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니엘의 하나님 (2020년 11월 29일 주일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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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니엘의 하나님
2020년 11월 29일 주일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창세기 32:24-32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러라(30).
지난 주일은 추수감사절 주일로 추수감사절 의미와 유래를 살펴보면서 “감사는 것이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추수감사절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감사, 찬양하고 우리 스스로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감사 찬송하는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존재가 영광의 찬송이 되어 거룩한 영광의 존재로 만물의 칭송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설교도 계속 창세기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야곱은 참 인간성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지지난 주에는 야곱이 얼마나 인간성이 강한 사람인가를 살펴보면서 게으른 사람보다 열심히 일하고 책임감이 강한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자기중심적이어서 이기적이기 쉬우며 자기밖에 모르기 쉽고 때로 자기 한계에 부딪치게 될 때 두려움과 절망에 빠지기 쉬운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분들을 각별하게 훈련하여 자기 한계를 넘어 하나님을 의지하게 훈련하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변화의 정점인 브니엘 사건을 중심으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는가를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브니엘이란 히브리 말 뜻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의 생애중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대면을 브니엘에서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만나셔서 씨름하시고 그의 이름을 바꾸어 중생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만남과 변화의 체험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크리스챤의 삶 중 중생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마하나임의 하나님
오늘 말씀의 앞부분을 보면 야곱이 얍복강까지 오는 도중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다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하나임이란 말은 군대가 머무는 군막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군대 막사에서 머무는 것인데 그 군대 막사가 여럿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군대 곧 싸우는 천사들을 본 것입니다. 군대는 적과 싸워 백성과 왕을 보호하는 전사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군대를 본 야곱은 반응이 미미합니다. 자기를 지켜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없고 왜 거기에 하나님의 군대가 있는지 생각지도 않은 체 지나칩니다. 물론 야곱은 장소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 장막이라는 의미입니다. 막사들이 많지만 왜 거기 있는지 마음에 닿는 것이 없습니다. 느낌도 없고 그들이 무엇을 위해 여기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야곱이 얍복강으로 가는 도중 길에서 하나님의 군인들을 보게 하셨을까요? 군인들이 야곱을 호위하고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환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잊어버리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야곱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야곱을 군대로 지키고 고향 가는 길을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볼 때 감동이 바로 오는 말씀도 있지만 어떤 말씀은 읽어도 관심 가지 않고 지나치는 말씀이 참 많습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군대로 지키신다는 환상을 보면 아 하나님께서 여기서도 나를 지키시는구나 생각하고 확신하며 두려움에 떨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군대를 본 야곱은 지금 얍복강 가에서 형 에서를 만나는 두려움 때문에 떨며 잔머리를 짜야 하는 두려움과 근심에 휩쌓인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한계에 부딪쳐 함정에 빠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내가 어려움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말씀을 수 없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말씀을 지나치고 마음에 새기지 못하고 심사숙고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우리가 항상 깊이 생각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 기도해야 홉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감동시켜 말씀을 조명하도록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말씀을 바로 보고 바로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이 말씀을 가까이 하면 말씀이 마음에 부딪치고 말씀이 생명이 되고 힘이 됩니다. 성경 말씀을 그냥 지나치면 군대를 보고도 감동이 없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부분적으로 세밀하게 보기도 하고 성경 전체를 읽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부분을 항상 전체의 맥락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때 성령께서 조명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배 시 설교를 잘 들어야 하고 성경 공부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바르게 보고 이해하는 훈련이 됩니다. 이런 자세로 성경을 자세하게 연구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훨씬 더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필요하면 원어나 주석 책을 참고하고 다른 분들의 설교도 참고하면 도움이 됩니다.
저는 사라 베리 선교사님과 함께 오늘 말씀을 배우며 중생의 필요성을 깨닫고 변화 받았습니다. 내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저는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저는 이렇다 할 어떤 사상이나 확신이 없이 인생을 허무하게 살았고 가난과 운명적 사고에 매여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이스라엘과 같이 되려면 제 자신을 심각하게 고민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과 내 인생을 심각하게 토론하고 내 인생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왔고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며 사는 이유가 어떤 것인가 정말 심각하게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심사숙고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씨어리어스하게 고민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말씀이 내 인생에 씨어리스하게 적용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성경 한 마디 말씀이라도 내게 적용하고 그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 되게 하려면 야곱에게 주어진 말씀이 내게 주어진 말씀으로 내게 적용되고 내가 변화하여 이스라엘이 되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되셔야 했습니다.
칼 발트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정통주의자들은 이렇게 깨달아지는 것을 “하나님 말씀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잘못된 신학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성경입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지 그 가운데 어떤 것만 마음에 부딪쳐 하나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 전채를 자세하게 보고 전체와 부분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음에 부딪치는 것만을 찾아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성령께서 우리에게 조명하지 못하게 우리가 막기 때문에 말씀이 부딪치지 않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마음에 온통 에서에 대한 두려움으로 차 있어서 하나님의 군대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조명하시게 하려면 마음을 비우고 집중하고 죄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한 마디를 읽어도 자세하게 문맥을 쫓아 읽고 묵상하며 뜻을 깊이 상고하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조명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깨달음을 소원하면 뜻이 더 분명해지고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말씀으로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것이 큐티(QT)요 묵상이며 성경을 읽는 참된 자세입니다. 그것을 소감을 쓰면 더욱 깊어집니다. 군대를 보고도 아무런 감동도 없이 지나친 야곱은 계속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으로 얍복강에서 양떼를 나누어 형을 달래려 하고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인 그는 자식들과 아내까지 강을 건너게 하고 자기는 건너지 않습니다. 밤이 되어 잠을 자야 하는데 벌떡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를 얍복강을 건너게 합니다. 하나님께 아주 불신앙적 기도로 자기 두려움을 털어놓지만 마음은 더 불안한 모습을 봅니다. 불신앙의 기도로 두려움을 벗으려 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정말 깨달음 안에서 사는 것이 축복이며 복된 신앙의 삶입니다.
2. 만나주시는 하나님
야곱은 먼저 형 에서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선물을 마련하고 어떻게 에서에게 말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4-5). 자신을 종이라고 표하고 형을 주라고 부릅니다. 형에 비하여 자신을 종으로 낮춥니다. 그렇게 강하며 형의 장자권을 팥죽으로 샀던 의기충천했던 자존심은 이미 던져버렸습니다.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온다는 말을 돌아온 사자들에게 들었습니다. 7절에 보니 이 말을 들은 야곱은 반갑기는커녕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종들과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말했습니다. 오고 있는 형이 두렵고 그래서 선물을 마련했지만 자기를 치면 나머지 한 떼라도 살려서 자기 것을 남겨 최소한의 피해를 면해보려고 머리를 쓰는 씁니다. 두려움 속에서 쓰는 잔머리는 결코 두려움의 해소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곱의 잔머리는 더욱 두려움을 가산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에서가 자기를 공격하려고 오는 것인지 혹 영접하려고 오는 것인지 고려해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자기를 옭아매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이런 두려움 속에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9-12).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니 야곱은 소유 중에서 에서를 위하여 또 예물을 택했습니다. 떼를 3떼로 나누고 각각 에서를 만나면 이렇게 말하라고 합니다.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18). 그 이유는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주리라 함이었더랴”(20).
저녁이 되 잠을 올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일한 아들을 인도하여 압복 나루를 건너게 했습니다. 가족과 모든 소유를 다 건너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남았습니다. 왜 혼자 남았겠습니까? 만약을 기해 자기가 지금까지 번 모든 재산과 심지어 자식과 아내까지도 건너게 하였지만 만약의 경우 자기라도 살아남기 위한 묘책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적나라한 모습이며 이것이 야곱의 실존이었습니다. 인간은 재산으로 어떤 것으로 옷을 입을 때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이 몬든 것을 의존하였을 때 자신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위기를 당해 이 모든 것이 나와 분리될 때 자신의 처참한 모습이 바로 야곱입니다. 야곱은 홀로 얍복강에서 떨고 있습니다. 근대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인간 실존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야곱과 씨름을 걸어 밤새도록 그와 씨름했습니다. 날이 새도록 씨름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25) 했습니다. 그 사람이 야곱에게 완전히 진 것이 아니라 씨름에는 졌지만 결국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골절시켜버렸습니다. 관절이 어긋나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설수가 없고 걸을 수도 없습니다. 몸 전체가 여기에 무게를 두는데 그 관절이 골절되었으니 문제가 큰 것입니다. 인생 전체가 부서진 것입니다. 그는 야곱에게 이제 떠나겠다고 합니다. 그 사람에게 맞았으면 분이 나야 하는데 야곱의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그 사람을 알아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 하겠나이다”(26)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27). 그 사람이 야곱에게 자기 이름을 왜 묻습니까? 자기 존재를 돌아보도록 하신 것입니다. 네 존재가 어떤 존재냐? 너의 실존이 무어냐? 너는 어떤 사람으로 사느냐? 지금까지 너는 무엇을 위해 살았고 무엇을 하며 살았고 너는 어떤 존재로 인생을 살고 있느냐? 너라는 존재는 과연 어떤 존재냐?는 근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 ”야곱이니이다“(27) 그 때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일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18). 야곱은 다투어 사람들을 이기고 심지어 하나님 사자까지 이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인생관은 바로 현대인과 같은 인간성을 말하며 현대인과 같이 하나님을 이겨버리고 자신을 믿고 사는 그런 인생이었음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계를 만나게 될 때 두려움을 해결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나시는 하나님입니다. 씨름한다는 말은 Encounter입니다. 그냥 대면해서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말로 의견을 대립하고 서로 말로 대결하고 논쟁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관념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대결하고 논쟁하고 다투기도 하는 그런 만남을 말합니다. 그것이 진짜 만남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매일 대면합니다. 그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잘 모릅니다. 그냥 만나서 인사나 하고 지내면 10년을 만나도 그 사람을 모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그 사람과 논쟁을 합니다. 시비를 걸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러면 아 저 사람이 이런 면도 있구나 하고 그 사람의 실체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다툼이 필요합니다. 그런 다툼이 없으면 그 사람의 진면목을 모릅니다. 하나님도 내가 부족해서 모르기 때문이지만 하나님 왜 이런 일을 이렇게 말씀합니까? 왜 하나님은 안 믿는 자들이 믿는 자들보다 재산도 많고 오래 살고 건강하게 삽니까? 하고 물어도 보고 해결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씨어리어스하게 대면하는 것이 만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만남을 갖고 우리 인생 문제를 그냥 지나치지 말고 씨어리어스하게 논쟁하고 하나님이 옳은데 왜 옳은가를 확실하게 알고 믿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서에는 하나님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변론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씨름하는 것이 만남입니다. 그런 인생은 그럭저럭 신앙 생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씨어리어스하게 만난 사람은 인생을 깊이 고민하고 찾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믿음도 더 확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만남을 원하시고 우리와 씨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인생 문제를 잘 아시는 하나님이 진실한 마음으로 아주 진지하고 솔직하게 인생 문제를 해결하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3. 이스라엘로 바꾸시는 하나님
이런 만남은 바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만남입니다. 나의 실존을 내가 인식하라는 말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네 인생은 어떤 인생이냐? 너는 무슨 목적을 가지고 무슨 이유로 사느냐? 아무렇게나 인생 살면서 아무 뜻도 없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고생의 바다에 던져졌으니 사는 이유도 없이 사는 것이냐? 네 인생이 지금은 어디로 가느냐고 질문합니다. 네 실존을 묻습니다. 왜냐면 내가 솔직하게 인식하는데서 진정한 신앙이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환도뼈를 골절하게 만든 하나님의 사자는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십니다. 하나님과 계속해서 씨름하고 하나님과 의견을 나누고 인생을 살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논쟁하면서 살라는 이름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솔직하게 자신과 싸워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며 순종하고 살라는 이름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아마도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론이 정립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산헤드린 회원이며 이스라엘의 학자로 알려진 니고데모에게 말씀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칭찬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할 수 없음이니이다”(요한 3:2).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는 것이 너무도 신기해서 저런 이적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며 예수님을 칭찬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들 볼 수 없느니라”(3) 중생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기적이 참 놀랍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요 주인이란 점이 보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의 장차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심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중생하지 아니하고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4). 이스라엘의 대 학자가 중생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이 없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놀라운 중생에 대한 아무런 깨달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니고데모에게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 이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중생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왜냐면 중생은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하시는 첫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우리를 중생시켜 우리에게 믿음을 갖게 하시고 그 믿음으로 의로운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오셨기 때문에 기적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 존재의 변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음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미국 독립 직전에 일어난 대각성 운둥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왜냐면 미국 건국이 바로 대각성 운동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단 에드와드는 바로 중생의 싸인으로 진정한 회개의 경험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강력한 은혜이기 때문에 이 중생의 경험이 없이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그냥 자기 의지로 믿고 믿고 싶으면 믿고 안 믿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는 미지근한 신앙을 갖고 살기를 원치 아니합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진정한 회개 가슴 치는 회개를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중생의 체험을 갖게 하셔서 새로운 신앙의 삶을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중생의 체험이 없이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중생의 체험을 강조합니다. 우리 PCA는 목사 시험 때 꼭 중생의 체험을 말하라고 합니다. 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신학교를 나왔어도 목사 안수 줄 수 없습니다. 왜냐면 성령께서는 택한 사람을 정한 시기에 교회 예배나 삶을 중요한 시점에서 말씀을 부딪치게 하시고 그를 변하시켜 새로운 출발을 하도록 이름을 바꾸어주시기 때문에 중생이 없이는 하나님의 선택도 없고 하나님의 선택 없이는 진정한 크리스챤이 될 수 없기 때문이며 이 중생을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구원신앙을 심어주고 우리가 의로운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새 출발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중생하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내가 중생한 확실한 증거는 내 속에 있는 분명한 신앙 곧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 나의 구원자 하나님이심을 확실하게 믿는 믿음입니다. 생각으로 동의만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변화된 나의 솔직한 확신입니다. 예수님은 중생을 모르는 니고데모에게 성령께서 바람과 같이 역사하셔서 이름을 바꾸어 주듯 중생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중생이 신앙생활하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새로 빚으신 새사람이 되어 믿음으로 출발하게 된 삶을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믿음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신자는 이 믿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인정을 받고 그 믿음을 실 생활에 적용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적용 신앙이 성장하게 되고 성화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지막 영광을 바라보며 구원의 삶을 삽니다.
結 論
선택한 사람이 아직 확실한 믿음 없이도 하나님과 약속을 하면 우리를 보호하시고 변화될 때까지 기르십니다. 야곱은 조상 때부터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언약하신 조부와 부친의 생애를 돌보셨습니다. 아직은 이기적 신앙이었지만 그와 언약하고 야곱은 잊어버리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충실하게 이행하셨습니다.
중생해야 합니다. 확실한 중생의 체험이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확실하지 않으면 한 번은 중생의 놀라운 살아있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라와 만남을 원하십니다. 중생한 삶에서도 계속해서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참 감사한 것은 성령께서 내 안에 안주하셔서 나와 함께 동행하시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의 내면에 성령님은 항상 내주하십니다. 그래서 중생한 사람은 걸어 다니는 성전입니다.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중생한 기독교인이 성전입니다. 저들이 모이면 그것이 성전 곧 교회가 되고 그런 사람은 영광의 찬송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영광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나를 온전히 사로잡고 나를 지배하는 성령 충만의 삶, 곧 이름이 바꾸어진 중생한 삶을 충실하게 살아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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