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2020년 6월 23일 주일예배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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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2020년 8월 23일 주일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창세기 12:1-9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1-2).
노아 홍수 이후 인구가 급증하는 가운데 많은 부족 국가들이 생기고 부족국가들이 연합하여 제국의 모습들이 나타나며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들을 정복 이합 집산된 국가들이 연방 국가들처럼 한 제국으로 커가는 일들이 벌어지는 가운데 하나님은 다시는 물로 인간들의 죄 문제를 다스리지 않겠다는 보존 언약을 해 주셨습니다. 노아 이후 하나님은 창조한 천지 만물의 질서를 그대로 보존 유지하고 자연 질서를 지키겠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노아 홍수를 인간 스스로 이겨보겠다는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께서 언어를 흩으시므로 중단되었고 인간의 이런 높이 탑을 쌓는 경향은 지금까지도 인간의 기술을 자랑하는 측면에서 나라마다 다투어 짓고 있는 실정이며 이것이 인간의 기본 성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 구원을 계획하시고 한 민족을 이루어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와 그 법도를 가르쳐 지킴으로 선민으로서의 자격을 갖주고 그 가운데 메시야를 보내 그 민족의 정체와 문화를 바탕으로 복음을 전하여 세계 만민을 향한 구원사역을 계획하시고 이를 시작하십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아브람이라는 인물을 선택하시고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인간을 쓰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르심과의 과정이 있습니다. 부르심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기에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는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아브람 시대에는 때때로 음성으로 부르시기도 하였고 모세가 오경을 쓰고 다윗 나라가 건설된 이후로는 특별한 선지자나 선견자들을 통하여 부르시고 예수님이 오셔서는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주님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부르시기 때문에 신약 시대의 부르심은 글자도 아니고 누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혹 꿈이나 신비적인 방법도 있지만 대부분 성령님께서 내부에서 성경 말씀을 깨달음으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이 부르시는 특별한 방법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령님께서 선택된 우리 마음을 변화시킬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도록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내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함과 동시에 자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의 초기이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자세하게 자신의 신앙과 성경 말씀을 숙고하면 마음 속에서 성령님의 조명이 작용합니다. 말씀을 비추어 깨닫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다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다시 한번 자신의 부르심을 찾아야 하고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이후 특히 이방 사람으로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자기 부르심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럼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은 어떻게 어떤 처지에 있는 아브람을 부르셨습니까? 그리고 부름 받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제시하셨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어떻게 아브람을 관리하셨습니까?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살펴보십시다.
1. 아브람을 부르심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갈데아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와 함께 온 가족이 이민을 가다가 하란에 머무는 동안 부친 상을 당한 아브람의 가정 형편을 볼 수 있는 짤막한 글에서부터 시작한다. 12장 앞에 있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이민 가고 있는 중에 갑자기 아버지가 세상들 떠남으로 가족의 책임을 져야 하는 돈 없는 방랑자 아브람을 소개하는 것이다.
또한 후에 이름을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이란 사람의 이름도 중요하다고 본다. 아브람이란 말은 많은 자의 아버지란 뜻이다. 아마도 가족이 많아서 쓰인 이름일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장자인 아브람에게 모든 짐이 지어졌을 것이다. 그런 족장이란 뜻이 그의 이름이다. 족장의 책임도 중요하고 가장의 책임도 중요하다. 그런 이름을 무시하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은 족장을 불러서 아브라함 열국의 아버지가 되게 하셨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부름 받을 때 아브람의 형편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인물도 아니고 당장 하나님을 따라 나설만한 그런 형편도 아니라는 말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아브람은 지금 이민자다. 자기 땅도 없고 집안 먹여살릴 수 있는 일자리 찾기도 어려운 그런 형편의 방랑자나 다름 없다. 어느 한 구석을 보아도 그가 하나님의 일을 맡아 할만한 일꾼도 아니고 그럴 형편도 아니다. 이민 가는 집안의 책임자가 쉽게 떠난다는 것은 말이 아니다. 더구나 누가 밥 먹여 살리는가 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 우리가 사명을 회피할 때 가정 사정을 이야기한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사명을 더 깊이 생각하면 내가 떠나면 하나님이 그 가정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별로 믿지 못한다. 하나님은 그래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신다. 그 말속에 숨어있는 말씀은 네가 떠나도 네 가족은 내가 먹여 살릴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우리는 항상 같이 들어야 한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려 할 때 얼른 말하기가 곤란한 경우를 보게 된다. 왜냐면 그 집 형편을 보면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사람은 이런 사정 때문에 어렵고 저런 사람은 저런 환경이니 어렵고 그러다 보면 참 일할 사람이 얼마나 부족한지 모른다. 사실상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밥벌이를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충분히 밥벌이 하면서 하나님 일을 할 수 있는데도 우리는 망설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편하고 일이 없는 사람들을 불러 쓰시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할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부르신다. 아브람이 그랬다. 다시 말해서 부르심의 상황을 모르시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고 부르시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아브람 자신도 별로 인간적으로 훌륭한 점이 많아서 부르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후의 그가 당한 어려움을 처리하는 과정을 볼 때 이를 증명한다. 먹고 살기 힘드니 애급으로 약속을 땅을 기도 한 번 없이 떠나는 것이라든지 자기 부인 사라의 아름다움 때문에 바로 왕에게 대하신 처신이라든지 그에게는 너무도 인간적 약점이 많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택하셨다. 무슨 인간적 조건을 보고 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변화된 이후의 모습을 연상하시면서 아브람을 부르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아브라함이 될 수 있는 자질을 충분히 고려해서 부르셨다고 확신한다. 순종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께 솔직한 면이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가 마지막 시험을 받을 때 독자 이삭을 바치라 했더니 순종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음을 하나님은 아셨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장점 때문에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부족하나 하나님이 그 나라 건설에 쓸 만한 일꾼을 부르시는 것이다. 생각의 범위를 넓혀 인생을 넓은광장에서 살 만한 사람, 그를 통해 인류 전체에 이익을 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믿음으로 의를 여김받을만한 사람 아니 하나님이 은혜주실만한 사람을 골라 하나님은 부르시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구원받은 그 자체가 은혜인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성경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다. 아무 조건 없이 선택하신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 건설에 사용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나라 건설을 경험하도록 하신 것이다. 마귀의 세상에 하나님 나라 건설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하나님 말씀이 진리기 때문에 생명을 바쳐 그 나라와 의룰 구하는데 일생을 바칠 사람을 부르셔서 구원하신 것이다. 그런 사람을 변화시켜 근본을 바꾸고 말씀을 통해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는 과정이 교회 생활이다. 그래서 교회는 부름 받은 사람들의 집단이다. 세상 집단이 아니라 부름 받은 사람들의 집단이 교회다. 그래서 교회는 사명자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지 자기 문제 해결이나 받고 위로나 받게 하려고 만든 집단이 아니라. 부름 받아 사명 감당하면 이런 개인적인 면은 스스로 다 해결될 수 있는 것이며 못할 땐 성령께서 지혜도 주시고 필요한 것을 제공 해결하게 하신다. 문제는 사명이다. 부르심의 목적이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아브람은 즉시 부르심에 응답하고 이민 보따리를 싸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였고 하나님은 이 때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 하셨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순종을 이렇게 묘사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며 동일한 약속을 유어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히브리서 11:8-9) 순종은 갈 바를 모르는 경험 속에서 이루어지며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 진짜 부름 받은 사람이며 소명의 사람입니다.
2. 약속의 소망 주심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는 반드시 그가 할 일과 목표를 제시하신다. 물론 구체적인 것은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발견하게 되고 구체적으로 그 일에 봉사하게 하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부르실 때 함께 볼 수 있는 분명한 소망을 약속으로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실 때 약속을 주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은 포괄적인 넓은 의미의 소망을 주신다.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이루도록 자손을 주시겠다 하신다. 아직 아브람은 자기 친 자식이 없다. 조카를 책임 맡았을 뿐이다. 복을 주시는데 어떤 복이냐면 그 이름을 창대하게 하여 복 자체가 될 것이라 했다. 구 번역은 복의 근원이라는 말로 번역했다. 복 자체가 되어 복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포괄적 희망이다. 두 가지 의미가 다 함께 포함되었다. 자신이 복이 되어야 나누어주는 복이 실제적이 된다. 하나님은 말로만의 복이 아니라 실제로 한 인간이 복이 되어 지상에 사는 실제적 사람으로 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신다. 그리고 이런 복을 나누어주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다. 복이 스스로 되어 복을 세계 만민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을 만드시겠다는 약속이다.
이 약속을 보면 첫째 손이 잡히는 현재적 물질이나 신체적 풍요를 약속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주로 미래의 복을 약속하신다. 왜냐면 그 복을 이루기 전에 아브람이 몸소 경험하고 체험해야 할 하나님의 섭리와 도우심을 경험하며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떤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 분이지 인간에게 소유를 주어서 그 소유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사람을 만드시지 않는다. 그것을 쟁취하고 노력하고 일하게 하시고 고난도 당하게 하시면서 인생을 키우시며 그것을 달성하도록 생의 목표를 삼고 노력하는 사람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그래서 약속을 주시고 약속은 포괄적이고 미래적이며 내가 노력을 기울여서 얻어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는 그런 약속이며
둘째 믿음을 가져야 이룰 수 있는 미래의 약속이다. 이 문제는 다음 주일 설교에서 구체적으로 생각고자 한다. 하여간 믿음을 중요시하는 하나님은 약속을 믿고 노력하고 수 없는 반복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도우심을 경험하도록 하시면서 때대로 실망도 하고 좌절도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성장하도록 부르시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 구원의 확신과 함께 소명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게 하신 구원신앙이 기초가 되는 것이다. 나를 값없이 부르시고 은혜주신 믿음이 성령께서 선물로 주신 선택된 내게 주신 은혜라는 확신을 가지고 믿음을 생활화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믿음을 훈련하시는 것이다.
3. 시련으로 훈련하심
우리가 읽은 9절 말씀 다음에는 아브람에게 다가온 시련을 볼 수 있다. 이민 간 그 땅에 경제 대난이 온 것이다. 그 땅에 기근이 든 것이다. 아직 근대 산업은 꿈도 꿀 수 없는 농경 시대에 땅에 기근이 올 정도로 가뭄이 왔다면 자기 땅이 없는 이민자의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땅에 기근이 심하니 날의 집안일이나 해주면서 근근이 살아가야 하는 아브람, 부름 받았지만 하늘에서 물질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 부름 받은 아브람도 어쩔 수 없이 가난한 중에 가난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 먹고 사는 문제다. 우리 6.25. 사변 이후의 한국의 생활을 경험한 세대들은 가난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더구나 자기 것이 없는 이북에서 피난온 피난민들의 삶은 말로 할 수 없는 삶이었다. 우리는 영화 등을 통해 그 때 그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던 것인가를 잘 안다. 박정희 대통령이 부국강병책을 잘 실현해 이 정도의 산업화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 한국민은 누구나 인정해야 하고 인정하고 있다. 문제인 세력들만 이를 부정하지만 저들의 속셈이 뻔하기 때문에 좌파이고 생각이 잘못된 철면피라고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뽑아서 열국의 아비를 삼으시려는 아브람은 대단히 중요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사는 가나안 지경에 기근이 임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충분히 아브람은 보호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기근이 임해 선택된 아브람도 기근의 영향을 받아 굶주리고 허덕이는 삶을 살아가야 했다. 그래서 그는 잘 사는 애급으로 먹고 살기 위해 다시 이민을 가야 했다. 그래서 애급으로 내려갔다. 성경에는 기도 한마디 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어서 내려갔다 이렇게 묘사할 수도 있었는데 그 말이 없다. 우리가 궁색해지고 먹고 사는 문제가 갑자기 닥치면 이것부터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기도같은 것은 생락하고 마는 것이 우리 모습이다. 아브람도 그랬다.
그런데 그가 내려가서 형통한 것이 아니다. 기근을 주셔서 그 곳에 가셨으면 잘 살게 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증명하는 길이 아니겠늬가? 그렇지 않았다. 더 어려웠다. 어려움에 한 가지가 더 추가 되었다. 부인이 몹시 미인이었다는 점이다. 아브람이 75세였으니 사라는 65세였을 것이다. 65세 여인 아기 하나 낳지 않았으니 그렇게 미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아니면 아브람이 부지런해서 그냥 집에 머물로 공주처럼 대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바로 그점이 그렇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예날 임금은 하는 일이 부끄러운 것이 없다는 일치된 의식이 있었다. 그래서 군주는 자기가 원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그것을 트집 잡으면 정권을 유지하기 어렵고 정권이 흔들리면 자연적으로 통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금은 무치였다.
이런 맥락에서 나이 듬직하지만 아직까지 미인인 아브람의 부인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애굽 민족하고 다르기 때문에 그 미가 더욱 덧보였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도 알지만 아프리카 흑인보다 서양인 여성들이 훨씬 예쁘게 보이는 것은 당연 지사가 아닌가? 아마 바로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자진해서 애굽에 이민 혼 아브람의 아내 하나 뺏는 것이 무슨 대수로운 일이었겠는가? 사실 이런 어려움이 있을 것을 대비해서 아브람은 사라와 약속까지 했었다. 가서 혹시 당신이 예쁘니까 잡아다가 나와 관계를 물으면 누이라고 하라. 사실 우리는 배다른 누이가 사실 아닌가? 그렇게 약속했었다. 그 때는 배다른 누이와 결혼하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국은 지금도 사촌끼리 결혼하는 것이 하나도 문제되지 않는다. 사실 약속대로 이행했고 바로는 하마터면 사라를 자기 후궁 삼아 아브람을 통해 계획하신 이스라엘 민족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뻔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급하게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려 하나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하지 않으셨다. 노아 때 같으면 물로 심판하셨을 죄인데 약속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친히 섭리를 통해 재앙을 막아주셨다.
자기 아내를 궁에 보낸 보상으로 바로는 아브람에게 필요한 이상의 물질을 주었고 그가 굶지 않고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고향에 돌아가서도 부를 누릴만한 재물을 준 것이다. 아브람이 그걸 바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실수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상 받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거부가 되었다. 아내를 팔아서 거부되고 아내를 누이라 속이라고 공모한 남편이었다. 요새 시대 여자 같으면 이런 남자는 금방 버리고 떠나버릴 수준의 인간이었다. 어떻게 여자를 이용해서 자기 목숨이나 보존하고자 하는 이기적 남편을 남편으로 삼고 살 수 있겠는가? 이런 아브람은 후에 다시 한 번 가나안 땅에서 실수를 반복한다. 참 한심한 남자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연단하여 믿음의 사람 되도록 훈련하시는 것이다. 그의 눈이 자기라는 태두리를 떠나 가정을 그리고 가정이라는 태두리를 벗어나 민족을 후손을 그리고 세계 열방을 바라보며 생각이 넓혀지고 열국을 품고 자기의 활동 무대를 삼아 일어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연단하시는 것이다. 인간을 훈련하시는 도구가 바로 때때로 임하는 시련이며 어려움이고 특별히 경제적 어려움과 어두운 사회의 침탈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부름받은 선택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한 사람들을 같은 방법으로 연단하신다. 말씀은 시련이 없이는 결코 확증될 수 없다. 하나님은 시련 가운데 계시지 풍부 속에 머무르지 아니하신다. 시련 속에서 인생 훈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중국을 떠나 알버커키에 왔을 때는 조금 쉬고 싶은 마음에서 왔다. 그래서 감리교회를 출석하며 모든 것을 내려 놓고 그냥 세월보내며 살고 싶었다. 그런데 그 뜻 대로 쉴 수가 없었다. 여기도 내 목숨 살아 있는 동안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반듯한 장로교 하나 없는 황무지에 반듯한 장로교 하나 세우고자 마음 먹고 시작했다.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 동안 선교지에서 경험했던 것이 발판이 되었지만 여기는 여기대로 또 다른 영역의 훈련이 필요했다. 그래서 노인회아 나가기 때문에 노인 몇 분을 모시고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 동안 대학생들을 주로 상대했던 터라 아마도 성경 공부가 대학 정도의 지식을 요구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여간 6개월 거의 정성을 드렸던 몇 분 안 되는 노인들이 교회를 시작하겠다고 선포하니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떠나버렸다. 전에 교회 시작한 목사라는 분이 신도들에게 돈을 꾸어 갚자 않으므로 많은 피해를 주었는데 목사가 교인들에게 돈을 꿀 수 있으면 대단히 말을 잘하고 설교를 바로하면 전도를 효과있게 할 분임이 틀림 없는데 그만 교인들 돈주머니로 착각하고 목회했으니 후배 목사들이 설 자리가 없는 곳이 알버커키였다. 한적한 외진 작은 도시이기 때문에 사이비 목사들이 와서 함부로 목사를 팔아먹은 후유증이 심한 도시가 바로 여기였다.
그래서 급하게 방향을 바꾸어 각 상점들을 돌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시작해다. 상점 한 곳을 찾아 그 곳을 중심으로 교회를 중단하거나 떠도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과 함께 작년 7월 첫주부터 교회 이름을 정하고 정관을 만들고 정식으로 계약을 하고 주정부로부터 허락을 받고 미국장로교단에 가입도 하고 교단 소속 미조직교회를 시작한 것이다. 백권사님도 오시고 감순옥 집사님도 생각지도 않았는데 오시고 해서 교회가 시작되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런데 감순옥 집사님과 동시에 오태원 집사님이 다리를 다치시고 길거리에서 불량배에게 맞아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발생했다. 연말 일이다. 연말을 당해 예배드리는 교회가 비워달라는 통고를 받았다. 갈 곳도 없고 작은 수에 두 분이 교회 나올 수 없게 되며 그 동안 열심을 품고 동참할 줄 알았는데 피아니스트 한 가정을 빼고 한국에 가기도 하고 집을 판다고 교회를 불참하고 그런 가운데 두 분이 입원하니 예배를 계속할 수도 없었고 교회를 비워달라는 랜드로드의 요청 때문에 1월 첫주부터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래서 이 무렵 미쉬간에서 오신 이민순 목사님이 온 갈릴리 장로교회와 연합을 목적으로 시도했으나 그 교회도 우리 교인들도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갈 곳도 없는 목사 부부만 우선 참석하여 정을 들인 후 계속해서 교인을 설득하고자 하는 마음을 1월 첫주부터 출석하게 된 것이다. 매년 연례 행사로 중국에 2번 가야하는 처지에 1월 말 중국으로 출발했다. 출발할 즈음에 중국발 코로나가 한국에 전파되어 정부의 입국문 통제를 정치적 이유로 못한 체 열어 놓은 것이 결정적 실수였다. 그래서 한국이 먼저 코로나 전파지로서 세계에 우슴거리가 된 것이다. 이런 찰라에 중국을 가서 사정이 급히 돌아가 국무부에서 중국에 간 사람은 14일의 잠복기간 고립을 의무하했기에 태국으로 급히 녀래가 15밀을 기하고 엘에이를 거쳐 검사를 받으며 무균자로 집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신 있게 수요일 어버이회에 참석했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가지 형편으로 어버이회와 한글학교 운영 재정적 압박을 받던 한인 교회가 이 책임을 벗을 희생양을 찾고 있을 때에 중국 방문을 공개하고 출발했던 터라 그 곳에 참석하여 태국의 쿼랜틴 기간을 지나 입국 제게는 문제가 없다는 말을 했음에도 이를 이용 한글학교 문을 A고 학부형들에게 구체적인 설명을 빼버리고 이명길 목사를 희생양 삼아 학교문을 닫고 재정을 아끼는 일을 시행하며 목사 뒤통수를 쳐 전혀 상관 없는 감리교 권사가 목사에 대해 욕을 하고 다니던 목사보다 나이도 목사보다 아래고 사실도 물어보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던 장로가 목사 욕을 해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생명 바쳐 하나님 일을 한다고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단편적으로 일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갈 교회도 길이 막히고 한인회도 더 이상 모이지 않으니 시작했던 교회를 다시 문을 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3월 첫주부터사택 지하실에서 소수가 모여 예배를 시작했다. 하나님은 이런 시력을 나에게도 주신 것이다. 그래서 많은 것을 배우고 왜 좌파가 미국 동성애와 결탁하게 되고 좌파 운동이 교회를 점령하게 되었는지 책을 읽으며 연구하는 가운데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지금 그런 내용을 칼럼을 통해 글을 써서 일반 교인들에게 알리고 있다. 이제 인터넷이 완성되고 유투브가 완성되면 이 모든 일들을 “새 이스라엘” 월간 잡지와 유투브 페이스북 등을 통해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한 가지 일을 그냥 무작정 하도록 두지 아니하시고 참을 수 없는 시련을 통해 일하심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경험은 선교지에서 이미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지역의 일을 위해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연단하신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시련을 받은 동안 참으로 마윽 착집하고 때로는 좌절되고 때로는 모욕감을 느끼고 때로는 왜 이러는가 어렵다면 포기하고 싶은 감정을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옳으시다는 확신을 몸소 체험하는 것은 소중한 자산이다.
結 論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르심을 알고 부르심에 따라 사는 생활은 때로 어렵기도 하고 적당히 믿지 내가 무엇이라고 그런 일을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열국의 아비가 되지 못하고 자기 영역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한 펴생 살다가 의미 없이 죽어가는 허무한 삶으로 종식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그렇게 중요한 삶을 아무렇게나 살다가 허무하게 보내라고 예수를 희생하여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한 것은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정말 아브라함 같은 열국의 아비 되게 하시려는 원대한 꿈과 포부가 계셨다는 것을 의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확신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내 인생이 걸린 문제입니다.
나 한 사람이 이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은 가족을 책임져 주시고 자녀들을 잘 양육해주셨으며 개천에서 용이 되는 인생을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목사를 가난에 처하여 죽도록 고생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가난에 처했으나 부하게 하셨고 하나님은 나를 복으로 삼으셔서 내 인생을 즐겁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여기 참여한 모든 분들에게도 동일한 축복으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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