야곱이 가진 것은 양떼들뿐이며 군인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적을 만들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누가 적은 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에 옳으니이까(24:30-31). 야곱의 아들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죄악을 잘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또 두려움에 빠쳤습니다. 살기 좋아 선택한 곳이 두려움의 장소로 변해버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낮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1).

벧엘로 올라가라 하신 하나님은 야곱에게 너무나 중요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첫째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꿈을 잠시 망각하고 편한 곳에서 안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안주가 아니라 적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편한 곳보다는 약속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편한 곳을 찾습니다. 사명과 약속보다는 편한 곳을 선택합니다. 예수 믿고 장로 권사가 되었어도 편한 곳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은 가능하면 사명을 찾아 처음 믿음 처음 언약을 기억하고 언약을 따라 사명을 따라 살면 그에게 더 큰 축복을 줍니다. 편하게 사는 것이 신앙의 삶이 아닙니다. 사명 따라 사는 것이 좀 복잡할지 모르지만 더 풍요한 진짜 복이 됩니다.

둘째 이름만 바꾼다고 삶이 변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삶을 바꾸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환도뼈를 치시고 야곱이스라엘로 바꾸어주었습니다.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이 작은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름만 바꾸고 행동이 없으면 요사이 미국에서 유행하는 Rino(Republicans in Nam Only)가 되고 맙니다. 그는 세겜에서 적당히 세상과 짝하며 살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면 그의 결단 후 보인 모습에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중생했다고 그 날로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중생할 때 목적과 방향을 바꾸어주시지 근본 성격이나 전체를 하루 아침에 바꾸어주지는 않으십니다. 물론 강풍이 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성령께서는 강제하지 아니하고 깨닫고 자신이 고치기를 더 선호하십니다. 성령님은 내 재를 목석으로 안 봅니다.

우리는 성장해야 하고 날마다 성화되는 과정에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중생했다고 자랑할 필요가 없는 아직도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중생했으면 중생한 성도답게 하나하나 버릴 것은 버리고 개선할 것은 개선하고 죽을 때까지 날마다 바꾸어져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이며 천국에 가는 길입니다. 천로역정이란 말입니다.

셋째 하나님께 드린 약속은 지키는 자체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 서약한 것은 해가 될지라도 지키라고 권하십니다. 하나님께 서약했으면 지켜야 됩니다. 안 지키는 그 가체가 해를 자초합니다. 디나 사건이 교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 하실 때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31:13) 그런데도 야곱은 오자 마자 벧엘로 가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머물고자 하다가 가족의 변을 당한 것입니다. 민수기에서 말합니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30:2) 시편에도 말씀합니다.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라며...”(시편 15:4).

하나님은 우리의 서원을 들으시고 그것을 지키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 한 약속은 해가되어도 지키는 것이 도리입니다.

2. 모든 우상을 버리는 야곱

세겜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올라가기로 결심한 야곱은 자신과 가족에게 이렇게 준비하라고 명령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35:4-5).

야곱이 벧엘로 올라갈 때 보복할 줄 알았던 이방 족속들이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막아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약속을 까먹었고 편한 곳에서 살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아내들이 신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포용주의요 허용주의입니다. 신앙 생활은 용서는 있어도 허용주의는 없습니다. 죄는 지적하고 회개하고 용서받아야 하지 죄를 인정하거나 죄를 그대로 두는 포용주의는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결국 결단을 하고 벧엘로 올라갈 때 야곱은 가족들에게 말했습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7). 그 가족이 비로소 자기들 손에 있는 모든 신상들을 남편에게 주고 귀고리까지 주었습니다. 왜 귀고리를 주었는지는 모릅니다. 하여간 자기들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한 장식품까지 모두를 주었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상수리나무 밑에 묻었다고 했습니다. 후에 다시 찾았는지는 모릅니다만 버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올라가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은 버리고 가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같이 섬길 수 없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진리의 하나님은 자기만을 섬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진리이기 때문에 단 한분이시며 미신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바른 신앙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부간과 하나님과 우리간의 관계는 모두 배타적 관계입니다. 그 사이에 다른 것이 끼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결단을 망설이면 안 됩니다. 결단은 신속하고 과감해야 합니다. 결단을 머뭇거리면 여러 가지로 손해를 자초합니다. 그래서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합니다. 한 몽고 선교사는 책을 썼습니다.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려놓을 것을 쥐고 있으면 잠시 편안할지 모르지만 더 큰 것을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원숭이 잡는 법을 말했습니다. 원숭이를 잡는 법은 손이 들어가면 빠져 나올 수 없는 목이 좁은 항아리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것을 집어넣어 길목에 두면 된다 합니다. 원숭이가 와서 손을 넣어 그것을 잡고 꺼내려 할 때 놓지 않기 때문에 잡혀 죽는다는 것입니다. 놓으면 되는데 놓지 않기 때문에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되는 가장 중요한 출발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 예수님의 제자들은 인류의 스승이 되어 사도로서 추앙을 받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인류를 구원하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3. 엘벧엘의 하나님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고 그곳 이름을 엘벧엘이라 했습니다. 이미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라는 뜻으로 야곱이 지었고 그 곳에 나타나신 하나님과 서원까지 해서 그가 돌아오면 그 기둥으로 하나님의 집을 짖겠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잊고 있었을 때 그를 생각나게 하시고 그를 인도하여 자기가 한 서원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변화를 주시기도 하지만 변화를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지금은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내 안에 내주하시면서 엘벧엘의 하나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엘벧엘의 하나님은 친히 약속을 이루시며 우리의 서원까지도 이루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서원도 내 힘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기억하고 순종하려고 하면 됩니다. 해가 되더라도 하나님은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서원하고 죽어도 내 힘으로 이룬다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의지하고 서원을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것이 서원을 이루는 신자의 바른 자세입니다.

둘째로 엘벧엘의 하나님은 결단을 복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은 이스라엘로 변했지만 자기 성화에 철저하지 못하고 이방신을 허용하는 그런 신앙을 가졌습니다. 가족이고 자기 아내들이니 그들이 하는 것을 간섭하지 말자는 자세였을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자식도 자기 뜻대로 자기가 선택하게게 하는 것이 좋다 해서 신앙을 가르치지 않고 아무렇게나 살게 하다가 불신자 되게 합니다.

때로 우리도 저들은 저들의 생각이 있으니 그렇게 철저하게 하는 것은 부모가 잘못하는 것이라는 태도를 가집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아이들을 간섭하지 말자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입니다.

아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부모의 뜻대로 자식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무리요 성격이 잘못되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특별히 자녀들에게 Nagging 하는 것은 정말 나쁩니다. 그러나 장성해서 자기 뜻을 꺾을 수 없는 나이 되기 전에 아이들을 이해시키며 우상을 버리게 교육하는 것은 지나친 간섭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래서 어려서 교육이 중요한 것입니다. 크면 고칠 수도 없고 고치는 것이 무리입니다. 크면 자신이 고치도록 교회에서 합리적으로 교육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려서 지나친 허용주의는 아이를 잘못 가게 합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참된 교육이 필요합니다. 너무 자연적으로 놔두라고 불란서 자연주의 교육 창시자 루소는 부르짖었지만 인간은 죄인이며 루소 자신의 삶이 본이 되지 못한 것을 잘 압니다. 자연주의 교육을 따르는 것은 부모의 교육 포기입니다. 무리하며 강제하는 것도 문제지만 죄 지어도 안본 척 하는 자연주의는 더 큰 교육 문제를 만듭니다.

셋째 엘벧엘의 하나님은 정결한 헌신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야곱이 벧엘에 올라갈 때 옷을 갈아입고 우상과 장식품을 버리고 올라갔습니다. 교회 갈 때 단장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겸손하게 나아가 예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 갈 때 온갖 사치품을 달고 자랑하는 마음으로 가서 교인들에게 돈 자랑하는 아줌마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무시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제네바 교회에 문을 만들어 당시 사치품으로 둘레가 아주 큰 통치마를 입고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제네바에 가면 지금도 그 문을 볼 수 있습니다. 좀 지나쳤다는 비판이 많지만 칼빈의 본 마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참석하는 사람들을 인식 돈 자랑을 하려는 사치하는 마음을 버리고 예배하라는 교훈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피조물로서 최대 의무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장 엄숙하면서도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평안과 행복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만남의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진정과 신령의 예배는 우리 마음을 온전히 헌신하고 진심으로 그리고 진리인 성경을 따라서 온 몸을 불태워 드리는 현신적이며 영적인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원어로 보면 함축적인 용어입니다. 진리와 성령으로 드리라는 뜻도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드려야 합니다. 칼빈은 성경에서 말씀하지 않는 방법으로 예배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것을 규제 원리(Regulative Principle)라고 했습니다. 칼빈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마틴 루터성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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