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번제로 드리라 (2020년 9월 27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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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번제로 드리라
2020년 9월 27일 주일 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창세기 21:1-1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
하나님은 25년 만에 이삭을 사라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자식 사랑하는 것은 본능적입니다. 내 몸에서 난 자식은 천금보다 귀하고 사실은 부모들의 마음은 자식에게는 모든 것을 다 주고 싶고 위험에 처할 때는 부모가 자식을 대신해서 죽기까지 할 수 있는 사랑이 있습니다. 내가 대신 죽겠다는 것이 대부분의 부모들의 심정입니다. 자식에게서 돈을 조금 받았는데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부모 마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삭을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 해도 됩니다. 사람을 번제로 드려야 하는 어려운 일을 말할 때는 그냥 드라이하게 말해야 덜 아픕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내외가 얼마나 이삭을 사랑하는지 아셨습니다. 독자라는 말도 하십니다. 이삭이라는 이름까지 댑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사랑하고 늙어서 난 독자 하나밖에 없어서 엄마 사라의 사랑을 독차지 한 독자인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치라고 합니다. 25년이나 훈련을 통해서 주신 아들을 바치라 합니다. 그냥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주신 선물입니다. 아니 약속의 씨입니다. 그로부터 자손을 많이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죽이라고 합니다. 죽으면 끝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엄청난 요구를 하셨을까요?
그 때 이방 종교는 자식을 바치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참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을 제물로 바친 일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만드셔서 그 인간을 제물로 받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에게 이런 혹독한 명령을 했을까요? 자식을 바치라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1. 하나님은 자식보다 더 귀한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 할 때 수식어를 달고 말씀하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내외가 이삭을 사랑하는 것을 너무 잘 아셨습니다. 나중에 그를 인정하실 때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소중한 아들이었는가를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아들을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본능을 잘 아십니다. 우리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절대로 필요합니다. 자식 사랑은 어쩌면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할 때 부모로서 기쁨이 옵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자식 사랑을 하다 보면 하나님 사랑이 다음으로 올 수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고 자식은 내 속에서 나왔기 때문이며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도리이며 자식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최고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물의 주제이시며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며 모든 생명의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선물보다도 더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대우를 받고 싶고 그렇게 인정받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분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주신 분도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정하셨고 선택하셨고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엄청난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요구를 하신 것은 정말 이삭을 제물로 죽이기를 원하신 것이 아님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시험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높이고 명령을 순종하는가 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자식보다 더 사랑하고 순종하려고 하는 순종이 필요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삶에 나타나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는 줄 압니다. 집에 돌아오실 때 가방에서 꼭 무엇을 꺼내 들고 줍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버지를 기다랍니다. 아버지가 들어옵니다. 그러면 아빠하고 달려듭니다. 그런데 아빠를 안는 것이 아니라 가방을 안습니다. 아버지보다는 가방이 더 반갑습니다. 그 안에 무엇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은 아빠가 아니라 사가지고 오는 선물이고 그것이 들어있는 가방이 아빠보다 더 반갑고 관심이 가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왜 하나님은 자식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까? 자식이 더 사랑스러운데 하나님을 왜 더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까? 가방보다 아버지가 더 사랑스러워야 하는데 가방이 먼저입니까? 하나님보다 축복이 먼저이고 하나님보다 주신 선물이 먼저입니까? 아버지가 아버지인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면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사랑합니까? 그런데 자식을 내 방식으로 사랑하면 자식을 잘 못기를 수 있습니다. 자식에게 잘못된 교육을 시킬 수 있습니다. 자식 사랑 때문에 신앙까지 버릴 수도 있습니다. 자식을 하나님보다 내 마음대로 기르려다 그만 교회보다 세상대로 교육시킬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의 4,50대가 참 문제입니다. 지금 한국 공무원이 표류되어 북한에서 사살될 때 문제인은 종전 선언하자고 유엔 연설했습니다. 대통령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부에서 월북했을 것이라고 거짓말을 돌리고 김정은이 보냈다는 친서가 거짓이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4,50 대는 지금도 문제인을 지지해서 한국을 망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가 미국 온지 얼마 안 되어 전주 중부교회에 갔습니다. 본 교회 설교는 못하고 학생들에게 설교하라 해서 중 고등부에 갔습니다. 그런데 아주 숫자가 적었습니다. 아주 큰 교회인데 왜 이리 학생이 적냐고 하니까 과외하느라 주일 예배 참석을 안 시킨다는 것입니다. 교회 장로님 안수 집사님 권사들이 아이들 과외 보내느라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런 풍토에서 대학에 가니 대학에서는 주사파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을 공산주의로 물들이기 시작해서 이들이 대학에서 모두 좌파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4,50대가 그랬습니다. 이것이 한국인의 습성입니다. 여기서도 그럽니다. 과외가 예배보다 소중하고 믿음보다 소중합니다. 아이 과외시켜 대학에 보내면 그들의 텅 빈 머리에 주사파 사상이 점령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지금 한국의 중진들이 되었을 때 한국은 이런 대통령을 지지하고 지금도 40% 지지층이 도무지 변함이 없습니다. 누가 저보고 꼰대라고 하던데 이들이 정말 나라 망치는 꼰대입니다. 세상에 낡은 사상, 묵은 막시즘에 빠져 대가리가 깨져도 문제인이란 말을 줄여 “대깨문”이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 한 것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할 때 자식도 더 사랑할 수 있고 자식을 보다 말씀에 의존해서 가르칠 수 있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부모까지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하나님께 최선을 다할 때 부모님도, 자식도, 남편과 아내도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주신이도 하나님, 지키시는 이도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어서 나를 먼저 사랑하라고 하셨겠습니까?
또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입니다. 후에 하나님은 제사 제도를 만들어 하나님께 예배할 때 이렇게 드리라고 합니다. 내 대신 짐승을 죽여서 드리도록 하시고 그래야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내 대신 짐승을 죽여어서 내 생명을 대신 드리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로 예배할 때 자식을 바치는 마음, 아니 내 생명을 드리는 마음으로 드리라고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 짐승을 준비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음 주 설명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 때마다 마음속에서 잊어버리지 말 것은 자식을 죽이려고 제단 위에 올려 놓은 아들을 죽이려 하는 그 찢어지는 마음으로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자식을 죽이는 부모의 아픈 마음으로 죄 없는 짐승을 죽이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만 간단히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저 죄 없는 짐승이 이삭이 아닌가? 자식에게 칼을 들고 죽이려한 부모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는가? 하나님은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하고 거룩하신 절대적인 분이 아닌가? 하나님은 자식보다 더 소중한 분이고 아니 내 생명보다 소중한 분이고 하나님을 이렇게 귀하고 거룩하게 대우할 때 아니 내 생명을 드리는 헌신으로 사랑할 때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을 확신하면서 내가 희생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물이고 그것이 예물이며 지금 우리가 드리는 헌물인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헌신이지 내가 기분 좋아라고 무당한테 한풀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 예배 받으시기 합당한 분입니다. 하나님을 첫째로 모실 때 모든 것이 순리를 찾고 세상이 제대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바치라고 시험해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를 시행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자식은 죽지 않았습니다.
2. 믿음의 능력은 생명 저당 때 나타납니다.
둘째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자기 생명을 사랑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생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자기 건강을 챙깁니다. 왜냐면 내 생명은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자기 생명을 지키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본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심지어 고통을 이기며 내일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생명에 대한 애착 때문에 사는 보람을 찾고 생명을 유지해야 할 강력한 이유를 요구합니다. 심지어 내 생명과 같은 자식을 위해서라도 고생을 참고자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내 생명이 존재할 때 있어지는 일입니다. 이 생명이 끝나면 이 세상의 것은 아무 것도 소용없고 허무한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버는 것도 먹고 생명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돈을 모아두는 것도 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함이고 건강을 챙기는 것도 내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내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고 지으신 분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 생명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목적을 두시고 부모를 통해서 나를 지었다는 사실입니다. 내 생명이 그냥 저절로 태어난 것이 아니리 하나님께서 목적을 두시고 지으시고 나의 계획을 세우시고 지은 것이며 내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것이기 때문에 생명은 고귀하고 값진 것이며 내가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지상에서 고생스러운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살 이유가 없으면 많은 사람들이 자살합니다. 지금 한국에는 코로나로 죽는 숫자가 아니라 자실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별로 남의 죽는 일은 관심이 없습니다. 남이 죽는 것보다 내 감기가 더 관심가고 내가 코로나 안 걸리는 것이 신경 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잘 압니다. 하나님은 나를 지으셨고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구원받게 하셨고 나를 향한 희망을 가지셨고 r가 사는 날 동안 내 생명의 뜻을 이루기를 소원하시며 내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계획하시고 사랑하셔서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태어나고 내가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다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사실을 깨닫고 내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이런 하나님께 내 생명을 바치려고 결단할 때 주신 분에게 내 생명까지 아끼지 아니하고 그 분에게 순종하며 내게 주신 이상과 의미를 살리려고 결단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그 때에 하나님은 준비한 것을 보여주시고 그 능력을 발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언약을 채결하셨습니다. 이미 15장에서 하나님과 아브람이 언약하는 장면에서 하나님이 자기 생명을 저당하시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고 죽으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자기 생명을 저당하시는 것을 실제적으로 실현하신 것은 생명을 저당할 때 그 언약이 살아 실행되는 것처럼 생명을 저당할 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능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이 그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앞으로 재림하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실하게 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죽음이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라는 사상이 굳게 박힌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태 16:24-25).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실 예수님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은 모든 인간의 노력이 헛되게 만든다는 신념에 차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 후에는 천당과 지옥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죽어주시려고 십자가 지시는 것인데 아무 것도 모르고 인생은 죽음으로 끝난다고 믿는 제자들에게 그 생명을 나와 복음을 위하여 바치려고 결심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고통과 십자가 형틀에서의 고통을 생각할 때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과 아픔을 결단하고 죽고자 결심했을 때 인류를 구속하는 어린 양의 제물로 아니 하나님의 새 언약의 희생 양으로 죽음을 결단할 때 부활의 확신이 실제적이 된 것입니다. 죽음을 저당할 수 있을 때 부활의 확신과 함께 아니 다음 세대의 영광과 함께 우리가 두려워하든 모든 것을 이기고 마음에 평화를 누리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능력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죽을 각오를 할 때 나타납니다.
에스더는 페르샤 왕 아하수에로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 때에 하만이란 자가 나타나 왕에게 에스더가 이스라엘 민족인 것을 숨기고 왕비가 된 것을 알고 이들을 멸족시키기 위하여 계획을 실현하려고 할 때 이 사실을 에스더에게 알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에스더는 자기를 길러준 모르드게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 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스더 4:16). 왕이 부르지 않을 때 왕후 까지도 왕 앞에 가는 것은 폐위된 정 황후 와스디 때문에 정한 법이 있어서 왕후라도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엄한 규정이었습니다. 좋은 왕이기 때문에 친척이나 외척의 간섭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이 죽음을 당하게 되어 이를 어겨야 하기 때문에 생명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죽으리라” 결심하여 자기 백성을 살리고 유대인을 살려서 예수 그리스도 때까지 유대인이 존속될 수 있게 했습니다. 위대한 결단은 생명을 저당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결단하면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에스더가 죽음을 결심할 때 벌써 하나님은 유대인을 살리실 결심을 보시고 민족 구원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엄청난 재난을 막고 엄청난 왕의 은혜를 받게 하고 민족을 구원하는 일이 간단하게 처리된 것입니다. 지금도 한국인이 자기 생명을 결단하면 힘이 모아집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하면서 생명은 하나님이 주셨으니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반역하는 것이라는 손00호 박사의 이론은 십자가 정신을 부정하는 거짓이며 비 기독교인들이 자기 생명 위해 우상을 만들어 생명지기로 삼고 자기 사랑하는 자기 몸숨 숭배자 미신 소유자임을 드러내는 교회 파괴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생명이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말씀을 통해서 배웠고 이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바쳐도 끝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확신을 가지고 자기 생명을 결단하고 저당할 때 위대한 힘을 발휘합니다.
3. 시험은 부활 신앙 가져야 합격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이라도 하나님 명령 수행을 위해 바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아들을 바치게 내버려 두지 않고 아들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수양을 준비해두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합격증을 수여하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바치려 할 때 그에게 있어야 할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에게 자손들이 하늘의 별 떼와 같을 것이며 바닷가의 모래와 같을 것임을 약속하시고 하나님이 생명을 저당하셨습니다. 목숨 걸고 이루시겠다고 한 것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아브라함이 칼을 들고 죽여도 하나님은 그의 약속은 기필코 이루실 터이나 부활시키든지 자식을 또 하나 더 주시든지 하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아끼고 존중하고 지키는 내 목숨을 앗아가는 죽음을 바울은 부활장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니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5-58). 그렇습니다. 사망을 이기는 것은 부활신앙이고 부활 신앙을 가져야 인생을 얽어매는 모든 것에서 해방될 수 있고 참 자유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부활신앙으로 자식에게 칼을 들이대고 번제로 바치려 한 아브라함의 손을 붙잡고 그에게 말씀합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다고 합격증을 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부활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 몸이 부활하는 날이 옵니다. 아니 죽어도 천국에 있다가 우리 육체가 부활하여 영원히 예수님과 같이 함께 살 것입니다. 그 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것을 확신해야 자유합니다. 죽음에 매여 살고자 졸열해지고 좁아지고 참담해지지 아니합니다. 자유하는 믿음이 생기고 생명을 잃고자 할 때 자유가 임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부활 신앙으로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結 論
오늘 아들을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은 결국 아브라함에게 부활신앙을 확인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정말 하나님이 생명 저당으로 확인하신 하나님 말씀을 믿는가? 그런 믿음 가져야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삭을 바친 그 자리는 후에 성전이 서고 그 산에서 예수님은 만민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진정한 희생 제물이 되신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이삭 대신 숫양을 준비하쎴듯 우리 모든 죄인의 희생 제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분이 죽으실 그 자리에 이삭을 바치라 하신 것입니다.
역대하 3:1에 저자는 밝힙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 3:1).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후에 이 곳에 성전이 세워져 이삭 대신 드려질 짐승을 죽여서 제사를 드리고 오실 예수님의 대속을 기다리게 하셨던 곳이며 그 곳은 이삭 대신 희생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희생하실 그 곳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삭을 바치라 하신 하나님은 그 곳에 독생자 예수를 바치는 곳이었습니다. 그 일을 지금 아브라함에게 보이시고 그에게 자식을 바치는 아버지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게 하신 곳입니다. 아들을 바치라 하신 것은 아들을 바치기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십분의 일이라도 느끼고 생명 바치신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기 위한 믿음을 보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를 이해합니까? 자식을 바쳐보지 않고 어떻게 독생자를 죽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나를 지으시고 독생자를 희생하여 믿음 주시고 나를 깨워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신 그 깊으신 뜻을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주가 나를 위해 죽었으나 나도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죽고자 하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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