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선택 (2020년 10월 18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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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택
2020년 10월 18일 주일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창세기 24:1-9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7).
우리 인생사에 가장 중요한 Event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매년 생일을 지키는데 태어나는 것 중요하지요. 그러나 본인은 태어나고 싶어서 난 것도 아니고 그냥 자라서 보니 내가 부모의 자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 Event는 아니었습니다. 부모가 낳아준 은혜요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은혜입니다.
죽음이 큰일입니다. 내 인생이 끝나면 나는 지상에서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상에서 있었던 모든 것은 그것으로 끝나고 내 인연도 그것으로 끝납니다. 죽으면 예수님과 나만의 관계이지 거기는 다시 자식 낳고 연애하고 지지고 볶고 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즐거움이 있지 지상에서 모든 일은 죽으면 끝나고 나의 Event도 사실은 없습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한가요? 그렇습니다. 결혼입니다. 하나님께서 평생 같이 살아야 배우자를 정해놓고 결혼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만나도 알 수 없고 전혀 엉뚱한 데서 만나 결혼하고 평생을 살아야 하며 가정을 이루어 자식 낳고 가정을 꾸려 살아야 하는 일이기에 너무나 소중한 것인데 미리 알려주지도 않고 우리보고 택하라고 하기 때문에 이 결혼만큼은 정말 잘 해야 하고 심사숙고해야 함을 알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하나님이 정해주시는 줄 알지만 선택하는 일이 하나님 뜻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인지 참 알쏭달쏭하고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되니 자식들이 결혼하겠다고 데려오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에 썩 드는 경우가 참 드뭅니다. 당사자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어렸을 때만 해도 부모들이 정해준 배우자를 천생 연분으로 알고 살았는데 점점 자식의 권리가 커지다 보니 부모가 정해주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인들이 직접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정말 지혜가 필요하고 선택하는 방법도 중요합니다. 특히 믿는 자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짝이 누구인가 그 짝을 정하는 것이 일생을 좌우하는 일이기 때문에 어렵고 복잡하고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 중대한 결혼 배우자를 정말 하나님의 뜻을 찾아 정하는 방법을 아브라함의 신앙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삭은 37세에 어머니 사라를 잃고 3년 동안 혼자 어머니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어머니를 몹시 그리워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한테 하마터면 죽을 뻔했기 때문에 주눅이 들었는지 이삭의 생애는 별로 성경도 많이 기록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그런 아들을 결혼을 통해서 위로할 뿐만 아니라 그가 종에게 말한 것처럼 사실 하나님의 약속은 외아들 이삭보다 그 며느리에 달려 있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애기 못 낳는 며느리 들이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했으면 낳을지 못 낳을지 미리 검사라도 해보지만 그럴 수도 없고 특히 신앙이 같아야 하는데 그래서 자기 집안에서 며느리 깜을 고르려 하는데 살기가 팍팍한 가나안 땅에 오려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염려가 없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어려운 난제를 그의 철저한 신앙에 의해서 선택하려고 지금 미지의 며느리 구하기를 나선 것입니다. 종을 택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엄청난 미래의 꿈을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한 며느리를 구하러 가면서 믿음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사람들은 신앙 생활하면서도 결혼 상대만은 하나님보다 자기 뜻대로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배우자 선택하는 것을 보면 정말 그의 신앙 정도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선택이 바로 신앙의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며느리 선택에서 아브라함 신앙의 어떤 면모를 배울 수 있을까요?
1. 언약의 확신
이런 결혼의 중차대한 일을 시작하면서 아브라함은 어데서 이 일을 시작했었습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그에게 준 약속, 곧 언약의 확신에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이삭을 낳을 수 없는 사라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특별히 이삭의 후손이라고 하나님은 확신을 주셨고 그 자손이 하늘의 별 때와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이 숫자가 많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놓았다고 하는 확신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한 며느리는 절대로 불임 여성이 아닐 것을 확신했습니다. 아기를 못 낳으면 이 약속은 무효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더 확실하게 믿은 두 번째 믿음은 가나안 땅에 데려오는 것입니다. 이삭을 그 곳으로 보내서 거기서 네가 알아서 선택해서 살아라. 그리고 자식 많이 낳아서 이 땅으로 오면 하나님이 네가 살 땅을 마련해 놓았을 것이라 이렇게 말하지 아니했습니다. 비록 살기는 어려워도 이 땅은 하나님께서 자기 생명을 저당하고 나와 내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한 이 가나안 땅으로 반드시 며느리가 와야 한다고 하는 확신이며 순종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이 정한 여인은 가나안 땅으로 올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종이 만일 안 온다 하면 어떻게 할까요? 질문했을 때 아브라함은 종에게 그러면 너의 맹세는 파기되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이 맹세를 깬 것이 네 책임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무효 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추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아주 구체적으로 믿었습니다. 우리 신앙이 힘이 없는 것은 신앙의 구체성이 부족한 까닭입니다.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의지해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내 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지시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구체적으로 누구라고 지적 받은 것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먼 미래에 이루실 일을 생명 담보하고 약속한 내용을 현실에 실현하는 것은 우리나 아브라함이나 별 다른 점이 없습니다. 확실한 약속을 실천하는 첫 단계를 용기로 적용한 것이 다른 점입니다.
적용 신앙은 무엇보다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모르는 내일의 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약속한 것은 용기를 가져야 실현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셔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해주셔서 우리가 그 분을 믿는 믿음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구원하시고 용서하시고 자녀 삼으시고 성령님을 내 안에 살게 하신 것 모두가 내가 받을 만 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그리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원 신앙을 세상에서 적용하는 용기를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환경과 처지가 각각 다른 곳에서 자기 구원받은 은혜를 큰마음으로 용기 가지고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그 용기를 가졌고 이삭을 바치라는 사건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양을 체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체적인 지시는 없지만 어떤 원리에서 지금 주어진 여건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실현할 수 있는가를 면밀하게 심사숙고하면 그 안에서 우리는 현실에 타당한 선택의 길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내 욕심이나 욕망이 앞서는 것은 금물입니다. 너무도 명백한 하나님의 선택이 아닌 증거가 많은데 내 고집이나 내 욕망대로 선택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지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들을 어느 정도 충족하고 내 마음이 가면 그 분이 선택한 사람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지적하는 것이 아닌 정 반대의 사람을 놓고 우리가 하나님이 정했으니 이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지 확신을 가지고 점검해야 합니다.
그럼 아브라함은 약속을 확신하고 어떻게 그 확신을 적용하고 있습니까? 그의 적용신앙과 하나님께서 바로 그가 믿음의 적용을 실현할 때 어떻게 그의 믿음에 응답했는가를 살펴봅시다.
2. 적용 신앙과 섭리
아브라함이 이삭의 부인이 될 리브가를 만나고 데려오는 장면을 보면서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의 확신과 종을 통해서 믿음의 담대한 실현을 볼 때 하나님께서 먼저 플렌을 만들어 아브라함이 따라갔는지 아브라함이 플렌을 짜고 실현할 때 하나님께서 그 플렌을 따라 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착착 계획이 맞추어지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참 이렇게 일이 되면 세상에 걱정하고 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가 먼저 계획을 세우고 누가 그 계획을 따라서 시행했을까요? 잘 모를 정도로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실현되는 하나님의 일을 봅니다.
사실상 믿음의 성취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의 이미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에 따라 인간 역사 속에 성취하시는 일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세운 계획에 하나님이 따라 한다면 하나님이 주권자가 아니지요.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이미 아브라함의 하는 일을 계획하셨고 자기 플렌에 따라 행동할 것을 아시고 예정하고 실현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하나님에 안 보인다고 느끼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섭리와 자기 행동이 어떻게 맞아 떨어지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과 나의 의지가 부딪칠 때 우리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주권이 나라는 사람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을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 이 문제는 다음 주일 리브가의 결단과 그 가정을 방문한 종들의 활동을 통해서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고 결정하고 자기 행동을 자기 인식으로 진행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인식할 수 없이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영으로서 주권자로 우리의 일을 계획하시고 실천하시고 우리를 섭리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주무시지 않고 일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일을 하게 될 때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일이고 어디까지가 내 의지인지 잘 알 수 없고 구분하기 힘듭니다. 구원에서도 이 점이 참 모호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것을 실제적으로 믿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신자는 이 점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를 찾아보겠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그의 신성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불러서 그에게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부르지 아니하면 자기에게 올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분명하게 내가 내 의지로 갔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가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내 의지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해서 내 의지가 발동하고 행동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의지를 말하면 내가 예수님께 갔고 하나님 편이서 보면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간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놓고 다른 면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이렇게 실현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권자 하나님이며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계획이 하나님이 먼저 주권행사 속에서 일어나 나의 의지를 끌어가시는 분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섭리를 의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담대한 적응 신앙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가 믿음으로 감당할 것을 아시고 리브가를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이 꿈에 안 것이 아닙니다. 그냥 믿음의 행동을 용가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경험하게 하는 사실로 나타납니다.
이런 사실은 때로는 아브라함처럼 확신이 먼저 할 때 일어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 욕망 때문에 억지로 따라 갈 때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정말 부담스러울 때도 순종하면 나타나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저는 중국에 선교사로 50대 후반부터 60대를 보냈습니다. 중국에 선교를 해야 되겠다는 막연한 꿈은 있었지만 가정 여건이나 무엇보다 선교 후원이 없는 상태에서 떠나기는 참 어려워서 망설였습니다. 돈 없이 어떻게 외국에 나가 선교하겠습니까? 선교사도 먹어야 하고 잠자야 하고 돈이 필요한데 준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처분할 재산도 없었습니다. 달랑 겨우 집 하나 사서 가족들 살아야 하기 때문에 Support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갈라졌습니다. 몰기지를 갚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 빚은 엄청나게 많아 목사가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교인이 나가고 빚을 갚을 길이 없고 그래서 땅을 처분하기로 했습니다. 다 반대했습니다.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결국 팔기로 하고 법적인 조치를 시작했습니다. 비영리 단체 소유 부동산 처리는 아주 복잡합니다. 공동의회를 했는데 생각지도 않게 제 아들이 의대 다닐 때 교회를 방문해서 그 아들이 찬성해주어 통과되었습니다. 교인이 다 나가고 몇 안 되는 사람들이 투표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중했습니다. 법적인 것을 거짓으로 조작할 수도 없고 통과 안 되면 못 파는 것입니다. 막상 투표하니 처가댁 모두가 반대했습니다. 뜻이야 좋지만 빚지고 목회하는 것은 죽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법적 과정을 거쳐 법원의 허가 하에 부동산을 처리하고 당시 있었던 모든 빚을 갚고 100만불 정도를 이웃 교회에 몰기지 갚도록 해주고 그 교회에서 선교사로 매달 선교비를 보내주도록 합의하고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돈만 가져가고 돈이 안 오는 것입니다.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미 중국으로 갔는데 돈을 안 보내주니 죽으라는 것입니다. 참 어려웠습니다. 선교도 못하고 교회는 없어졌고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집을 사도록 했습니다. 저희 사모가 오버타임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 때 중국에서 외국인이 집을 살 때 많은 돈을 몰기지로 주었습니다. 250만원 아바트를 150만원 몰기지 없어서 구했습니다. 그리고 5년을 돈이 없으니 선교는 못하고 대학교에서 중국어 공부를 했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저의 처지가 처절했습니다. 무엇 하나 되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5년 동안 집 값이 엄청나게 올라갔습니다. 무려 3배가 올랐습니다. 또한 중국 환률은 8원 70전에서 6원 20전으로 내려가서 또 돈 액수가 불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아파트를 팔아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돈을 모두 중국에 쓰고 거의 빈 손으로 귀국해서 알버커키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 집을 산 것은 전혀 중국과 관계가 없습니다. 뉴욕에 집을 사 둔 것이 또 올라서 그것으로 집을 사고 아들 놈 의대 공부할 때 지은 빚을 15만불을 갚아주고 이 집을 샀습니다. 하나님이 여기로 보내기까지 정말 부족한 것을 쓰시는 섭리를 경험하고 눈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가고가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돈 때문에 망설이는 때에 하나님은 교회를 실패하게 했습니다. 교인들이 절반 이상 교회를 떠나는 바람에 교회는 없어졌고 그래서 목회할 곳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 갔는데 정말 길이 막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의 마음에 선교해야 한다는 꿈을 가지고 무작정 현장에 가는 용기를 가졌을 때 하나님은 미리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제가 믿음의 행동을 할 때 실현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렇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살리시는데 내가 용기도 없고 모험도 없고 그저 내 머리 굴리면서 손해 안보고 내가 계산해서 하는 생동은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물론 너무 무리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실천과 적용은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하고 경험하며 나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 되며 하나님의 뜻이 곧 나의 뚯이 되어 섭리와 의지가 함께 하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우상이 아니라 천지를 지으시고 운행하신 역사의 하나님 살아계셔서 지금도 나와 함께 나를 사용하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 켈리포니아 멕아더 목사님에 대해 미국민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켈리포니아가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확증자 1번을 지키는 주입니다. 주지사나 켈리포니아 시장 모두 민주당입니다. 교회 다니는지 모르지만 하는 일 보면 분명히 무신론자입니다.
무신론자들이 이런 질병이 오면 본성이 드러납니다.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모릅니다. 특히 교회를 싫어하기 때문에 어느 나라이든 미국의 주이든 민주당 시장들은 코로나 질병으로 교회를 억압합니다. 특히 까다로운 예방법을 만들어 교회도 예외 없이 따르라고 하고 강제합니다. 그래서 전쟁 중에도 중단 없이 드리는 교회 예배를 못 드리게 합니다. 한국도 전광훈 목사님을 감옥에 가두고 좌파 정권을 돕는 무신론자같은 교회 지도자 목사들이 따라서 예배 금지를 따르며 큰 교회 목사일수록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죤 맥아더 목사님은 계속해서 예배를 봅니다. 교회에서 거리두기도 하지 않고 예배를 드립니다. 주 정부에서 경고를 하고 벌금을 부과하겠다고 위협했지만 담대하게 계속했습니다. 주정부가 제제할 때 연방 법원에 소송해서 이겼습니다. 미국 법원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담대합니다.
물론 정부의 정책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하나님의 절대 명령입니다. 포로나 무서워 예배 안 드리면 예수 뭤 때문에 믿습니까? 하나님이 죽은 하나님이라면 신앙이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 분이 얼마 전 설교 제목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미스테리 풀기”입니다. 바로 오늘 여기 제가 말씀 드리는 제목입니다. 참 어려운 제목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확실한 뜻을 알고 용기 있게 예배를 계속하고 법적으로 승리해서 트럼프 대통령의 전화까지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뜻을 알게 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합니다. 두려워 몇 년 더 살아보겠다고 졸렬하고 비열하게 두려움에 사로 잡혀 사는 것은 하나님을 우습게 아는 것엽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저도 이 집에서 작은 숫자로 법을 지키면서도 예배 중단을 하지 않는 것은 제가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3. 인간 신뢰 실천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은 이일을 시작할 때 종을 불러 그의 용기 있는 결단으로 종이 할 일을 맡기면서 전적으로 그를 신뢰하고 중차대한 일을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앙을 주셔서 먼저 하나님을 정말로 믿도록 훈련도 하고 요구도 하시면서 이 믿음으로 우리 가정의 가족도 이웃도 특히 교회도 서로 믿고 살 수 있도록 신뢰를 구축하라는 뜻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때때로 거짓말도 듣고 사기도 당하고 손해도 보고 실망이 가는 수 많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성경은 서로 믿고 살 수 있는 사회가 하나님 나라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니 얼른 믿기 어렵더라도 손해를 감수하고 신뢰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이 남을 자꾸 의심하고 무슨 일을 하면 이것을 의심하고 저것을 의심하는 것은 바로 자기 신앙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원래 자본주의는 신뢰를 바탕으로 가능한 경제 체제입니다. 믿지 않고 투자할 수 없고 믿지 않고 졍제 활동을 원활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시장 경제가 자유 민주주의 정부와 같이 가려면 무엇보다도 신뢰가 바탕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회가 형성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망하게 되고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돈 가진 자가 돈 없는 자를 착취하고 자기 배를 불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민주주의가 필요하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는 반드시 기독교를 근본으로 가능합니다. 왜냐민 미국과 같이 자유 민주주의 대의 정치는 성경에서 기초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민주사회에서는 신뢰를 쌓아야 합니다. 크레딧 점수를 올리고 보지 않는데서는 거짓으로 요령을 부려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뢰가 가정을 행복하게 하고 자녀들을 복되게 합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믿고 부모도 믿고 교회 목사도 믿고 장로도 믿고 집사 권사도 믿고 교우들을 믿어야 합니다.
結 論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롭게 여겨주시고 그 믿음을 잘 적용하여 더 큰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이룰 수 있도록 훈련하셨음을 봅니다. 약속의 씨를 잉태할 며느리를 구하는 과정에서 그는 성숙한 믿음을 미련 없이 발휘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 이민 온 보잘 것 없는 한 민족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의 그 신앙이 시작되었음을 확신합니다. 나 같은 죄인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은혜의 구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사람하심이 이미 확증되었으니 담대하게 어려운 처지나 환경을 핑계하지 말고 담대하게 적용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우심과 섭리를 날마다의 생활에서 체험하며 사는 새 이스라엘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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