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를 보는 영안 (2020년 10월 25일 주일예배 설교) > 설교본문

본문 바로가기
  • book 월간 새 이스라엘

설교본문

섭리를 보는 영안 (2020년 10월 25일 주일예배 설교)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명길목사
댓글 0건 조회 2,886회 작성일 20-10-28 12:48

본문

                                                                         섭리(攝理)를 보는 영안(靈眼)


2020년 10월 25일 주일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창세기 24:50-60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50-51).


     하나님이 자주 자신을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철학적 하나님을 말하는 이신론자(理神論者)들은 신은 피조물을 창조한 후 자연 질서 안에 버려두고 직접 통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실제 역사적 인물들과 함께 그들의 삶 속에서 섭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과 함께 거하시며 그리스도로 구원받은 자들 안에 내주하십니다.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셔서 우리 자체가 성전이라고 불려집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내면에 거주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우리의 삶 속에서 내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로 쉽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함으로 하나님 뜻대로 살지만 상당히 많은 분들이 교회는 잘 다니고 성경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지만 전혀 하나님의 섭리를 보지도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여 자신과 함께 계시고 자기 안에 사시는 성령님에 대해 무감각하게 살고 있습니다. 영적인 눈을 뜨지 못했거나 아니면 구원받지 못한 자이면서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거짓 교인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실제를 체험하고 느끼고 보는 영적인 눈이 떠진 사람을 말합니다. 

     진실한 신앙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때 일어납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고 보고 깨닫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매일 쓰는 미국 달라 지폐가 이런 청4도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봅니다. 지폐 뒷면에 “In God We Trust.”글씨를 삽입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이 경제 특히 자본주의 경제와 시장 경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는 유지되지 못합니다. 왼쪽 편에 피라밋과 눈에 대해서는 “일루미나티”라고 잘 못 알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프리 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 같은 집단들이 비슷한 것을 사용한 것이 있지만 미국 사람들이 이것을 돈에 새겼다는 것은 확실한 근거가 부족합니다. 원래 이런 그림은 초기 베드로의 순교를 상징한 것으로 십자가에 거꾸로 메어 달려 순교한 얼굴 삼각형이 눈은 아래쪽 2개가 있던 것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하나님의 눈을 위에 놓고 3각형을 바로 세워 윗 쪽에 넣은 상징으로 “하나님의 섭리로 1776년 새 시대의 새로운 질서”를 세웠다는 뜻이 포함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피시고 미국 국가 건설이 그의 뜻이었음을 라틴어로 세긴 것입니다. 미국 건국자들이 이런 하나님의 섭리로 세워진 나라에서 날마다 보고 느끼고 목표를 향해 함께 가도록 돈에 새긴 것입니다.

     창세기 24장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결혼 이야기는 한 여인의 드라마틱한 결혼 이야기임에 틀림없지만 그보다 훨씬 더 아브라함의 종이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깨달아 하나님이 정한 여인을 데리고 오는 섭리를 보는 영안을 어떻게 열고 뜻을 따라 어떻게 실천했는가를 보여주는 섭리를 보는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주인에게 맹세하고 며느리를 구하러 집을 떠났지만 알지도 보지도 못한 아녀자 하나님께서 정한 여인을 만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여인 가운데 누가 하나님께서 정한 아브라함 주인의 며느리가 될 수 있는지 그도 염려하였던 것을 맹세하는 장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리브가를 만나기 전부터 어떻게 만나는가를 자세히 보면 얼마나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는 영안을 가진 분이며 어떻게 하나님께서 정한 자를 찾을줄 아는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큰 비결이 있거나 신앙의 비밀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하면 영안이 떠지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아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려면 반드시 이런 과정을 거치고 이런 신앙을 적용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3가지 구체적 방법을 보여줍니다. 기도와 관찰과 결단입니다.

1. 구체적(具體的) 기도(祈禱)

      아브라함의 종이 낙타 10필에 좋은 물건들을 싣고 다른 종들과 함께 나홀의 성이 있는 메소포타미아에 도착했습니다. 살기는 성 안에 살지만 사막 지대이기 때문에 우물은 대개 성 밖에 있습니다. 집에서 멀다는 의미입니다. 거기서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여자들이 때가 되면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러 나오기 때문에 여자들을 만나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입니다.

     그는 우물 위에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뜻을 보고 알려면 기도 외에 다른 비결이 없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뜻을 구별하며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합니다. 기도는 신자의 호흡이라 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확실한데 현실적으로 알기 어려운 때는 기도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영감이 떠오르기도 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응답도 즉각 보고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14). 

      이 기도를 자세하게 보면 이 한 마디에 아주 깊은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기도가 구체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님이 정한 사람을 만나게 해 주세요” 추상적으로 기도하고는 자기가 좋은 사람을 하나님이 정해주셨다고 억지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이런 여자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자기 느낌이나 자기 생각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주인의 입장에서 우리 주인이 이런 여자면 참 좋겠다는 뜻을 살려서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추상적 기도는 내 믿음이 부족하다는 표시입니다. 섭리를 보는 영안이 부족하면 기도가 추상적이 됩니다. 추상적 기도는 응답도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때때로 예배 시 대표 기도를 들으면 너무 추상적이어서 하나님도 그의 기도의 의미를 모를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물론 대표 기도는 종합적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중기도를 짧게 하기 위해서도 추상적 기도가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여기 혹 아픈 사람이 있으면 저는 모로지만 하나님은 아시니 낫게 해주시고 사업이 잘 안 되는 사람이 있으면 잘 되게 해주시고 자녀 문제 있으면 해결해주시옵소서” 기도 속에 대상자에 대한 대표 기도자의 무관심과 사랑 없음을 스스로 포함합니다. 아예 누가 아픈지도 모르고 누가 문제 있는지 사업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하나도 모르니 추상적인 기도밖에 할 수 없습니다. 

     추상적 기도는 사실상 기도의 의미를 모르는 중언부언의 기도입니다. 장로의 대표기도자로 교인들 모두는 아닐지라도 형편도 좀 알고 영적 문제도 좀 알고 병이 있는지도 살피고 그래서 “하나님 아무 게가 지금 무슨 병으로 앓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셔서 이 병에서 하루 속히 치유함을 받게 하시고 아무 게는 이런저런 일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 사업을 하나님께서 잘 해결하도록 지혜를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특히 도울 사람을 주셔서 하루 속히 해결하게 해 주옵사서” 이런 구체적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먼저 그 사람과 형편을 아십니다. 하나님이 중보기도 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그 사람의 형편을 알고 관심을 가지고 또한 도움이 필요하면 사랑으로 도울 수 있는 자세를 먼저 가지고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 어려움 당하는 형편을 알고 주 안에서 사랑으로 도울 수 있도록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중보기도입니다. 

     때때로 남에게 관심 갖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일을 남이 알고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려움은 누구나 당합니다. 어려움이 나의 수치가 아닙니다. 물론 내 잘못으로 어려움이 올 수도 있어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에 알리기를 꺼려하고 구체적 기도를 하면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서 얼마든지 좀 더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방법은 수 없이 많습니다. 사랑과 관심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질병은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병을 창피하다고 감추면 손해입니다. 알리고 기도 요청해서 중보기도할 때 치료 방법도 정신적 도움도 많이 받게 됩니다. 그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사람의 나눔이 됩니다. 관심을 가지면 고통을 혼자 겪는 외로움을 빨리 벗을 수 있습니다.

둘째 종이 어떤 여자를 지금 보여 달라 하는지 이 짧은 기도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종의 말을 자세히 생각하면 일하는 여자를 아브라함의 며느리로 선택해주라는 것입니다. 성 밖에 있는 우물에 물을 길러 오려면 상당히 먼 길을 물동이를 지고 와서 무거운 물을 집으로 가져가야 하는 중노동입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여자는 신분이 평범하고 일을 좋아하는 여자이고 부지런한 보통 가정의 여자입니다. 돈 맡은 권력자의 딸은 물길러 오지 않고 하인들이 옵니다. 물 길러 오는 여자는 일하며 밥하는 여자이며 빨래하고 가사를 돌보며 집안일을 돕는 여성입니다.

     또한 건강한 여자를 달라는 말입니다. 몸에 지병이 있으면 일하기도 어렵고 특히 중동 지방의 성 밖의 우물물을 길러 오지 못합니다. 특히 물을 달라하면 기꺼이 물을 줄 뿐만 아니라 짐승까지도 물을 주는 여자를 원하는 것입니다. 

     중동 사막 지대의 우물은 대개 나사형으로 위에는 넓고 밑으로 점점 깊기 파면서 주위를 나사형으로 낄을 내어 뱅뱅동면서 밑으로 내려가 물을 길러 무거운 물동이를 지고 위에까지 올라와야 합니다. 가파른 길이며 힘이 드는 길입니다. 여자가 무거운 물을 지하 깊은 곳에서 지고 와서 물을 많이 마시는 약대까지 줄 수 있는 여자는 드뭅니다. 왜냐면 약대는 한 번에 물을 많이 마시고 사막길을 짐을 지고 가는 그런 짐승인데 감히 물을 주겠습니까? 요사이 여자들은 내려가서 떠 잡수세요! 동물은 생각지도 않고 당연히 물을 먹이려면 자기들이 물을 길러서 먹여야 당연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물을 먹이는데 10필의 약대에게 주는 여자는 건강하여 적어도 11번의 물을 길러 오르내려야 하는 중노둥을 할 수 있는 여자니 건강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넓어 동물에게까지 자비로운 포근한 사랑 많은 여인을 달라는 말입니다. 지금 종은 감히 짐승까지는 말을 하지 않고 자기만 물을 좀 달라고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인의 생각이 사막을 걸어온 짐승에게까지 미쳐 자기 수고를 따지지 않고 물을 통으로 마시는 짐승에게까지 마음을 쓰는 그런 여자, 자기 수고를 무서워하지 않고 자기 몸을 사리지 않고 동물까지 사랑하는 그런 여자를 달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함축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날 물을 먹이는 장면은 정말 영화로 만들어 보더라도 참 감동적인 장면일 것 같습니다. 리브가는 그런 일하는 여성이었고 건강하였고 물을 많이 마시는 낙타에게까지 물을 먹일 줄 아는 그런 마음 넓고 자비로운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 여인을 달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며느리를 구할 때 이런 구체적인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하며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이런 사람을 선택하면 참으로 가정이 편하고 평생을 즐거움으로 살 수 있습니다. 낙타 10필을 어떤 놈은 주고 어떤 놈은 안 주고 할 여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리브가는 상당한 시간을 낙타 물 먹이려고 애를 썼을 것이며 이를 유심히 본 종도 협력해서 물을 길어 먹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마음의 여인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응답 즉 섭리를 보는 영안이 열려 하나님 뜻을 보다 빨리 쉽게 분별 적용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의(信仰的) 관찰(觀察)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응답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관찰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응답을 의심해서 응답해주셔도 좋고 안 해주셔도 좋은 자세로 무관심한 것은 믿음의 기도 자세가 아닙니다. 때로 응답 안 해주실지라도 응답해주심을 확신하고 기다리는 자세가 믿음의 자세입니다. 응답 안 해주시는 것이 응답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매년 추수 감사절 때는 감사제목과 기도 제목을 구체적으로 적어 간직하고 일년 동안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종이를 간직하고 관찰하라고 해도 그것을 어디에 두었는지조차 모릅니다. 그러니 무엇을 기도했는지도 모르고 응답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내주하시면서 나의 일생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내가 순종하는대로 은혜로 보답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하나 더 보태서 이명길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잊어버리지 말고 확신으로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해주시는지를 살펴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산 경험이 있어야 참된 신자요 신앙인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섭리의 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불신하기 때문에 모르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경우에는 허다합니다만 하나님은 우리 삶 가운데서 역사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기도 즉시 하나님께서 답하시는 것을 보고 관찰했습니다. 그 때 예쁜 아가씨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가 물동이를 메고 우물이 있는 나사 모양의 땅 아래로 내려가서 물을 길어 가파른 길을 올라오는 것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녀한 처녀더라 그가 우물로 내려가서 물을 그 물동이에 채워가지고 올라오는지라 종이 마주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데 네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16-17)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종에게 물을 줄 뿐만 아니라 이 모든 낙타에게도 물을 마시게 하겠다고 하면서 물동이를 지고 다시 우물로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기도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구체적인 기도는 관찰하기가 쉽습니다. 기도가 추상적이면 추상적인 응답을 할 때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관찰은 아주 관계가 깊습니다. 구체적으로 기도하고 구체적으로 관찰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고 확신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계속해서 유심히 그 여자를 보면서 물을 길러서 약대까지 먹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확신을 가진 것입니다. 주인 말대로 하나님께서 평탄한 길을 주셨구나.

     너무 수고하는 리브가에게 그는 반 세겔의 금 코걸이와 열 세겔 무게의 금 손목걸이를 주었습니다. 엄청나게 비싼 선물입니다. 이런 여인은 이런 값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에 대해 질문을 하고 묵을 처소가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참 사람 대접을 잘하는 분들임을 알고 유숙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삭에 대해서 자랑하고 그러니 이보다 나은 신랑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어떻게 인도했는지 간증했습니다. 관찰하지 않았다면 이런 간증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도할 때 의심하고 기도하고 기도한 후 의심하고 가능성을 물으면 글쎄요 나도 모르겠어요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 참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면 이루어 주면 자기 공로로 이루었다 하기 쉽기 때문이며 하나님 뜻보다 자기 뜻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은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응답은 꼭 내 뜻대로만 응답하시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기도하면 응답을 바로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가 그런 기도였습니다. 기도하고 즉각 한 여인이 나타나 물으니 그가 구하는 여인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전에 우리는 말씀에 기초한 하나님의 뜻을 적용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 뜻을 세우고 내 욕심대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때때로 해로울 때가 있거나 하나님 뜻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응답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기도 응답이 됩니다. 그럴 때는 빨리 내 잘못을 깨닫고 자신의 기도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가를 깨달아 고쳐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 몸에 가시 같은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오래 기다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질병이 자기를 얼마나 겸손하게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있는지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결론짓기를 아 이 병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미 은혜를 족하게 주셨구나 내가 이 병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내가 겸손할 수 있는가 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을 때가 많구나 나는 종이나 내 뜻대로 기도하고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만이 하나님의 섭리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신자에게는 바로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3. 용기(勇氣) 있는 결단(決斷)

     아브라함의 종은 계속해서 대화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정하신 여인이라는 것을 갈수록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가니 벌써 연락이 되었는지 종들을 위한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삽니다. 한국 사람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참 먹는 것을 중히 여깁니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온통 먹는 이야기만 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요사이 텔레비전을 보면 온통 먹는 프로그램이 많습니다. 인생이 먹으러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먹는 것만 생각하는 것은 짐승이나 할 일이고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대답합니다.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 라반이 이르되 말하소서.” 이게 사명 받은 자의 태도며 일하는 자의 태도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고 해야지 하면서 하다가 중단하고 먹는 것은 때로 다급하게 해야 할 하나님의 일도 먹는 것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삶의 철학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밥보다 더 중요한 사명을 1순위로 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먹을 것 다 먹고 놀 것 다 놀고 여가 있을 때 주일 일 한다는 생각부터 고쳐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그러면 먹는 것도 일하는 것도 시간 배정을 적당히 잘 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런 간증을 들은 리브가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은 정말 하나님께서 내 딸을 이삭의 아내로 하나님이 정하셨음을 확신하게 했습니다. 가족들이 신학자들 아니었습니다. 하루에 일어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자초지종 들었습니다. 간증을 듣고 이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50-51). 보통 사람들의 보통 생각으로 믿음 안에서 결정한 것입니다.

     리브가의 가족들을 볼 때 참 믿음의 결단을 잘 하는 분들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고 대답합니다. 자기들은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입니다. 들음도, 반응도, 결정도 기적입니다. 이런 가정이면 하나님이 쓰시기 참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당사자 리브가 딸의 결단이 중요했습니다. 당사자의 의견을 무시한 결정을 할 수 없었습니다. 고대 사회에는 부모가 결혼을 정하면 자녀들은 순종하면 됩니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신분제도가 강한 인도는 지금도 부모가 딸을 돈 받고 팔아먹는 경우가 허다하며 본인의 의사에 상관하지 않는 문화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4,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이같이 인권이 있고 자유가 있고 개인의 결단을 존중하는 가정이었음을 봅니다. 리브가의 가정은 참 좋았습니다.

     이들이 리브가에게 가겠느냐 물었습니다. 아마도 이 간증의 주인공 리브가는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손님들의 말을 처음부터 잘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가족의 결정처럼 그도 그렇게 확신한 것으로 보입니다.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힘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여 가겠나이다.”(58) 리브가는 새로운 인생을 결정하는 순간입니다. 지금까지 부모 밑에서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결혼하기 위하여 수천리 길을 가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결정을 어찌 그리 빨리 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보고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결정을 듣고 떠나는 딸에게 부모들은 울면서 “언제 만날꼬? 건강 잘 챙기고 네 몸 알아서 보살피며 행복하게 잘 살라” 하고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런 축본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축복의 말 속에 나타난 그 가정의 비젼이 보다 크고 값지다는 말입니다. 

     시집가는데 서양 사람은 우는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기뻐서 울기도 하지만 시집가서 사는 것은 축복의 삶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들을 보내며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59-60).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그 가정의 비젼과 꿈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축복입니다. 그 가정은 세상을 보는 눈이 컸습니다. 여자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자녀를 낳되 그 자녀가 천만인의 어미가 되기를 바라는 놀라운 꿈이 있었습니다. 세계의 어머니가 되고 동남아의 어머니가 되고 한국의 어머니가 되라는 꿈이 있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왔을 때 초기 저에게 편지를 보내주는 초등학교 여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이정애 선생님입니다. 그는 편지 끝이 “동남아의 어머니 이정애 올림” 이렇게 적어 보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분이 어떻게 동남아의 어머니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신앙을 심어주고 선생님들과 성경공부하고 동남아 선교를 위해서 월급을 나누어 헌금하고 동남아 선교사를 돕고 기도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동남아를 품고 사는 분이었습니다. 이런 꿈이 있었기에 현실에서도 충실하고 좋은 선생님이 되었고 동남아를 위해서 또한 그 곳에 가 복음 전하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고 물질적으로도 도왔습니다. 이렇게 포부가 커야 하나님이 크게 쓰십니다.

結   論

     리브라의 삶은 이런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이삭의 하나님은 이삭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그를 도와 줄 한 여성을 준비하여 그가 믿음의 조상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사람을 준비하셨고 그를 도우심으로 이삭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섭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삶 속에서 터득하고 그 뜻을 실현하며 하나님께서 나의 삶과 우리 현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심을 보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귀한 일꾼으로 사용하셔서 위대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 땅에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새로운 세계 질서를 위해 미국이라는 나라를 1776년 세워주셨고 우리가 지극히 가난할 때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해 주셨고 공산주의 침략에서 기적적으로 미국을 움직여 우리 나라를 구해주셨고 한미 동맹을 맺어 우리를 경제 대국 10위권에 이르는 부자 나라 기독교 국가로 만들어주셨고 세계에서 어디 가나 교회 세우는 한민족이 되게 하셨으며 케네디 대통령을 통해 동양인도 미국 땅에 이민 오는 길을 열어 우리 한인들이 많이 미국에 이민 와 어느 민족보다 많은 교회를 세우며 자녀들을 신앙으로 가르쳐 미국인의 정체성을 바로 세웠고 자녀들이 명철해 이미 주류 사회 진출과 아이비 리그 신입생이 소수민족 단위상 가장 높아 유대인을 앞지르는 민족으로 세워주셨으니 이 모든 증거들을 볼 때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 민족 기독교인들을 이 시대의 “새 이스라엘” 민족으로 부르신 것이 확실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 받아 살 때 부족하지만 위대한 역사의 산 일꾼으로 우리의 한 생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 사명을 너무도 잘 수행해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대로 그의 자손들을 하늘의 별 때같이 많게 하셔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 만물을 회복 하나님과 하나 되는 그 나라를 완성하시려고 우리를 뽑아 미국에 이민 보내주셨고 지금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우리를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피부로 느끼고 보고 확신하여 더 크고 보람 있는 삶이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