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자유를 주신 예수님 (2020년 8월 16일 주일예배 설교) > 설교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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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자유를 주신 예수님 (2020년 8월 16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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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명길목사
댓글 0건 조회 2,858회 작성일 20-10-22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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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自由를 주신 예수님


2020년 8월 16일 주일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갈라디아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이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1).


     한국의 전광훈 목사님이 코로나 덫에 걸려 국민 저항 위기에 처했습니다. 코로나로 정권 잡고 코로나로 국민을 억압하고 자유를 박탈하는 악마의 궤계를 물리쳐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자유 대한민국이 지금 독재정권의 무기가 되어버린 현상을 보면서 권력에 필요하면 무슨 일이든 하는 좌파 세력들이 이제는 기필코 한국을 저들의 손아귀에 넣고 국민을 못살게 굴 전망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지켜주시고 국민이 자유를 지켜 다시 종의 멍에를 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저들이 헌법을 뜯어고치고 자유 대한민국을 전체주의로 끌고 갈려는 의도가 한층 더 두드러지게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8.15. 경축식 때 정권의 붙어서 단물을 빨아먹고 있는 광복회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다시 국군묘지에서 친일파를 파내자고 하는 말을 해서 다시 한 번 한국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정말 돌아갈 수 없는 대한민국의 사회주의 노예화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니다.

     사실 자유라는 말은 청교도들이 미국에 건너와 지독한 성공회로부터의 종교적 억압을 받고 새로운 나라 건립을 꿈꾸며 저들의 독립선언에 명기한 내용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좌파 정권이 만들려는 헌법은 민주주의 앞에 붙은 자유라는 말을 삭제하려고 합니다. 사실상 저들은 이미 신 막스주의자들의 언어 뒤집기를 통해 민주주의를 저들의 민주주의로 바꾸었습니다. 북한같은 전체주의 나라가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라는 그럴듯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입니다.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다시 전체주의 권력에 눈 먼 떼거리 무식자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자유란 무엇입니까? 특히 성경에서 자유란 말을 참 많이 사용합니다. 특히 메시야의 구원 사역을 내다보며 구약의 선지자들이 줄곧 사용했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구원 사역을 자유 선포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는 구원을 말하며 성경은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하여 주님의 구원이 성취되었고 성경의 모습은 어쩌면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자유를 주기 위하여 피로 이루신 놀라운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자유란 내 마음대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무엇이나 내 마음대로 하면 내 자유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자유가 침해를 당합니다. 특별히 죄악으로 가득한 인간은 자유를 무한정으로 누리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법도를 벗어나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독생자까지 죽이신 하나님을 반역하고 배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를 누리되 어느 정도 누려야 하는 것인가를 성경이 참 자유를 말씀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남의 차유를 침범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참 자유는 어떤 것입니까? 참 쉽지 않는 주제입니다. 오늘은 성경이 가르치는 자유는 어떤 것이며 우리가 참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유념해야 하는가를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外部抑壓에서의 自由

     참 자유는 외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인간이 창죄된 후 범죄로 실낙원해서 살아가면서 죄인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아야 할 필요성 때문에 함께 사는 사회를 구성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내 자유가 남의 자유를 침범하거나 손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내 지유를 위해 힘 샌 사람이 약한 사람을 강탈하고 노예 삼고 부려먹고 그가 소유한 것들을 약탈하여 자기 것으로 삼는 이런 범죄들이 가득한 사회가 되기 때문에 결국 인간들은 이를 규제하는 강력한 통치 체제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정부를 만들고 결국 왕 제도를 만들어 왕의 통치를 받는 왕국들을 건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왕도 역시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영화를 위해 그리고 남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제도를 만들고 완전한 통치를 위해 권력을 유지하고 강력하게 권력으로 질서를 잡기 위해서 군사를 만들어 국민을 보호하고 자기 권력을 지속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인간을 통제하기 위하여 자유를 침범하고 같이 살기 위한 질서 유지를 위해 법을 만들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심지어 억압하는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초창기 부족 국가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인간이 인간을 다스리니 자연 자기들의 권력 확장을 위하여 생명을 죽이고 점령하고 포로로 잡아다가 노예로 부려서 정복자들의 영화를 누리는 싸움을 계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근대 국가가 탄생하기 전에 사실상 민주주의가 도입되기 전에는 세상은 온통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고 권력자 소수를 위하여 대다수가 노예처럼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 인류 역사입니다. 인류 역사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이며 수많은 생명을 잃고 전쟁에 진 백성은 노예가 되어 끌려가 짐승처럼 살아가던 세상이 불과 100년 전만 해도 편만했던 세상이었습니다. 이런 세계에 기독교는 유일한 평민들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럼 정의로운 국가가 국가 질서를 유지하는 법을 만들면서 어느 정도의 자유를 허락하고 남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고 최소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어떤 자유일까요? 우리가 함께 살면서 내 마음대로 아무 엇이나 할 수 없는 세상인데 어느 정도의 자유가 정말 우리 개인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자유일까요?

     먼저 자유를 논하려면 인간 개인이 가진 권리라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자유란 자기 권리를 보장 받고 행사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남의 권리를 침범하지 않고 내 권리를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입니다.

     지난 달 미 국무장관 폼페이오는 양도불가 권리 위원회를 만들어 인권 보고서 초안을 작성 이를 공4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공산당 중국을 보니 좌파들이 인권을 억압하고 자유를 빼앗아가면서 저들이 인권을 말하고 저들이 민주주의를 말하고 공산당 정권이 민주주의보다 우선하다는 주장을 하며 지금 세상을 다시 점령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대 중국 강경 노선을 선언하면서 이에 강력한 대항을 위해 처음 민주주의 정부를 세웠던 1776년 미국 독립의 영웅들이 초안하고 생각했던 자유 개념을 다시 찾자고 한 사실입니다. 그들이 주장한 자유가 무엇이며 그들이 주장한 인권이 무엇인가를 다시 인식하여 우리의 잘못된 인권이란 잣대를 다시 원상태로 돌이키자고 하는 의도에서입니다. 앞으로 이 보고서가 채택되면 미국은 외국의 인권, 자유, 민주주의, 이런 말들이 얼마나 많이 왜곡되고 국민들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는지 공격하고 그 잣대에 따라 국가를 선악을 규정하도록 하는 외교 혁명을 일으키는 작업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럼 초창기 청교도들이 미국 정부를 세우고 독립 선언문을 만들고 헌법을 기초한 천부적 기본권 양도불가한 인권과 자유는 무엇일가요? 미 헌법은 이런 인권을 하나님이 우리 개인에게 주셔서 천부적 인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누구도 우리 개인 개인이 가진 천부적 인권을 침해할 수 없고 국가도 이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독립선언문 초안자들은 3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생경과 자유와 행복 추구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기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권리,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를 주셨기에 이는 정부가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인권이기 때문에 정부가 제한할 수 없는 기본권입니다. 여기에 들어간 자유가 기본 자유입니다. 이에 성경에서 기본권으로 주신 것이 소유권이며 언론권입니다. 양심의 자유입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합니다. 물론 소유는 내가 남의 것을 빼앗아 누리는 그런 자유가 아니라 내 것을 내가 열심히 벌어서 정당한 방법으로 벌은 돈을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왜냐면 모든 물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것을 하나님이 정당한 방법으로 내가 주신 권한으로 열심히 일해서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소유권을 주셨기에 거주권이 천부적입니다. 내가 사는 내 집은 내 소유이며 내가 활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법을 어기고 남을 해치지는 자유가 아니라 법이 정하는 대로 내가 자유롭게 활동하고 나의 직업을 가지고 일하고 내가 벌어서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본권입니다. 이것을 정부가 마음대로 제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부가 정부를 유지하고 질서를 위해 경찰과 군인을 고용 월급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 혜택을 받는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세금을 권력자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선출해서 뽑은 국회가 필요한 곳에 쓸 만큼만 세금으로 거둘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임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각자 개인이 적당한 방법으로 자기 소유로 삼아 자유롭게 사용하는 권리를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심지어 하나님을 위하여 필요한 성전 유지를 위한 헌금도 개인의 자유 의지에 의해서 정하도록 한 것입니다. 특별히 구약과 같이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들이 짐승을 잡아 제사 드린 성전 시대에도 이에 봉사하는 레위 족속을 위해 십일조를 드리도록 하고 제물을 위하여 또 가난한 자를 위하여 3년마다 십일조를 드리도록 했지만 예수님은 제도적인 것을 허물고 우리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 그 기준 이상으로 헌신하는 마음으로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사이 십일조가 구약인데 그대로 지키느냐 마느냐 논란인데 예수님 분부는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헌신하는 마음이 첫째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십의 삼조를 드린 구약 시대 규정보다 우리의 자발적 의지를 더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자유함을 가져야 합니다. 자유 의지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내 생명을 드리는 자세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것을 하나님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국가도 무조건 세금을 올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말하는 자유도 그렇습니다. 말은 남을 무시하거나 남을 욕하거나 남의 인권을 침해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의로운 말을 양심에 따라 할 수 있는 자유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언론의 자유가 있고 국가는 그것을 해쳐서는 안 됩니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 선택권입니다. 성경은 사도들을 투표로서 선택했습니다. 위에서 임명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를 투표로 뽑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보이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이 누가 목사가 되고 누가 장로가 되라고 편지를 보내주거나 말로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하며 하나님이 정한 사람은 예수 믿는 구원 받은 성도들이 자기 양심에 따라 투표하여 뽑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투표할 수 있는 양심의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없는 민주주의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의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왜냐면 민주 시민이 되어야 민주주의가 될 수 있고 자유란 하나님이 주신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하면서 남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남을 돕고 사랑하고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인간 기본 자질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기본이며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입니다. 기독교 정신이 바로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유를 지키는 것, 천부적 양도불가 권리와 자유를 이론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도 성경적 원리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는 기독교를 기반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오실 메시야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사야 61:1-3에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의 의의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자기가 하는 구원 사역을 이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합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누가복음 4:21) 다시 말해서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고 구원 사역은 바로 이 사역을 위한 것이며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자유를 주시려고 오신 메시야가 오늘 여러분이 보는 메시야 예수님 자신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시려고 오신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 외부로부터의 속박이 없는 나라입니다. 나를 다시 종으로 만드는 외부 세력이 없는 정의의 사회 행복의 사회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시는 나라가 그런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를 우리는 지상에서 건설하려고 노력하다 예수 재림으로 완성되는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2. 內部抑壓에서의 自由

    그런데 외부의 압박에서 자기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자유 뿐만 아니라 사실은 내부의 압박에서 자유로운 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인간은 생각하고 추리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보이는 세상보다 훨씬 더 안 보이는 정신적 세계가 있습니다. 특히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외부의 속박도 있지만 내부의 속박이 어쩌면 진짜로 큽니다. 사실상 우리는 내부의 압박에서 해방되어야 진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인간 내부에서 스스로를 얽어매는 속박이 무엇입니까? 자기 정체성 정립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갖는 열등의식입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왜 태어났는지 자기 인생 목적이 무엇인지 정립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을 항상 남과 비교하며 열등의식을 갖고 삽니다. 나는 왜 부모가 가난했는가? 나는 왜 미국에서 태어나지 한국에서 태어났는가? 나는 왜 이런 님편을 만났는가? 왜 나는 옆 사람보다 못났는가? 비교하며 자신에 대한 열등의식으로 좌절김 폐배감 절망감으로 삽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항상 자포자기하고 자기 자신에게 갇혀 삽니다. 그래서 어두운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 믿고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를 희생하시고 나를 그리스도를 지불하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벗어나야만 진짜 자유로운 사람이 되며 하나님께서 주신 탈란트를 마음껏 누릴 수 있고 창조적 능력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의 확신을 잘 설명합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된 것이고 성령의 역사로 된 은혜임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인생 목표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당당하고 자기 할 일이 있고 소명감이 있어 흔들리지 않고 인생을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를 짓누르는 것은 요사이 말하는 스트레스란 말입니다. 사실 누가 강제하는 것도 아니며 생각해보면 내가 결정하면 되는 것을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물론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의무를 가집니다. 부모는 돈을 벌어서 자녀들을 먹여 살려야 하고 내가 직장을 가면 직장이 요구하는 것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 능력이 부족할 때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항상 걱정하고 근심합니다. 건정 근심이 나를 짓누릅니다. 그 스트레스가 심장병이 되고 당뇨가 되고 잠을 못 자게 합니다. 나를 짓누르는 스트레스는 현대인에게는 더 많은 것입니다. 외부적인 요인도 있지만 대부분이 걱정과 근심을 하는 나 자신이 받는 중압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들의 꽃을 보고 공중 나는 새를 보라고 했습니다. 바보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생의 가치는 새보다 하루 예쁘게 피었다 시드는 꽃보다는 낫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걱정은 필요 이상의 걱정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런 스트레스 역시 하나님의 전능을 믿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어떤 것은 물론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생명 바쳐 피 흘리게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엇이 아까워서 우리를 버리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생각하고 기도하고 하나님 의지하면 스트레스는 사라지게 됩니다. 방법을 찾으면 가능한 길이 있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죽을 만큼 절망적인 것은 없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 없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사람들은 자포자기로 술이나 먹고 더 나쁜 유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트레스 해소하려 하기 때문에 선진국에서조차 마약이 끊이지 않습니다. 마약보다 강한 복음으로 스트레스를 해결해야 합니다.

     세 번째 나를 짓누르는 것은 죄입니다. 죄라는 것이 얼마나 나의 육체적 욕망이 소원하는지 모릅니다. 특별히 쾌락입니다. 인간은 한 번 죄에 빠지면 빠져나오기가 참 힘듭니다. 대표적인 것이 성적 쾌락입니다. 그래서 여기 한 번 빠지면 가정이 파괴되어도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성경을 버리고 자기 욕망대로 살도록 법을 만들고 그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쾌락에서 빠져나오기가 참 힘듭니다. 마약이 그렇고 도박이 그렇습니다. 을마나 많은 인류가 마약 때문에 고생합니까? 잠깐의 고통을 잊으려고 시작한 마약이 평생 자기를 얽어 매 자유를 박탈합니다.

또한 죄는 범하고 나면 죄의식이 생깁니다. 그 죄의식은 자신을 정말로 얽어맵니다. 어릴 때 부모의 핍박을 받고 부모 없이 자란 아이들이 친척 집에 얹여 살면서 받는 원한 이런 것들이 자신을 얽어맵니다. 이 속박은 평생 자신의 심리적 병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용서가 필요합니다. 죄의식이 너무 무섭고 벗어나기 어려운 속박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 피를 흘려 우리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예수 안 맏는 죄 외에는 어떤 죄도 회개하면 사해주십니다. 죄의식은 이 용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원한으로 인생을 살기 때문에 얼굴 빛이 밝지 않습니다. 평생 자기만이 무겁게 느끼는 질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를 확신하고 그 용서로 남을 용서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죄의식에서 해방되도록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하셨고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내부의 죄는 진짜 우리에게 참 자유를 줍니다. 그 자유는 구원받고 용서 받은 기독교인만이 누릴 수 있는 참 자유입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이를 주지 못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배척하는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믿지만 그 유대주의 때문에 이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머슬림도 없습니다. 불교는 잊으라고 하지만 잊을 수 없는 것이 인간 구조입니다. 그래서 용서를 믿고 내게 죄지은 남을 용서하는 것이 죄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3. 眞理 안의 自由

     예수님은 자유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8:32에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너무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참된 자유는 진리를 알아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면 자유롭습니다. 모르면 답답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근심 걱정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마음을 옭아맵니다. 예수님은 참된 것을 알도록 공부하고 지식을 쌓으면 훨씬 더 자유롭습니다. 우리보다 법에 대해서 변호사들은 자유롭습니다. 그들은 법을 알기 때문에 자유롭게 법의 태두리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성경 지식을 알면 훨씬 더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습니다. 이것을 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 이것이 하나님 뜻인지 아닌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 뜻인지 잘 모르는 것은 성경을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람 이름은 안 나오지만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지 잘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꿈에 하라고 나타나서 말해주기를 바라면 나타나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하나님 뜻이지요? 하고 목사님에게 묻습니다. 목사님이 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면 목사님에게도 성경에서 원칙을 말하지 이름을 말하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알면 자유롭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하나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늘 공부해야 합니다. 때때로 잘 모르면 목사님에게 묻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목사님은 성경 원칙을 말해야지 자기 생각을 말하고 그것이 하나님 뜻으로 말하는 잘못을 버하지 말아야 하나님은 내 생각 속에서 스스로 하나님 뜻을 알도록 성경 말씀을 잘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모든 진리는 결국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잘 알면 훨씬 자유롭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은 이렇게 했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구원해주셨구나 알게 됩니다. 그래서 후에 예수님은 요한복음 8:36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그렇습니다. 참 자유는 예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정부가 참 자유를 주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왕이라도 내게 참 자유는 주지 못합니다. 부모가 목사라고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자유는 구세주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정부가 혹 탄압하더라도 참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참 자유의 길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시은 구원의 은혜를 받고 누리면 됩니다. 왜냐면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여 참 자유를 얻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자유는 정부가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얻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자유 진리의 자유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심지어 독재 정부 하에서도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만듭니다. 세상이 주는 자유가 아니라 내부의 압력에서 해방되는 자유 자신의 열등의식과 근심 걱정에서 해방되는 자유 몰라서 쩔쩔 매고 걱정하는 모든 것에서 참된 자유는 예수님의 구원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참 자유이고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갖는 특권이며 은혜입니다.

結   論

     오늘 우리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기본권을 누리기 위해서 어떤 정부도 개인을 속박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근대 국가는 이런 기독교 정신을 본 받아 자유 민주주의 정부를 세우고 국민을 억압하지 말아야 행복한 국가를 만들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 전체주의 사회주의 다 인간을 얽어맵니다. 잘못입니다. 그런 국가는 불행한 국가이며 잘못된 국가입니다. 대한민국도 미국도 자유 민주주의 나라로 국민을 행복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참된 자유는 내면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해 구원 받고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욕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죄는 나를 얽어매고 자기를 속박합니다. 자기 욕망에 사로 잡혀서 인생을 망치는 일이 많습니다. 자신에게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아는 것이 자유하는 길입니다. 진리를 알면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래서 책도 읽어야 하고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교양을 쌓아 역사도 알고 철학도 조금은 알고 교양을 쌓아야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를 아는 것이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치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창조주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진리에서 살며 그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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