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이레 (2020년 10월 4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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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이레
2020년 10월 4일 주일 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창세기 22:13-19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14).
지난주일 25년 만에 주신 아들 이삭을 내가 지시할 산에 가서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땅 지금의 예루살렘 땅에 가서 제물로 드리려고 아들을 묶어 나무 위에 놓고 죽이려 했던 사건을 생각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그것도 아버지가 자식을 어떻게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명령을 열국의 아비가 되어 세계 만민에게 복을 나누어줄 수 있는 복의 근원으로 택하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함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식을 바치려 한 아브라함에게 합격증을 선물했습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을 몰랐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한다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마지막 심판을 하십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지옥 갈 사람에게 “나는 너를 모른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지옥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식을 잡아 드리려는 아브라함을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안다고 해야 되는데 자식까지 바칠 수 있는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은 “이제야 내가 너를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정말 부족하지만 내 생명은 주님의 것입니다 하고 생각할 때 그 때 하나님은 나를 아신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한 숫양이 수풀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 대신 번제로 드렸다고 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대신 숫양이 죽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땅을 아브라함이 이름을 지었습니다. “여호와 이레”라고 했는데 이 뜻은 후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뜻이었다고 풀이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통 하나님이 우리 쓸 것을 준비하신다고 해석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 쓸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일할 때 하나님은 다 준비하여 주시고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도록 하십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선교 갈 때 아무 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것을 직접 체험해서 선교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스스로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이레라는 말을 그 뜻으로만 쓰면 안 됩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하시는데 왜 하나님이 우리 쓸 것을 산에서 준비하시겠습니까? 이 모리아 땅은 후에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이며 이 곳은 바로 다윗의 돈을 주고 성전 자리로 산 오르난의 타작마당이라고 역대 하 3:1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산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성전을 멸하고 3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산이 여호와 이레의 산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죄를 대속할 메시야 예수님을 준비하시고 그 분이 살아나 우리 부활을 준비하셨고 그 분이 세우신 성전이 있다가 바벨론에 의해 허물어지고 그 성전이 지금은 우리 각자가 성전의 전이 되어서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를 준비하여 성전 삼으셨다는 말씀입니다.
1. 대속물을 준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바치라 명령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의롭다고 여김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치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삭이 살아 자식을 낳고 그 자손이 번성해야 약속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으로 그 말씀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생명 저당까지 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죽이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아들을 죽이라고 시킨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여도 약속은 어떻게든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했다고 로마서에 사도 바울은 부활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죽여도 살려서 이루실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든 이루실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실제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을 작게 믿습니다. 하나님은 머리로는 하나님이 전능하심을 믿으니 하나님이 하시면 이루어질 줄 믿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믿지 아니합니다. 한 유명한 신학자요 설교자는 “우리가 하나님을 크게 믿으면 크신 하나님이 되시고 작게 믿으면 작은 하나님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그 만큼 믿음은 본인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바치라고 하신 것은 여호와 이레라는 말처럼 하나님께서 숫양 곧 이삭을 대신해서 죽어줄 제물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셔서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실 것을 경험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실 메시야의 대속의 죽음을 준비하신 것을 체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대신 죽을 메시야 독생자의 십자가를 준비하신 것은 하나님이니까 그냥 할 수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도 많은 고민을 하셨고 예수님도 지상에서 십자가 지시며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하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이도했습니다. 대속의 죽음은 우리에게는 쉬운 것이나 하나님에게는 그 어떤 고통보다 크신 아픔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이 육신의 옷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대신 모든 형벌을 지고 죽으실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만큼 예수님이 고통을 받고 참고 죽어야 하는 최고의 고통이며 형벌이며 십자가 형틀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람을 잔인하게 사형할 때 사지를 찢어 죽이는 육시가 있기도 했고 떼려 죽이기도 했지만 가장 잔인한 것은 십자가 위에서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장정이면 7일 정도 극심한 고통과 목마름 배고픔 속에서 신음하며 죽는 것이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 고통을 생각하면 너무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기 때문에 기도하실 때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아버지께 요청했습니다. 그 기도를 들으신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마음이 아브라함의 마음이며 믿음의 조상이요 만복의 근원이 되어야 할 아브라함이 체험하고 경험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누가 말로 표현할 수 있겠으며 자식을 바치는 심정을 누가 이해합니까?
자식이 없던 한 보스톤 미국 여인이 겨우 독자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한국 전쟁에 징집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안전을 위해 정말 있는 힘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보 한 장이 왔습니다. 아들이 전사한 것입니다.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무심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왜 하나님이 지켜주지 아니하시고 전사하게 했을까 원망스러웠습니다. 목사님이 그 집사님을 어떻게 용기를 주고 위로할지 몰랐습니다. 고민 했습니다. 그리고 심방하여 울고 있는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집사님의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한 분을 제가 압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하여 친히 십자가에 바쳐야 했습니다. 그 분만이 집사님의 독자를 잃은 슬픔을 아십니다. 그 분의 위로를 받으십시오. 그 분은 집사님의 그 아픈 마음을 아십니다.
이 때 그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했습니다. 자기 아픈 마음이 바로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은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한국의 전쟁고아들을 입양해서 자기 아들 삼이 길렀습니다. 훌륭한 아들이 더 많이 생겼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그 산에서 준비하여 죽이셨습니다. 십자가 달릴 때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습니다. 그 분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면해주시고 용서해주시며 우리가 그 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의로 여겨주시고 의인 대접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속의 제물 어린 양 예수님을 희생하여 우리를 영원히 용서해주시고 하나님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에 아들을 바치려 한 그 산에서 예수님은 죽으신 것입니다.
2. 부활을 준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칠 때 하나님은 능히 그를 살리셔서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은 것처럼 영원한 속죄양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시고 끝난 것이 아니라 이 산에서 부활시키셨습니다. 인근의 무덤에 갇혀 있다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장 부활장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와 확신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사건은 단순하게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부활은 죽은 자가 단순하게 살다 죽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부활은 이전 죽은 자들이 가끔 기적으로 살아난 그런 부활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하신 부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부활 이후에 벌어질 경천동지할 부활사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었습니다. 썩은 후에 다시 태어난 티벧 불교의 환생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 환생은 촘촘히 보면 참 믿기지 않는 신비에 쌓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추측이나 어떤 이론이 아니라 몸이 다시 사신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전서 15:20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시도록 준비하셨는데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활의 첫 열매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첫 열매란 말은 추수 때 가장 먼저 익은 곡식을 말합니다. 그것을 먼저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와 같이 첫 열매를 드리는 것은 그 다음에 익어가는 모든 곡식도 다 하나님께 드리는 격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는 계속해서 부활할 곡식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는 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로 우리 몸도 부활할 확실한 첫 열매 증거로 부활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부활은 우리의 활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기 때문에 우리들의 부활도 확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후 그 몸 그대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편에 앉았다는 말은 세상 왕들이 세자들을 우편에 앉히고 세상 정차를 가르치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몸을 입으신 그대로 오신다고 승천 시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 재림 시 우리 몸도 다 부활해서 예수님의 몸이 영원히 사는 것처럼 우리 몸도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부활된 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하나님은 벌써 아브라함이 자식을 바칠 때 그 산에서 준비하시고 아브라함은 그것을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름이 여호와 이레입니다. 그 산에서 준비하리라. 준비한 그것을 실현하셨고 준비한 그대로 오실 것이며 준비한 그대로 우리도 부활하여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날입니다. 그 부활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역사로 준비하시고 역사로 성취하시고 역사로 증거하셔서 우리로 재림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마라나타 하고 인사한 것입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우리의 소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활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고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부활신앙을 주시려고 시험하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하셨음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3. 성전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리아 땅 나중 예루살렘 지금 이삭을 바치려 한 그 곳을 성전을 짓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고 자기들의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을 만나도록 성전을 이 산에서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 자리를 다윗에게 보여준 장면은 사무엘 하 맨 마지막 장 24장에 자세하게 기록이 나옵니다. 그가 성전 자리를 미리 알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자리인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이 모리아 산을 정하게 된 기록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다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년 인구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인구 조사는 세금을 거두려 할 때 합니다. 지금 미국이나 중국은 10년마다 인구 조사를 합니다. 모든 정책을 수정합니다. 다윗도 세금과 전쟁을 더 해서 영토를 더 크게 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다윗은 참 하나님이 마음에 드는 일생을 살았지만 마지막 또 하나의 흠은 인구조사였습니다. 신하들도 반대했지만 임금의 뜻이 강하므로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싸울만한 장정이 80만 명이었습니다. 지금 한국 군대보다 많습니다. 유다 족속만 50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징벌하실 것을 선지자 갓을 통해 말씀합니다.
“내가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를 위하여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아뢰어 이르되 왕의 땅에 칠년 기근이 일을 것이니이까 혹은 왕이 왕의 원수에 쫒겨 석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은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무엇을 대답하게 하소서” (삼하 24:13). 이렇게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3일간 역병이 번지는 벌을 택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죽은 자가 70,000 명이었습니다. 코로나보다 훨씬 더 무서운 전염병이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다윗의 가정을 치려 예루살렘에 나타나 칼을 들었습니다. 예루살렘 거민을 치려는 것을 말려 자기와 가족을 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선견자 갓이 다시 말합니다. 아라우나 타작 마당으로 가서 제단을 쌓기로 하고 아라우나 타작 마당으로 갔습니다. 그는 타작 마당을 사서 아라우나는 땅 뿐만 아니라 제물에 필요한 모든 것을 드리겠다고 했지만 다윗은 값을 주고 샀습니다. 그 곳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역대 하 3:1을 보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자리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나무를 쌓고 이삭을 바치려 한 자리이며 그 곳이 바로 짐승을 잡아 죽이던 자리이며 그 곳이 바로 성전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죽을 죽음을 소나 양에게 덮어씌우고 대신 죽여 제사를 드린 성전 자리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 망할 때 곧 성전이 무너지고 불탈 때까지 그 곳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성전은 사실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성막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드신 근본 뜻은 그들과 함께 거주하기 위함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셔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거주지 곧 Tabernacle을 만들도록 지시하셨고 그 곳에서 제사를 드려 죄를 용서 받고 말씀을 받는 그런 자리였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집이었고 이 성막이 그대로 성전이 되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고정되어 제사를 드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1년에 3번 이상 어느 곳에 살든지 성전에 가서 죄사함을 받고 특히 유월절, 칠칠절, 장막절 3번은 꼭 성전 제사에 참여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 제사는 하나님이 고기를 좋아하셔서 고기를 잡아 드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대신 짐승에게 전가시켜 짐승이 나 대신 죽음으로 내가 죽은 자이지만 산자로 살면서 죄 용서 받고 하나님을 만나 그 말씀대로 사는 자가 되는 대속의 뜻이 예배입니다. 우리 예배도 하나님은 세밀하게 규제하셨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그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참회의 기도를 드리고 용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구약부터 죄 용서가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예배에만 열중했습니다. 사실상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레위 족속을 통해 잘 배우고 삶에 실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배만 드리게 되니 자연적으로 삶은 말씀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교육 부재였습니다. 예배만 강조하면 교육이 약화됩니다. 그것이 오늘 교회에도 그렇게 나타납니다. 교회는 기독교 교육에 앞장 서야 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 자녀들을 길러야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 가난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타락했습니다. 결국 바벨론 왕국을 통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하나님의 성전이 헐리게 놓아두셨습니다.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 살면서 발견한 것이 말씀의 중요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에서 성경의 중요성을 깨닫고 베끼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이 없어져서 회당을 만들어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다른 형태로 드렸습니다. 그 예배가 오늘 우리들이 본 받아 드리는 교회 예배가 된 것입니다. 순서도 비슷하고 찬송과 기도와 랍비들의 설교가 다 회당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랍비가 훌륭한 회당은 번성하고 이 회당 교육이 오늘의 유대인들을 만들어 세계 지성이 되게 하고 가장 돈 많고 가장 똑똑하고 가장 영향을 끼친 민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쉐마 교육을 이 때 발견한 것입니다.
2차 성전도 하나님은 무너지게 했습니다. 알렉산더 대 제국이 들어서서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림으로 세워진 성전이 더럽혀지고 그 성전은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헤롯 왕이 다시 성전을 짓기 시작해서 그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모리아 산에서 죽으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과 부활을 성전에 빗대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복음에 보면 성전을 깨끗케 하신 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노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사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 2:19-21).
성전은 예수님 자신이라 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성육신 한 것을 요한복음 1:14에서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거한다는 말이 영어로는 Tabernacled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막화했다. 성막은 예수님의 몸이며 후에 성전은 예수님의 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준비하시고 그 몸을 드리는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성전을 헐고 다시 짓는 것으로 말씀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막 14:58). 예수님은 성전을 헌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성전을 감탄하고 자랑스럽게 여길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멸망을 받을 때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을 예언했고 주후 70년 이 사건으로 성전은 지금 모습으로 무너진 것입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전을 그렇게 헐어버렸습니까?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성전 미래의 성전을 이루기 위함이셨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말합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엡 2:21). 그렇습니다. 성전은 믿는 우리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전인 우리 몸이 성전이고 성전인 사람들이 모인 교회, 건물이 아니고 믿는 사람들 집단이 성전입니다. 그래서 건물이 이어지듯 사람들이 서로 연결하여 하나 되는 그 것이 성전인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 곳에 성려님이 계시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전이고 사람이 성전이며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모리아 산에서 바로 우리들을 준비하시고 우리 안에서 성령님이 내주하시도록 준비하시고 우리가 성전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건물이 더 이상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사람들이 모인 신앙 공동체가 성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택한 백성들 안에 내주하심으로 성전되게 준비하신 것입니다. 바로 성령 충만한 우리를 준비하셔서 성전되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모리아 산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한 성전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여 주심 오실 준비를 하도록 걸어 다니는 성전을 마련하셨습니다.
結 論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 산에서 하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해 대속 제물인 예수님을 준비하셨고 예수님을 부활시켜 첫 열매가 됨으로 믿는 자들의 부활을 준비하셨고 택한 자들이 예수 믿고 깨끗함을 받을 때 성령님을 우리 안에 살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도록 명령하시고 교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는 지상에서 새 예루살렘 민족으로 살아야 하며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행복을 누리다가 주님을 맞이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을 포기할 수 없고 열심히 신앙생활하여 미국의 주류에 들어가 함께 세계 역사를 바로 세우고 변화시켜 주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이고 살아가야 할 목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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