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장지를 산 아브라함 (2020년 10월 11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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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장지를 산 아브라함
2020년 10월 11일 주일 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창세기 23:1-20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19-20)
지난 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산에서 아브라함에 체험한 놀라운 여호와 이레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께서 지정한 산에 준비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쓸 것을 준비하시지만 그런 정도의 말이 아니라 세상을 바꿀만한 세계적 대 사건 하나님에 메시야로 오셔서 하나님이 십자가 지고 죽으심으로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실 죽음을 당하실 대속의 십자가를 준비하셨고 하나님은 또한 그로 인해 구원받은 사람들이 부활하여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부활 생명을 준비하셨고 하나님은 그 곳에 성전을 준비하셔서 예수님 오실 때까지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 용서를 베풀고 백성들과 함께 거주할 준비를 하셨으며 후에 성전은 무너졌고 진짜 성전인 우리 신자들 내면에 내주하시면서 성령과 함께 사는 믿음의 자녀들을 준비하셔서 바로 오늘 우리가 준비된 사람으로 살도록 하신 놀라운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대상은 바로 우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제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아마 모리아 산에서 있었던 엄청난 사건도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사라가 이제 127세가 되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90세에 아들을 낳았으니 이삭의 나이가 몇 살일까요? 37세가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이삭이 장가를 가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 가만히 생각하며 짐작해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모리아 산으로 갈 때 부인과 상의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저는 안 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아버지보다는 사라가 믿음이 약했고 어머니 사랑이 아버지 사랑보다 강할 수가 있기 때문에 자식을 준다고 할 때 아브라함은 믿었지만 사라는 웃었거든요. 아마도 안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모르겠어요. 천국 가면 물어봅시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말을 하고 갔는지 안했는지.
하여간 세월이 2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 때까지 이삭은 어머니 사랑을 받으며 장가갈 생각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24:67절에 보면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어머니 장막에서 어머니를 잃고 상심했는데 25:19-20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40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머니 세상 떠난 지 3년이나 어머니 집에서 어머니를 그리며 살았습니다. 이해가 갑니다. 그가 장가들지 아니하고 어머니 장막에서 37세까지 산 것은 아마도 그가 모리아 산에서 당한 엄청난 사건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어머니 사랑을 많이 받고 3년이나 그 집에서 홀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재혼을 해서 또 거기서 자식들을 낳았지만 이삭은 홀로 살다 장가를 간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를 장사지낼 장지를 사는 이야기가 아주 길게 써져 있습니다. 장지를 사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성경에서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글을 남긴 것은 그 만큼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아브라함은 사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그의 소유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믿을 수 없어서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자기 생명을 저당하고 뜻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자기 소유의 땅은 없었습니다. 돈은 많이 있었겠지만 땅은 장지 하나 삼을 수 있는 작은 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벨라 굴을 장지로 굳이 그냥 쓰라고 해도 은 400세겔을 주고 샀습니다. 그리고 많은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확실하게 지불하고 아브라함 소유임을 확인하고 자기 장지임을 선언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진 땅은 오직 사라의 무덤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 장지를 굳이 헤브론에 샀을까요?
1. 헤브론 요충지의 전략적 가치
당시 헤브론은 아직 이름이 헤브론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든 아브라함이 장지로 구입한 후 무덤은 가족 무덤이 되었고 지금도 헤브론에 가면 머슬림들이 그 무덤을 지키고 있어서 유대인과 머슬림들이 자기 조성이라고 서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스라엘 여행할 때 들렸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그의 부인 한명씩 같은 자리에 묻혔습니다. 정말 믿음의 조상이 묻힌 자리입니다. 그런데 헤브론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헤브론은 예루살렘에서 약 20마일 약 80리 정도 남쪽에 떨어진 곳입니다. 해발 930미터 산 위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예루살렘보다 훨씬 오래 되었던 도시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곳으로 후에 다윗에 여부스 족속을 치고 점령하여 그 곳에 성전이 서게 됨으로 지금까지 유대인의 정신적 고향이 되었지만 이 헤브론은 정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이 들어와 땅을 나눌 때 갈렙은 남쪽 산지를 달라고 했습니다. 해발 900미터면 사실 여기 교회가 있는 정도의 높이의 산지입니다. 그래서 산꼭대기에 성을 쌓으면 적의 침범을 막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갈렙은 다른 족속들이 원치 않는 척박한 산지를 택하여 그 곳에서 유다 족속들이 열심히 개척하고 살아 가장 인구가 많아지는 유다 족속이 된 것입니다. 그만큼 전략지요 전략적 가치가 있었던 지역입니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고 사울이 죽은 후 왕이 되었을 때 첫 서울이 헤브론이었습니다. 왜 헤브론이었을까요? 그 지역이 바로 갈렙이 정한 유다 족속의 땅이었고 다윗의 출생지는 베들레헴 바로 예수님이 출생한 곳이 그의 태어난 장소 고향이었습니다. 예루살렘과 헤브론 중간 지점이 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그 곳을 장지로 정하며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을 정복하고 살 때 가나안 땅의 중심을 생각하며 이 땅을 장지로 사서 자기 가족들이 묻히게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민족이 없습니다. 자기 사는 브엘세바는 여기서 또 20마일 남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 그가 하필 헤브론을 장지로 삼고 아내를 장사하고 후에 자기도 묻힐 가족 장지로 샀을까 생각하면 미래를 생각하고 자기 가족을 생각하고 특히 후에 애급에 갔다가 많은 민족이 되어 돌아올 그 때를 미리 보았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죽어 묻힐 자리야 아무렇게나 하면 되지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무덤 하나 남기는 것도 자손들을 생각하면서 아니면 내가 남긴 하나님의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정하는 것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지금 유행하고 있는 화장은 성경적이거나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고 이방 종교에서 온 것입니다. 고대에 땅이 많았지만 다른 종교의 세계관 종교관에 따라 불을 태우거나 산에 두어 새나 짐승들이 먹기 하였습니다. 특히 성경에는 아합의 부인 자식들이 죽게 되었을 때 짐승들이 시체를 먹도록 방치하는 것이 하나님의 징벌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가족장을 하기 위하여 무덤을 사서 함께 거기에 묻히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지금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 자손들과 믿음의 후손들을 생각하는 사람이면 비석 하나는 남기기 위하여 무덤에 묻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묻힐 땅에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하지 말고 세상 살면서 신앙의 조상이 되면 아마도 신앙의 자손들이 그 곳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는 나약 대학을 졸업했는데 그의 무덤이 학교 캠퍼스 안에 있어서 가끔 그 곳에 가서 비석을 읽어봅니다, 그의 비석에는 평소 그의 인생철학이었던 “Not I But Christ”가 새겨져 있습니다. 무디가 살던 곳에 가면 무디의 무덤이 있고 사람들이 무덤을 찾아 무디를 기념합니다.
우리도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자손들이 안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 교회가 잘 되면 교회 장지로 사서 함께 후손들이 와서 보든지 아니면 교회가 발전하여 선교하게 되면 그 장지가 신앙의 많은 교훈을 줄 수 있는 요충지가 될지 누가 압니까? 하여간 아브라함은 미래를 바라보고 자기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서 해야 할 위대한 역사를 생각하며 자기 장지를 그 중심에 샀을 것이라 봅니다. 그의 깊은 역사의식을 배움직합니다. 우리는 이 알버커키 땅에 최선을 다해 살고 여기 묻히게 될 때 우리를 통해서 신앙을 배우고 열정을 배우고 인생을 배우고 서로 믿음의 복을 누리고 살 그런 곳을 선택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2. 민족 신앙의 고향
다윗은 도읍지로 헤브론을 정한 것은 그 곳에 아브라함의 묘가 있었고 자기 속족인 유다 족속의 수도이며 중심지고 해발 900미터가 넘는 산이라 기후도 선선하고 좋아 도읍지로 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갈렘이 택하였고 다윗이 도읍한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모리아 산은 북쪽으로 20마일 올라가는 언덕바지였습니다. 그 곳도 산 위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마도 후손들이 마음을 둔 신앙의 고향을 생각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면 어떤 민족이든 그런 신앙의 고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평양을 신앙의 고향으로 생각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평양에 신학교가 세워지고 특히 장대재 교회에서 1907년에 일어난 성령 강림의 역사는 길이길이 한국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자리 잡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길선주 목사님이 아직 목사 안수를 받기 전 매년 있었던 부흥회 새벽 기도회 때 회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울음바다가 되고 가슴 치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 땅에 딩굴고 가슴 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바람은 전국을 강타했습니다. 그 해를 우리는 한국의 성령 강림 사건으로 기억합니다. 저도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사랑하셔서 장대재 교회에 놀라운 성령 강림을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미국을 강타한 1720년의 "대 각성(Great Awakening) 운동"이 평양에서도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 선교 역사에 볼 수 없는 놀라운 기독교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운동은 평양의 미쎤 스쿨에서 일어났습니다. 학교에서 성경 공부하는데 여학생들이 회개하며 울기 시작했고 역시 가슴 치며 회개하는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점정 함경도 황해도 서울 대구 전라도 각지에서 이런 성령 운동이 불을 붙였습니다. 일제시대 먼저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한국 기독교를 만들었습니다. 길선주 목사의 장대재 교회는 한국의 신앙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일성이 북한을 공산화한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로 장대재 교회 그 자리에 지금 김일성 동상이 섰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김일성 동상이 서 있는 것입니다. 북한을 방문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그 앞에서 절하라고 요청합니다. 목사들도 가서 절하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북한을 무엇 때문에 가는 것입니까? 지금 한국 기독교는 문제인이 통일해서 연방제가 되어 평양에 가서 장대재 교회 신앙의 고향 집에 서 있는 김일성에게 절하라는 말입니까? 그런데도 목사들이 문제인의 연방제로 가는 현 정부 모습을 보면서도 그 편을 들고 있고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목사들이 박근혜에게는 회개하라 해 놓고는 문제인은 돕고 한국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난리를 치고 있으니 지금 한국 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이겠습니까? 한국 교회는 고향을 찾아야 합니다. 김일성 동상을 허물고 그 자리에 장대재 교회를 다시 지어야 합니다. 그것이 한국 기독교인들의 숙제이고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고향을 탈환하는 것이 참된 신앙의 일이며 길입니다. 그래서 김진홍 목사님 말씀처럼 기독교로 통일해야 행복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기독교가 문제인과 동행하겠습니까? 정말 한심한 목사들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길을 찾지 못하고 공산당에 협조하는 목사들이 있다는 것은 한국 교회의 수치입니다.
3. 미래 언약의 중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를 때 그가 별 떼와 같은 자손들과 바닷가 모래와 같은 후손들을 주시겠다고 했고 그를 아브라함 모든 열국의 아비라는 이름을 주면서 그에게서 모든 나라들과 모든 왕들이 나올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에게 온 세상을 복을 받게 하는 복의 체널로 복의 근원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한갓 노인으로 살다가 인생을 마치는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도 아니었고 로마 제국을 만든 사람도 아니고 위대한 발경가도 세상을 놀라게 한 히틀러도 아니었습니다. 자식 없이 이민 가서 가나안 땅에 살라가 나이 많아 독자를 낳았고 그를 바치라는 하나님 명령을 순종하며 부인이 죽자 헤브론에 장지를 마련했고 그도 175세에 죽었습니다. 위대한 일을 해야만 꼭 열국의 아비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장지를 마련할 때 헤브론에 자기 땅을 구매하여 장사지내면서도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잊지 않고 하나님이 꼭 이루실 것을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신앙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크게 가지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키게 믿으면 크신 하나님으로 많은 것을 주시고 작게 믿으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작게 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크게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 모든 민족보다 가장 어렵고 핍박을 많이 받은 민족입니다. 히틀러는 600만을 죽였다고 합니다. 주전 586년 유다가 망한 후로 반듯한 국가를 가져보지 못한 유대인들은 세계 방방 곡곡에 흩어져 서름 받고 산 민족입니다. 디아스포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은 그 고난 속에서 세계에서 가장 노벨 상을 많이 받은 민족이 되었고 세계에서 제일 부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을 주는 음악가, 철학가, 심지어 가장 악한 영향을 준 칼 막스까지도 유대인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선민의식이었으며 온 민족이 자기들은 하나님이 선택했다는 자부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이라는 것은 예수 믿든 안 믿든 다 인정하는 빼어난 민족입니다.
그런데 뉴욕에 사는 유대인들이 고개를 설래설래 흔드는 소수 민족이 한국인입니다. 현재 한국 학생들이 미국에 사는 교포 숫자로 나누면 유대인보다 훨씬 많은 수가 하바드 예일 프린스턴에 들어갑니다. 아이 큐가 그보다 훨씬 높습니다. 열심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부지런합니다.
전에 유대인들이 하던 체소가게 생선 가게 세탁소를 지금 한국인이 물려받았습니다. 힘은 들지만 돈이 되는 장사입니다.
한국인은 유대인보다 더 일찍 일어나 시백 5시에 도매 시장에 갑니다. 유대인들이 질새라 그들보다 앞서 4시에 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한국 사람들은 3시에 가서 신선한 체소를 선점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2시에 새벽장에 갔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아예 전날 가서 자리 깔고 밤을 새우더랍니다.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어려운 체소 가게를 한국 사람이 차지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알제틴 옷가게에서도 그랬습니다. 원래 유대인이 하던 옷과 옷감 가게는 한국인이 다 차제했습니다. 머리 좋고 부지런하고 욕심도 많고 한 번 한다면 끝까지 합니다. 유대인도 고생을 많이 해서 불평을 잘 합니다. 유대인끼리 잘 싸웁니다. 고생한 민족입니다. 우리 한국인도 잘 싸웁니다. 동업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중국인은 동업을 잘 하는데 한국인은 형제끼리 동업한다면 말립니다. 싸우고 헤어지기 때문입니다. 비습합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은 승승장구합니까? 그들은 선민의식이 있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가 있고 그들은 구약 성경을 믿고 가르치는 쉐마 교육이 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을 만듭니다.
하나님은 종교 개혁으로 영국을 일부 변화시켜 영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 영국의 신앙 정신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미국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 국가로 하나님은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130년 전 미국 선교사들을 구한말, 일제 강점기에 한국으로 보내주셨습니다. 청교도 정신이 확고한 신앙의 열정을 가진 미국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한국이 가장 어려울 때 복음을 받았습니다. 불과 100여년 만에 한국은 세계에서 볼 수 없는 선교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선교지가 되었습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들도 있고 불과 100여년 만에 이렇게 기독교인들이 많은 나라는 없습니다. 일본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인도도 아닙니다. 서양 사람들이 많은 돈을 들이고 많은 선교사를 보냈지만 그 나라들은 기독교가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미국의 청4도 신앙을 받았습니다. 일제시대 6.25 동란에도 불구 교회는 성장했습니다. 지금 교인 단위별로 보면 세계에서 가장 선교사를 많이 배출하고 세계 선교를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한국은 영리하고 한국은 신앙을 받았습니다. 한국은 세계 어느 곳에도 나가 있습니다. 알젠틴 산골짜기 시골을 가도 거기 한국 사람이 있고 교회가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흩어져 살면서 한국인은 교회를 세우고 거기서 신앙생활을 뜨겁게 합니다. 한국인 몇 가정만 있으면 교회를 시작합니다. 그렇게 알버커키에도 교회가 시작된 줄 압니다. 감리교회를 자기 아파트에서 시작했던 오영 권사님께로부터 어떻게 감리교회가 시작되었는지 잘 들었습니다. 어디 가나 교회를 세웁니다. 중국인은 음식점을 세우지만 우리는 교히를 시작합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새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음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있듯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시대 새로운 세계를 변화시킬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제가 말한 그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물려 받은 준비된 민족이고 사람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은 준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한 민족이라는 자랑할 것도 없는 민족의식을 버리고 신앙의 정체성을 찾아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새 이스라엘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 정신을 가져야 우리 후손들이 이 땅에서 자신들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양인이지만 미국의 청교도 국가 정신을 물려받은 소수 민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뽑은 새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미국인도 예수 잘 믿으면 새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것이 우리 정체성입니다.
그 정신으로 자식들을 가르치고 신앙의 주인공이 되어 미국 땅에 주류 속에 함께 협력하고 이 미국 땅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자손들을 길러야 합니다. 공부만 시킨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체성이 필요합니다. 나는 미국에 온 새 이스라엘 민족으로 이 땅에 최초로 자유 민주주의 나라를 건설한 청교도들의 정신을 받아 이 땅에 기독교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열심을 내어서 주류 사회에 진출 함께 이 나라 회복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선거에는 공화당 후보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 분이 1776년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기독교 학교 부활을 위해 기독교 정신 교육을 위해 공약했기 때문입니다. 그 일에 우리는 힘을 써야 하고 새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 약속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주신 것이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結 論
우리의 인생은 짧습니가. 아무 뜻도 없이 그냥 와서 결혼하고 자식 낳고 살다가 가면 사실상 무덤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값지고 알차게 살도록 지으셨고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곳에 가든지 거기가 선교지요 거기가 내 신앙의 고향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왔다 가면 누구도 기억 안하고 자식들도 무덤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화장해서 뿌리는 것이 적절한 방법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값진 인생을 약속하시고 우리에게 값진 보배 신앙을 전파하여 이 땅을 하나님 나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아직은 소수입니다. 그러나 저는 새 이스라엘 민족 운동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시작은 미미하지만 글을 쓰고 인터넷을 하고 그래서 우리가 힘을 모아야 합니다. 가능하면 우리 교회가 중심이 되어서 이 놀라운 일을 알버커키에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여기 온 뜻이며 하나님이 선교 사역을 마친 후에 이 땅에 보낸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새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나님 뜻에 맞게 살다가 주님 부르시면 천국에서 주님 만날 생각을 날마다 하며 삽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소망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할 일이 되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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