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야곱의 창의성 (2020년 11월 15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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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人間) 야곱의 창의성(創意性)
2020년 11월 15일 주일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창세기 30:32-43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 구유에 세워 양 떼를 향하게 하며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덜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30:38)
야곱은 발꿈치를 잡고 태어나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거짓말쟁이란 뜻이 있다고 합니다. 이름처럼 야곱의 생애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기 유익을 구하고 운명적인 것이라 빼앗을 수 없는 장자권이라도 속여서 사들이는 그런 인생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자기에게 유익한 일이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수단 방법을 동원해 자기 것을 만드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자기 중심주의자요 기회주의자요 이기적인 사람이며 투쟁적인 사람이었고 도덕도 법도 필요하면 범할 수 있는 거의 자율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을 부를 때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는 주로 민족을 말할 때 쓰시지만 한 개인의 하나님을 말씀하실 때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꼭 우리가 선해서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야곱과 같이 형편없는 사람의 하나님도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과 같은 인간을 훈련하시고 그를 새롭게 하셔서 그의 인생을 필요에 따라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실은 창세기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야곱의 이야기로 후에 요셉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요셉의 하나님이란 말씀보다 조상 3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 즐겨 사용하십니다. 그만큼 그의 생애는 굴곡이 많고 하나님께서 쓰시기 까지 다듬고 세련되게 기르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야곱의 이런 적극적인 삶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아마도 야곱을 통해 그의 부지런함과 열심을 배울 수 있고 특히 그의 창의성을 배울 수 있다 봅니다. 그가 마지막 이스라엘로 바꿔지는 순간에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는 장면을 눈여겨보며 우리도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져와 하나님과 싸워 만나 해결하는 신앙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1.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야곱은 태어나면서부터 경쟁을 나타냅니다. 대개 쌍둥이를 낳을 때 보면 첫째 아이가 나오고 좀 있다가 둘째가 나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상하게도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한 번에 나옵니다. 아마도 리브가의 산통이 좀 짧아졌을 것입니다. 금방 둘이 한 번에 태어나버렸으니까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떻게 둘째가 첫째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는지 뱃속에서 무슨 일이 일었나 봅니다. 서로 먼저 나오려 뱃속에서부터 싸우다가 형이 먼저 나오니까 엉겁결에 발꿈치를 잡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의학적 설명은 아니겠지요?
사실 쌍둥이를 잉태한 리브가는 배 속에서 둘이 싸우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25:22에 보면 “그 아들들이 그의 배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데” 말하고 있습니다. 쌍둥이가 조용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를 매우 괴롭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너무 배가 아프니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뱃속에서부터 요란하게 싸워 엄마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 국민이 내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25:23). 쌍둥이를 낳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완전히 둘이 달랐습니다.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았다고 합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몸에 털이 많았나 봅니다. 붉다는 뜻으로 에서라고 이름 지었고 나중 나온 자는 그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으므로 야곱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완전하게 두 아이가 다른 쌍둥이를 이란성 쌍둥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형과 동생이 모양이나 성격이 서로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 야곱은 정말 전투적인 인생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지지 않고 자기가 부족한 것은 어떻게든 포기하고 낙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충하고 채우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부지런하게 인생을 삽니다. 결코 게으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하면 된다는 적극적 사고 속에서 인생을 극복해나갑니다. 이런 사람들을 부지런하고 적극적이고 노력파라고 말합니다. 사실상 이런 사람은 자기 몫을 감당하고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실 저는 이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제가 바로 그렇게 인생을 살려고 했고 노력하며 살고자 했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래서 때때로 어려움도 겪고 절망과 좌절에 빠지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가난하기 때문에 남보다 훨씬 더 노력해야 된다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런 투쟁적 인간을 칼 막스는 일반화했습니다.
야곱의 열심은 그가 20년의 처가살이를 마치고 돌아갈 때 도망가는 야곱을 뒤쫓아온 라반에게 자신을 변호하는 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냥 읽어만 보아도 그의 삶을 굽어다 볼 수 있는 묘사입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보셨으니 외삼촌의 집안 물건 중에서 무엇을 찾아내었나이까 여기 내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둘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내가 이 이십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육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풍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31:36-42)
열심히 살면서 눈 붙일 겨를도 없이 그 동안 부지런히 외삼촌의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보든 말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습니다. 환경에 따라 게으름 피우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일해주는 성실한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절대로 외삼촌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짐승에게 물려 죽으면 오히려 자기 것에서 갚아 숫자가 틀리지 않게 했다 합니다. 자기 잘못이 아니니 물어줄 필요가 없음에도 한 번도 자기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품삯을 열 번이나 변개, 즉 깎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양떼가 불어나기 때문인지 불평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했다는 말입니다. 사실상 야곱의 심정으로 아깝지 않고 대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주인에게 절대 손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이런 야곱의 일하는 태도 피고용자로서 고용주에 대한 정신은 노사 논쟁이 심한 지금도 본 받을만한 자세입니다. 우리는 주인에게 대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대에 삽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스스로 협력하고 내가 희생적으로 일하는 태도가 화목한 직장을 만들고 노사 협력이 투쟁보다 더 큰 유익을 가져오는 것을 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아예 협력이라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무조건 투쟁으로 노사를 이간합니다.
그가 열심히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오히려 손해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야곱의 양떼들이 건강하고 살진 것들이 다 그의 것이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양보하고 내가 손해 보더라도 주인을 위하는 마음을 가진 자 내가 혹 손해를 보더라도 협력하고 협조하는 마음으로 화목을 심는 자를 복주십니다. 지금 노조를 만들어 일 안하고 월급만 받겠다고 싸우는 것은 사탄의 방법이지 선택받은 사람들의 마음은 아닙니다. 노조가 얼마나 산업 발전에 방해가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인과 투쟁하는 것이 정상이고 협력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는 세상은 좌파에 물들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세상사는 개념이 전도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세상을 협력과 자기희생으로 살게 하지 않고 계급의 투쟁으로 살도록 하는 좌파 정신은 사탄의 방법이지 하나님 방법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협력 정신 내가 희생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싸우기 전에 내가 최선을 다 했는가 살피고 주인은 반대로 고용인들을 귀하게 여기고 저들의 생활을 보살피며 사랑하며 유익을 공유하는 정신으로 기업을 운영할 때 회사는 복을 받고 종업원의 직장이 복됩니다.
2. 가능한 모든 것을 창의적으로 실험합니다.
야곱은 열심히 일하며 사는 근면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창의적인 모든 가능한 방법을 실험해보면서 자기 재산을 늘리려고 하는 독특한 사람이었음을 20년 타향살이의 마지막 6년의 삶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주인인 외삼촌에게 삯을 가지고 올려달라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무려 14년을 무료로 일을 했습니다. 자기 부인 둘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언니보다 동생 라헬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동생과 결혼하는 날 깨어보니 언니였습니다. 그래서 동생을 달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곳 풍속에 동생이 먼저 결혼하는 열이 없으니 동생을 위해서 또 7년을 무료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에 두 자매를 부인 삼았습니다. 그리고는 14년을 무료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참 긴 세월입니다. 일하고 밥만 먹었습니다.
14년이 끝나고 이제는 품삯을 정하는 계약을 했습니다. 주인 외삼촌에게 해가 안 되도록 값이 안 나가는 아롱진 것 얼룩진 것 색깔이 있는 것 검은 양을 자기 것이 되게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흰 양들에게서 이런 특종이 태어나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계약함으로 상대방에게 손해 본다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배려했습니다. 외삼촌의 욕심을 너무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계약을 하고는 그는 자기 재산을 그냥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자기 양 떼들이 많아져야 했습니다. 그것이 야곱의 인생철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 가지를 껍질을 벗기고 그 나무로 발을 엮어 강 안쪽에 치고 양들이 물을 먹으러 들어갈 때 너무 깊이 들어가면 위험하기 때문에 그것을 보면서 물을 먹게 하고 오가는 중에 새끼를 배게 했다고 했습니다. 창의적 노력의 한 모습입니다.
현대 과학으로 보면 용납할 수 없는 참 웃기는 일입니다. 양 털이 이렇게 얼룩덜룩해지는 것은 유전자이지 얼룩덜룩한 것을 보고 물을 먹는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 과학자들이 보면 전혀 인정할 수 없는 무식한 발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그렇게 믿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일을 해보는 야곱을 복을 주시고 그런 양들 새끼가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가능성이 있는 것은 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가능한 것을 실험해보며 자신의 재산을 불렸습니다. 무작정 정해놓고 기다리는 사람은 지금과 같은 시대에는 낙오자가 됩니다. 우리 자녀들이 세상 살면서 사업하다 엎었다 뒤집었다 할지라도 이렇게 실험하며 사는 사람들은 결국 성공하는 것을 봅니다. 무난하고 손쉽게 인생 살기를 원하여 순탄한 길을 택하는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뒤집을 수 있는 굴곡은 없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복된 사람이 되기 참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을까? 찾아보고 궁리하고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기보다 색다른 것을 실험해보면서 보다 창의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사람은 결국 성공합니다. 안 된다고 미리 생각하며 포기하지 말고 왜 그럴까 과학적으로 따지지 말고 실험해보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정주영회장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새로 시작하려 하면 참모들이 그건 이런 어러움 때문에 안 되고 이런 일을 하게 되면 이래서 성공하기 어렵다고 말한답니다. 그럴 때 정주영 회장은 질문합니다. “임자는 해 봤어?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안 된다고만 해?” 그는 바다를 막을 때도 사람들이 도저히 막을 수 없다 했습니다. 그는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도전했습니다. 그래서 해만금 간척지를 만들 때 둑을 쌓아 물길을 큰 배를 가라앉혀 물을 막았습니다. 중동 지방은 너무 더워 우리 한국인들이 일할 수 없다 했는데 더운 지역에서 낮에는 자고 밤에 일하면 되지 하고 사우디 아라비아에 가서 돈을 벌어 와 한국을 살렸습니다. 그것이 정주영씨가 재벌이 된 비결이었습니다. 남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정주영씨는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도전하고 그렇게 가난한 한국을 부자 되게 하는데 본을 보였습니다. 창의력이 있는 사람은 용기가 있습니다. 남이 안 된다는 곳에서 되는 일을 창조합니다.
지금같이 너무 기술이 발달해서 남이 해놓은 기업에서 시키는 일만 하며 큰 회사에 안주하려는 사람은 월급쟁이밖에 할 수 없습니다. 직장이 없는 사람들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창의력을 발휘할 때 돈도 벌고 사업도 새롭게 번창하는 것을 봅니다.
아이들을 너무 공부만 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어려서는 잘 놀게 하는 것이 유익하다 합니다. 왜냐면 교과서 외우고 시험지 답안을 잘 써서 성적이 좋다고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초등학교 동창을 볼 때 백돈기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늘 싸움 대장이고 노느라 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졸업 후 그를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동창 중에서 제일 돈이 많은 부자라는 것입니다. 저보다 훨씬 공부를 못했는데 동창들이 제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 친구는 재벌이어 고향에도 돈을 많이 기부하고 학교에도 기부하고 그래서 고향에서는 훨씬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부자가 제 인생의 목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놀면서 자랐어도 창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 고향을 위해 헌납했다는 소식은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한 이야기였습니다.
세상을 살펴보면 참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돈벌이를 하려는 생각으로 취직을 해서 현금을 빨리 쥐는 그런 직업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발전이 느린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민 와서 영어공부 하다가도 직장이 생기면 공부 집어치우고 일을 합니다. 체소가게에서 취직하여 먼저 돈을 법니다. 그런데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가난한 전쟁 국가에서 피난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미국에 정착해서 먼저 배워 라이센스를 받고 일합니다. 물론 영어도 우리보다 잘 합니다. 그래서 우리보다 더 미국 사회에 깊숙이 주류에 합류하여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직장부터 구하지 아니하고 기술부터 배워 우리보다 안정되게 사는 것을 봅니다. 연방이나 지방 공무원들이 된 사람도 많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창의력을 발위 안 해본 것 없이 실험하며 사는 사람은 결국 돈도 벌고 인생을 풍부하게 살 수 있습니다.
3. 문제 해결 위해 하나님과 씨름합니다.
야곱에게서 배울 점 세 번째는 그의 마지막 인생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열심히 살면서 많은 양 떼를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부인도 4명이나 되었고 자식도 11명이나 되었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라헬은 요렙 하나밖에 낳지를 않았습니다. 하여간 11아들과 딸 하나를 20년 하란 생활하면서 얻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외삼촌과 사촌들이 야곱의 양 떼가 많아지는 것을 보고 시기 질투하기 때문에 미래를 기약할 수 없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가족들과 함께 양떼를 몰고 출발했지만 장자권을 빼앗은 형이 어떻게 대할지 두려웠습니다. 형이 아직까지도 원한을 품고 있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새로운 불행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떠나자 말자 삼촌이 뒤 쫓아옵니다. 그에게 무엇인가 물건을 훔쳤다며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도적질했다는 것을 찾지 못한 삼촌 라반에게 항의했습니다. 결국 불가침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야곱은 형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야곱에게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불안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중나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란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고향으로 가는 길은 형이 막고 있고 하란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진퇴양란의 순간이 돌아온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자기 능력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격상 어렵다고 중간에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형이 두렵지만 고향은 돌아가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접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형의 동태를 살피도록 선물을 보내고 그가 자기를 아직도 미워하고 있는지 정탐하도록 했습니다. 자기 죄가 있는 사람은 이럴 때 자기를 죽이러 오는 것으로 해석 착각하게 됩니다. 참으로 위기의 순간입니다. 자기 꾀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감한 순간입니다.
그는 불안했습니다. 앞에서 그가 20년 동안 처가살이에 기도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도합니다. 솔직하게 고백합니다.“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저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에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32:11-12). 야곱은 하나님이 보호해줄 것이라고 가만히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계속 씁니다. 기도하고 나서도 불안합니다. 어떻게 이 위기를 면할까 궁리하다가 에서에게 선물을 주어 달래보려 합니다. 한 번에 주면 안 되기 때문에 조금씩 나누어 주며 형의 분노를 누그려뜨리려는 계책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선물도 절약하여 형의 진노를 풀려고 노력합니다. 참 야곱답습니다.
그는 양 떼를 나눕니다. 32:19절에 보면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 가는 자에게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이렇게 말합니다. 앞에서 각 짐승별로 떼를 만들어 에서를 달래는 선물을 삼고 또 세 때를 나누었습니다. 왜냐면 첫 번 선물로 마음이 안 차면 두 번째 세 번째 것으로 이도 모자라면 자기 것도 떼를 나누어 한 번에 다 빼앗기지 않고 앞의 것을 침공하면 뒤에 따르는 떼는 도망할 궁리를 한 것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식들도 부인들도 얍복강을 건너게 합니다. 양 떼와 함께 보낸 것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있다가 밤잠을 설치며 다시 생각하니 그들도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 처자들도 맨 뒤에 보내고 자기만 혼자 강을 건너지 않고 보기만 했습니다. 왜냐면 부인도 자식도 해를 당하게 되면 자기만은 살아 도망치고자 하는 그의 머리 굴리기를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철저한 자기 중심주의자의 진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씨름을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도 이겼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인간에게 질 수는 없습니다. 인간 이상의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간성이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때 천사가 이기지 못하니 떠나려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천사를 붙들었습니다.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축복을 요청했습니다.
그 때 천사가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믿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청하매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부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니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32:27-32).
야곱은 이후 절름발이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인데 하나님과 싸운다는 말은 하나님을 만나 씨름하듯 자기 문제를 놓고 기도하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삶은 육신적으로는 불편하고 장애인으로 살았지만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과 기도로 씨름하며 하나님과 상의하면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일 곧 만나는 일은 하나님과 기도하는 일이며 하나님과 문제를 놓고 씨름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야곱은 평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도 우리가 가진 특권도 우리는 하나님께 문제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과 상의 하고 문제를 푸는 기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가장 쿤 축복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불평도 할 수 있습니다. 고민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가 해결할 수 있다고 말도 안하고 자기 혼자 끙끙거리고 있으면 해결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까 말까 어떻게 순종하고 나의 의지와 생각을 접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정말 축복 받은 길일까? 고민하면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솔직하게 자기가 두렵다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민과 두려움을 솔직하게 고백할 때 들어 응답해주십니다. 하나님과 싸우는 것은 하나님과 심각하게 고민하며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직고하고 의견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을 Encounter 즉 만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피상적으로 만나서 복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표면적으로만 믿는 척하며 신앙생활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신앙은 삶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심각하게 만나 진솔한 고민을 하고 생경을 거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인 만남이며 야곱의 씨름이었습니다.
結 論
모든 인생에게 주어진 한 생은 짧고 순간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그럭저럭 살다가 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주어진 인생을 충실하게 살다 오라고 세상에 보내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해야 합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만나 결단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창의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생각 없이 남 따라 살지 말고 내 개성을 살려 독특한 나만의 삶을 살려고 독창성을 길러야 합니다. 남과 다른 길을 걸으며 남이 하지 않은 일들을 실험하며 실패하더라도 창조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만의 인생은 처음은 고달프지만 세월이 지나면 자기만의 인생을 실현하는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개성적인 세상사는 방법들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아무리 잘났고 능력 있는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한계가 있음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며 씨어리스하게 사는 인생은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말씀을 통해 지혜를 배우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래서 말씀 보고 기도하는 사람은 훨씬 복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복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문제를 놓고 기도하며 씨름한다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기도로 만나고 솔직한 고백을 하고 말씀을 생각하고 심각하게 순종을 고면하는 것이 씨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합니다. 생동력 있는 순종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삽니다. 그래서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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