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하나님 (2020년 8월 30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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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의(義)로 여기시는 하나님
2020년 8월 30일 주일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창세기 15:1-7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니라.(15:6-7)
선한 행동은 전통 사회일수록 인간의 최고의 덕목이요 최고의 교양으로 삼는다. 인간이 함께 공동생활 하면서 다른 사람과 경쟁하며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며 남을 해치고 상하게 하고 약탈하고 남의 것을 탐내어 도둑질도 하며 심지어 정복하고 그를 노예 삼아 짐승처럼 부려먹고 사는 세상에서 남에게 선을 행하며 자신이 손해를 보거나 희생을 당하는 선행은 최고의 덕목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선행을 많은 종교나 윤리 도덕의 최고봉이요 이선칭의(以善稱義)를 윤리 기준과 구원의 목적으로 삼는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악하지만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선한 것은 존경하고 선한 행동은 장려하고 선한 마음을 칭송하는 것은 어느 사회나 일반적 통념이다. 심지어 선행은 종교로 승화 선행을 모든 종교 활동의 목표로 삼고 심지어 구원 조건이 되기도 한다. 선행은 종교 뿐 아니라 윤리 도덕의 이상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모든 문화의 윤리 도덕 종교까지 선행을 의의 방편으로 삼는다. 성경도 사실상 율법을 주신 목적이 선행이다. 모든 율법의 최종 목표가 선행이며 모든 윤리의 정점이 선이다. 선행을 강조하고 선행이 복을 가져오며 선한 일을 위한 것이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요구된다. 하나님도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기 직전 그에게 “내가 완전하니 너도 완전하라”고 요구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 누구도 최고의 선을 이룰 수 없다는데 있다. 그래서 아브람을 뽑으신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행동보다 믿음이 의의 방편이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의의 기준이 너무도 달랐다.
오직 기독교만이 선행 아닌 믿음을 보시고 의롭게 여기시는 구원론을 가르친다. 왜 어떻게 기독교의 구원과 세상 사람들의 선행에 대한 태도가 다른 것일까? 인간은 선을 완전하게 행할 만큼 선한 사람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이란 것을 전제한다. 하나님께서 의로 여길 만큼의 선이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선하다 해도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는 미미한 선이기 때문이며 인간의 선은 너무나 하나님의 저울추에 부족한 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선의 기준을 인간은 도저히 달성할 수 없다.
우리는 선행이 의를 이루는 사고 구조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은 의의 기준과 조건을 새롭게 하고 전혀 새로운 윤리 기준을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선하다고 할 때 특히 구원의 조건이 되는 의의 기준을 선행 아닌 믿음으로 바꾸어 인류의 생각 자체를 바꾸고자 하신 것이다. 세상 종교와 기독교의 의의 방편은 전혀 다르다.
1. 이선칭의 미신(以善稱義之迷信)
소제목에 대한 설명이 조금 필요하다. 왜 갑자기 미신이 등장할까? 세상의 윤리와 도덕, 성경의 의의 개념 차이를 설명하면서 우선 모든 세상 사람들이 공통으로 생각하는 의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는 것이 기독교의 유일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종교와 윤리는 불가분의 관계 때문이다.
문화에 따라 방법도 틀리고 종교에 따라 더욱 의의 기준은 다르다. 의라는 말은 옳다는 말이요 죄가 없다는 말이요 의로운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다는 의미다. 대부분 종교가 의로운 상태를 요구하는 것은 그래야 신과 가까이 할 수 있기에 강제하거나 요구한다. 영은 좋고 육체는 악하다는 이원론적 문화권은 인간 본능을 극도로 제한하는 금기나 금욕을 요구한다.
가령 동양 사상이나 종교는 이런 이원론적 가치관이 주류다. 대부분 악은 인간의 육체적 욕망이나 본성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본성을 억제하려 산 속에 고립되어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에서 이기는 것을 고상한 덕목으로 여겨왔다. 불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케돌릭의 중세 수도원이나 성직자 독신 사상도 이에 준한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고난을 참고 수행하는 것을 최고의 선으로 생각했다. 평생 등을 땅에 누워보지 않고 잠을 잔 성철 스님은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 이쯤 되어야 사람들이 의로 여겨준다. 죽기 직전까지 자기 육체를 미워하고 억제하는 것이 미덕이다. 그런데 본인은 죽으면서 “내 죄가 수미산보다 높다”고 고백했다. 죄 문제 해결을 못하고 세상을 뜬 솔직한 고백이었다.
한국 사람이 일본의 한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일본인 노인이 그만 달려오는 기차 길에 떨어졌다. 이를 본 한국 젊은이가 그 노인을 구해내고 자기는 장렬하게 치어 죽었다. 이 한국인을 일본 사람들은 의인이라 불렀다. 아마도 자기 생명을 바쳤으니 최고의 의를 나타낸 사람이다. 정말 자기 생명을 한 노인을 위해 바친 의인이었다. 그런데 이런 선행은 정말 아무나 도달할 수 없는 의의 기준이다. 도달하면 소중한 자기 생명을 끊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생명을 누구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 자기 자식보다 소중히 여긴다. 남을 위해 자기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다.
종교가 선행을 장려하고 선행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종교는 선행의 요구 아래 모든 종교적 가치를 둔다. 적어도 어느 정도의 선을 행해야 의로 여길 수 있는 교리를 소유하고 인간을 일정의 선행을 위한 노예로 삼는다. 인간은 평생 달성할 수 없는 선행의 노예가 된다. 특히 미신일수록 이런 선행을 미신의 대상이 요구하는 조건으로 삼고 자기 신자들의 믿음을 강요한다. 미신의 대상 우상을 위해 돈을 바쳐야 하고 충성을 해야 하고 금욕을 해야 하고 포교를 해야 하고 수양이나 자기 노력 외에 희생을 더 해야 한다. 평생을 금기와 절제와 금욕의 고통으로 지내도 구원은 없다는 점이다.
기독교인 중에도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알지만 사고 구조는 여전히 세상 미신 종교인들과 같이 행동한다. 어떤 교회는 적어도 10일 이상 금식기도를 십일조 얼마를 파킹장 안내를 3년 해야 장로 출마가 가능하고 어떤 교회는 적어도 상당액 돈을 교회에 혹은 건축헌금으로 바쳐야 자격을 받는 곳도 있다. 그래서 대개 믿음을 행동으로 바꾸어 얼마 정도의 선을 그어 놓고 그 이상의 기준을 달성해야 그 사람의 신앙을 인정해주는 교회들도 있다. 필요한 방법일지는 몰라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의 방법을 뒤바꾸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런 요구사항을 가지고 일정한 자격을 갖추게 하는 모든 것이 다 잘못이란 말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믿음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람을 보고 의의 기준을 믿음으로 삼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상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어떤 사람이 선행은 별로 없어 인정을 못 받는다. 그래도 그의 내심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크고 진실하다. 그의 나타나는 행위보다 그 안에 있는 신앙을 보고 우리도 이 사람이 위대하다고 인정하는 판단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믿음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왜 세상은 이렇게 선행을 기준해서 의를 정하는 것일까? 그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며 선행을 기준 삼는 것이 판단하기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이런 생각의 구조를 갖고 있어서 남에게 나타내 보이기를 좋아하고 아주 작은 것도 자랑하며 자기의 작은 선을 침소봉대하여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원한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타락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로마서 3:9, 시편 14:1,3)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론을 말씀하면서 또 이렇게 의신칭의를 설명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이라”(엡 2:8-9). 인간이 선을 기준으로 의를 정하는 체계는 자기의 선행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죄인이 한 가지 선한 일을 해 놓고 그것을 팔아서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높게 여기고 교만해지며 남을 옭아매고 자신의 의로 남을 판단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의로우면 얼마나 의로울까?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하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살펴보면 실망할 점이 많다. 그 실망이 내가 모르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선의 기준이나 의의 기준은 어느 정도 인정할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적 선의 기준이나 의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잘못된 내 기준을 가지고 얼마나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판단하는가? 믿음을 의로 보시는 하나님의 넓은 마음과 높은 시야를 무시하고 자기가 판단자가 되어 남을 정죄하는 것이다.
요사이 전광훈 목사를 이단이라 판단하는 좌파 목사들 대부분이 이런 경향이 강하다. 많이 배웠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남의 눈의 티를 보는데 강하다. 더구나 비판적 눈으로 성경을 보고 날카로운 비판력으로 교회 파괴를 일삼는다. 더구나 무신론 좌파들은 하나님을 배척했기 때문에 자기 기준에 따라 눈에 보이는 상대방의 행동을 비판한다. 믿음은 보이지 않고 또 보려 하지도 않는다. 이런 비판자들의 판단은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자기도 지키지 못하는 잣대로 상대방의 생명을 죽인다. 한, 두 가지 약점을 가지고 인생 전체를 난도질하고 매장 선동에 이용하는 비판적 인본주의 종교행위다. 자기도 지키지 못하는 기준가아 “내로남불”이 될 수밖에 없다.
이성주의자들의 사생활을 보라. 거의가 다 내로남불이다. 자기도 지킬 수 없는 스스로의 잣대로 비판을 일삼는 일이 무신론 좌파의 생리이고 자기를 신으로 삼는 자기숭배의 폐단이요 이중인격이다. 그래서 자기들만을 치외법권자로 여기는 또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소수의 무리들만의 특권층이 생기는 법이다. 다른 사람들을 자기들이 통치할 노예로 만들고 자기는 소수 치외 법권자로 신분 상승을 꾀한다. 그래서 자기 자녀들은 미국을 반대하면서도 미국에 유학을 보낸다. 온갖 부정 부패를 저지르고도 양심도 없고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죄를 저지르며 온갖 핑계를 대어 죄를 전가시키고 사법권을 장악 형벌을 없애버린다. 천인공노할 작태다.
당신은 사람을 볼 때 그의 믿음부터 보는가 아니면 믿음은 볼 줄 모르고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비판하고 판단하고 때때로 그 행동을 당신 스스로 범하면 그 사람과 나는 다르다며 당신만의 특권층을 형성하려 들지 않는가? 그런 정권이 오래 간다 보는가?
2. 이신칭의 기독교(以信稱義之基督敎)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은 그가 아브라함이 되게 하기 위하여 훈련을 시작하셨다. 그래서 그는 애급으로 건너가 하마터면 아내를 잃고 약속했던 씨가 사라져버리는 위기에 처할 뻔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급하게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왕에게 재물도 많게 하셔서 거부가 되어 가나안 땅에 돌아왔다. 13장에 보면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고 했다. 그는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서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재단을 쌓은 곳이었다고 했다.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 동안 애급 내려가 전혀 재단 쌓는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신앙생활을 회복한 것이다.
재물이 많아지니 가정에 문제가 생겼다. 자기 몫의 목자들과 롯의 몫의 목자들이 다투는 것이다. 집안에 평안이 사라졌다. 그래서 롯과 헤어지기로 하고 롯은 소돔과 고모라 지역으로 아브람은 롯이 가지 않는 다른 지역으로 갈라섰다.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던 롯과 아브람을 하나님이 재물 때문에 분립시킨 것이다.
그런데 일이 벌어졌다. 롯이 살던 소돔 고모라에 전쟁이 일어났다. 그 동안 섬기던 그돌라오맬 왕이 주위 부족국가들이 배반하자 쳐들어와 소돔 고모라를 친 것이다. 그 곳에 살고 있던 롯도 잡혀가고 말았다. 그돌라오맬 4왕과 소돔 고모라 지역 5왕이 연합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돌라오멜 4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고 소돔에 거주하는 조카 롯도 사로잡아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집에서 기르는 용병 318명을 데리고 이스라엘의 북쪽 끝 단까지 쫓아가 4왕의 동맹군을 이겨 조카 롯을 구하고 빼앗겼던 재물과 롯의 재물 모두를 구했다. 대 승리를 거두었다. 용병 318명을 월급주고 먹이는 가정이면 부자단 말이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상당히 물질적 손해를 보았고 나라가 없는 아브람은 연합군 정도의 많은 적군을 만든 것이다.
돌아오는 중에 소돔 고모라 왕의 영접을 받았고 특히 예루살렘의 제사장 멜기세댁의 영접을 받았다. 그에게 획득한 전리품의 십일조를 드렸다. 이 사건이 놀라운 일이다. 히브리서는 아비도 어미도 이름도 없는 제사장이 불쑥 나타나서 아브람을 축복했다 했다.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축복했다. 부모가 불분명한 메시야의 모형인 멜기세댁 곧 의의 왕이었다. 아브람이 믿는 하나님을 믿는 예루살렘의 제사장이었다. 훗날 예루살렘은 다윗 왕국의 수도요 성전 자리가 되었다. 그래서 아브람이 의의 왕에게 드린 십일조는 후에 모세가 레위 족속을 하나님 성전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면서 도입한 레위 족속의 기업의 기본이 되었다. 아브람은 정말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브람은 많은 손해를 보았고 조카 롯을 구하는 선행을 했지만 그것이 그의 의가 되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런 선보다 전혀 다른 믿음을 의로 보셨던 것이다.
이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은 아직도 자식이 없었다. 롯도 3을 떠났다. 아들이 없다. 그래서 다메색 사람 엘리에셀이 자기 상속자냐고 물었다.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셨다. 그래도 잘 안 믿으니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밤이었다. 하늘의 별을 보라고 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셨다. 그런데 하늘의 별을 본 아브람은 그 말씀을 믿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은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의인으로 대하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그에게 최선의 인간으로 최고의 도덕을 소유한 자로 대화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행동은 아직도 참 미숙하다. 그 다음 장 보면 아브람이 자식은 믿었지만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한 말씀을 또 안 믿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것은 믿었지만 성취 불가능한 것은 믿지 않는다. 아직도 그의 믿음이 완전한 믿음이 아니다. 초보다. 그래서 가능할 것 같은 것은 믿고 그렇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약한 믿음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믿음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도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신 것이다. 그게 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의 마음이고 눈이다.
바로 이 말씀이 기독교 사상의 핵심이며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분별되는 분깃점이며 사고 체계가 현저히 다른 가치관이다. 이 후로 구약시대부터 줄기차게 하나님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원칙을 적용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오게 하셔서 그런 신앙을 기르신 것이다.
하박국은 포로 시대 선지자였다. 그는 의로우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불평했다. 왜 선한 사람은 고통 받고 악한 사람이 잘 되는 세상일까? 하나님은 악한 자에게 즉각 벌을 주셔야 세상이 공평하지 왜 선한 사람이 더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도록 하시는가? 그래서 이 세상이 공평하지 않고 하니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 아닌가?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헤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하박국 1:3-4) 자기가 보니 하나님이 악을 놔두고 저들의 악을 참으시니 세상이 온통 불의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 기준이 틀렸고 그래서 인간에게 정의가 실현되지 못한다는 이론이다. 강력한 인본주의 사상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있는 실증이다. 인본주의 이성 철학자들이 이렇게 사고하고 불평한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마져 부정한다.
그 때 하나님은 갈데아 사람 바벨론을 강하게 일으켜 이스라엘의 악한 자를 치시고 벌하시겠다고 말씀한다.
하박국은 이것은 더 잘못되었다란 의견이다. 이스라엘은 악해도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다. 율법이 있어 잘못이 있어도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던 백성이니 바벨론보다는 위에 있는 민족이라는 말이다. 자기 백성의 잘못을 왜 이방 나라 바벨론, 우상을 섬기는 그런 백성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을 침공 선택한 백성이 그들에게 당해야 하는지 도대체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하박국의 눈에는 도대체 하나님이 틀려먹고 정말 한심하다는 판단이다. 무신론자 이성주의자들, 무신론 칼 막스주의자가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자기들도 하지 못하는 선의 기준을 가지고 도대체 하나님이 틀려먹었다는 주장이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하박국서 2:4 말씀 주셨다.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의인은 계속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결국 하박국은 이 말씀으로 역사 전체를 보는 안목으로 하나님의 섭리 속에 나타난 의를 본 것이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을 보고 춤을 추며 기뻐했다. 의인의 믿는 삶이 즐거움이며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가 행복 자체였다. 그런 눈을 가지면 하박국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연약한 믿음을 8로 여기시는 놀라운 은혜를 받았음에도 선행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 스스로 신이 되려 하는 것이다. 의의 사람은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고 독생자의 의를 전가시켜 의롭다 여겨주신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17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는 이 한 마디를 풀어 설명하는 서신이며 기독교 핵심 교리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기 전 우리를 지으시고 미리 아시고 미리 선택하셨다. 그래서 선택된 백성을 성령을 보내 중생케 하시고 믿음을 고백하게 하셨다. 성령이 주신 믿음이 구원신앙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초기 신앙은 하나님 선물이며 놀라운 은혜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첫 믿음은 약하다. 부족한 믿음이어서가 아니라 적용이 부족해서 그렇다.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구원해 의인 삼아주심을 감사하고 그 믿음을 적용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경험한다. 적용신앙이 점점 자라고 커져 큰 믿음이 된다. 장성한 큰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믿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의인이 되었으니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물론 선한 행위가 필요하다. 그러나 선행은 의로 자격 미달이다. 의인의 초기 믿음이 자라 더 큰 믿음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로마서의 가르침이고 종교 개혁자들의 교리다. 믿음이 선행보다 우선할 때 참된 선행이 가능하다. 믿음이 기도보다 중요하고 믿음이 예배보다 중요하고 믿음이 찬송보다 중요하다. 하나님은 이 믿음이 있어야 기뻐하신다 했다.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하셨다. 그래서 예배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사도 신경으로 신앙 고백을 먼저 해서 하나님이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시게 하는 것이다. 죄 용서와 믿음 고백은 지성소의 막을 찢고 하나님과 만나는 필수적 예배 순서다.
3. 이신칭의 복(以信稱義之福)
아브람이 복이 되어 복을 나누어주는 근원이 되는 것은 믿음으로 의인이라 칭함 받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을 말한다. 그것이 진짜 복이다. 왜 이신칭의 복이 진짜 복이 되는지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 복은 세상 종교나 사이비 종파나 우상을 섬기는 미신과 전혀 다른 복이고 모든 사상 체계와 철학과 문화와 심지어 발달된 근대 철학과도 구별되는 복의 복이 되는 삶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복을 누리며 살기 위하여 우리도 믿음을 사고와 생각과 행동의 기본으로 삼아야 하고 그런 사고방식을 훈련해야 한다. 그래야 복의 근원이 되고 아름다운 신뢰의 세상을 만들어 살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 예수 믿는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것을 잘 안다. 그런데 실제로는 행위를 판단의 중심으로 삼고 비판하고 판단하고 누가 의롭냐고 싸운다. 믿음 때문에 싸우지는 않는다. 내가 옳으나 내가 옳으냐고 싸우고 다투고 죽이고 정복하고 지배한다. 그래서 복된 세상이 요원하다. 믿음으로 의인된 삶은 그 자체가 복이고 그 자체가 복을 나누어줄 수 있는 복의 근원이 되는데 아직도 행위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비판이 불만이 많은 자들의 심리적 치료는 될지 몰라도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다. 협력과 사랑과 용서가 행복의 과정이다.
믿음이 왜 선행보다 위일까? 첫째는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 찾는 자들에게 상급 곧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히브리서가 말씀한다. 적용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이 신뢰다. 마음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믿고 신뢰함이 필요하다. 믿음은 관계적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에게 속고 여러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 사람은 남을 신뢰하기 어렵다. 그래서 쉽게 의심하고 눈치도사로 살려고 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권면한다. “절대로 사람 믿지 마” 이 말을 참된 지혜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좌파 사회는 의심을 조장하고 부모도 자식도 못 믿게 만든다. 그들은 의심의 도사들이며 거짓으로 의심을 증폭시키고 결국은 의심을 이용 죄 없는 자를 죄인으로 만든다. 사람을 감옥에 잡아넣을 때 의도적으로 의심하게 하여 증거 없는 프레임을 씌운다. 그렇게 적폐라고 규정한다. 한심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을 믿지 않으면 그 사람도 나를 믿지 않고 사람 사이에 신뢰 없이 관계를 맺고 살 수가 없다는 점이다. 가령 아내가 남편을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 외도하는 것을 너무 많이 듣고 연속극에서 실제처럼 많이 보았다. 남편이 조금만 늦게 와도 의심이 발동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심은 도를 더한다. 나중에는 모든 것이 의심에 집중되고 부부관계는 깨지고 이혼 수속하게 된다. 남편이 아내를 대할 때도 이런 의심이 가정 파탄의 원인이 된다. 의심하게 되면 가정이 행복의 동산이 아니라 지옥이 된다. 그래서 의심하라는 말이 진짜 지혜가 아니다. 혹 속임을 당하더라도 믿으면 관계는 유지되고 사랑은 계속된다. 사람에게 속고 사기를 당해 본 사람은 남을 신뢰하기가 참 어렵다. “사람 믿지 마” 라는 말이 참 지혜처럼 들린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을 믿지 없으면 인간관계를 맺고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계 안에 의심이 더해지면 정신병이 되고 피해망상증으로 발전하고 심한 고독과 좌절과 절망으로 빠져들어가 결국은 자살하게도 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신뢰로 가능하다. 그래서 미국은 신뢰를 숫자로 표시한다. 크레딧을 숫자화 한다. 필자 같은 목사는 은행에서 하라는 대로 잘하고 빚을 진 경우 틀림없이 잘 갚는다. 목사이기 때문에 사람도 잘 믿는다. 왜냐면 사람을 믿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사기를 당하기도 한다. 뉴욕에서 돈 꾸어주고 못 받았고 오히려 꾸어간 사람이 욕을 더 했다. 중국 가서 또 당했다. 그래도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사기 당했어도 사람을 믿으라고 가르친다. 적어도 목사는 사람을 믿어야 한다. 목사가 사람을 보고 신뢰하지 못하면 목회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믿음을 의로 보시는데 목사가 사람을 보고 의심부터 하면 무슨 목회가 가능할 것인가?
그래서 예수님의 신뢰 방법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예수님께서 처음 복음을 전하실 때 참 어려웠다. 사람들에게 아무리 말해도 믿어주지 아니하였다. 요한복음 14:1에서 이렇게 말하신다. “너희는 마음에 근삼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을 정말 믿으면 사람들이 나를 의심하며 욕하고 그 사람 말 어떻게 믿어 그럴지라도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믿으면 사람도 믿으라는 것이다. 인간을 못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다. 물론 사기 당한 사람은 자식도 부모도 형제도 남편과 아내도 못 믿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면 내가 속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상하시고 나를 더 축복하심을 믿고 그 사람에게 다시 속아줄 자세로 신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의인의 삶이다. 사람 간 신뢰가 없으면 결국 혼자 살아야 하고 남도 자기를 믿지 못하니 외롭게 살다 죽는 것이다. 못 믿는 사회에는 하나님을 믿으니 사람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으니 예수님이 사기꾼이 아닌 구세주임을 믿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으니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믿고 교인도 믿어야 한다. 무조건 믿으라는 말은 아니다. 그가 신앙이 있는 것을 먼저 보고 그를 믿어주면 하나님이 나를 복주시고 손해 볼 시 보상해주심을 믿어야 한다. 사람을 믿어야 가까워지고 그와 인간관계가 두꺼워진다. 신뢰가 작용하는 사회가 민주사회요 자본주의 사회이며 신뢰가 자본주의 국가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본인은 중국에서 이런 체험을 했다. 큰돈을 사기 당한 것이다. 이 사기 당한 이야기를 듣는 모든 사람은 중국 사람은 절대 믿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 말에 충분한 이유가 있고 현명한 것 같았다. 그러나 중국사람 의심하며 어떻게 중국 현지 선교가 가능한가?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는 예수님 교훈을 실천하기로 했다. 손해 보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믿었다. 내 믿음이 의를 이루기 때문에 내가 절대 속지 않는다가 아니라 속는 일이 있어도 나를 의로 여겨주신 하나님이 복주시기 때문에 내가 손해 보고 나누어주고 내가 돕고 살겠다는 믿음이 더해지는 것이다. 내가 물질적으로도 손해 보았다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학생들과 교사들을 못 믿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해서 속이고 속고 싸우고 다투고 하는 세상 그래서 서로 의심하고 그 의심 때문에 더 의심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 아니라 믿었다. 하나님을 믿고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인의 삶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니 중국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자 했다. 믿어보자 하는 삶을 살며 하나님의 보호 받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잃어버린 돈보다 훨씬 더 많이 축복해 주셔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해 주셨다. 하나님은 내가 손해 본 것을 몇 배로 갚아주셨고 넘치게 해 주셨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주님의 말씀이 복의 근원이 된 셈이다. 가정도 사회도 부부간도 부자간도 회사에서도 사업체에서도 기업주와 소매인 간에도 신뢰가 생명인데 불신 때문에 거래가 끊어지고 인간관계를 선입견 때문에 거부한다면 스스로 복을 차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자들이 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필요해서 믿음으로 구원하시고 믿음을 보는 눈을 가지고 살아야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때문에 믿는 바보가 되라고 하셨다. 내가 손해 보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결코 나를 실패자로 삼지 않으신다. 사기 당하고 온통 거짓으로 세상을 보면 자살하게 되고 결국 패배감 실패감에 휩싸여 자살하고 만다. 최악의 운명주의자가 된다.
結 論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지옥에 빠질 우리를 선택하시고 그리스도를 희생하여 우리 죄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변화시켜 우리 안에 구원신앙을 선물로 주셨다. 하나님 눈에 의인이 되었다. 내가 할 만한 짓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냥 나를 사랑하셔서 주신 은혜다. 하나님의 선물이며 복의 시작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하셨으니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아니 서로 마음을 읽을 수 없어 속이고 속는 일이 허다해도 신뢰가 없으면 내가 불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기초로 사람도 믿고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을 믿으니 한 번 예수도 믿어보면 예수님께서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의심 많은 세상 서로 안 속으려고 서로 의심하고 사는 것이 지혜가 아니다. 주님 믿으니 저 사람도 믿어보고 신뢰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그것이 내 복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교회는 선택된 구원받은 백성들의 공동체다. 교회에서 목사를 못 믿고 장로를 못 믿고 서로 의심하면 결국 교회는 망하고 만다. 교회가 망하면 교인도 망한다. 사회도 국가도 사회주의자들이 하는 짓들을 따라 의심하고 거짓하고 선동하고 거짓을 참으로 말하고 의심을 키우는 생활 속에는 결코 행복이 없다. 그들 말대로 계급 투쟁만 있을 뿐이며 인간은 서로 싸우다 망하기 마련이다. 행복한 사회는 하나님 믿고 사람도 믿고 복되게 산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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