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사이로 지나가시는 하나님 (2020년 9월 6일 주일예배 설교) > 설교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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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사이로 지나가시는 하나님 (2020년 9월 6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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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명길목사
댓글 0건 조회 2,987회 작성일 20-10-22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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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체 사이로 지나가는 하나님


2020년 9월 6일 주일 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창세기 15:8-21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급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17-18)


     15장 앞 절에서 하나님은 선행을 조건으로 의를 정하는 세상 이치를 뒤 엎고 아브람이 아직 부족하지만 그가 하나님 하신 말씀을 단순하게 믿는 것을 보시고 의롭다 칭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전체 성경의 중심이며 기독교의 핵심이고 기독교인의 사고 체계의 기본임을 지난주일 말씀 드렸습니다. 이 말씀으로 하박국은 나라 없는 서러움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역사의 주인공이시며 선택한 백성을 지키심을 믿었고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이 말씀을 기초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기독교인의 삶을 서술했으며 새 이스라엘 민족 운동(교회시대)을 시작하였으며 카돌릭의 종교 미신화로 암흑시대가 된 중세 말 루터와 칼빈은 이 말씀을 기반으로 종교 개혁을 이루었고 청교도들이 이 말씀으로 미국을 세웠으며 이승만 대통령이 이 말씀으로 대한민국을 건국 미국과 정부 형태와 민족 신앙을 본 받아 손바닥만한 나라를 세계 경제 10위권에 진입하는 사라로 서게 하였으며 우리가 지금 새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이 말씀을 실현하기 위해 새 이스라엘 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미국 교포 기독교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잘 이해하고 새겨서 우리의 삶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의인의 복을 누리는 새 이스라엘로 우뚝 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의로 여기신 믿음은 완성된 믿음이 아니라 초기 신앙이라는 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받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주신 믿음 또한 완전한 것이지만 그 믿음을 받은 우리가 그 믿음을 온전하게 적용하지 못하는 죄인이기 때문에 장성한 믿음으로 자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적용력이 커지는 신앙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의롭게 여기신 믿음은 성숙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전능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믿을 수 있는 것만 믿는 정도의 신앙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말씀을 보면 아브람의 신앙은 땅을 주신다는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 구원하실 때 주신 믿음도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셔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를 의로 여기신 의는 예수님의 의요 나의 의가 아니며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입니다.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 이치와 같습니다. 그러나 대단히 중요한 믿음 선물입니다. 나의 정체성을 바꾸고 나의 생각을 바꾸고 나의 삶을 바꾸는 중차대한 내 인성 혁명이며 근본 혁명인 것입니다. 그것이 중생입니다. 나의 삶이 근본적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생했다고 죄 밖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도 죄를 지니고 죄악 세상에 발붙이고 살며 아직도 죄를 짓고 삽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미 푯대를 향해 갈 수 있는 출발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우리는 현실에서 적용하면서 하나님께서 살아서 역사하심을 체험하며 신앙이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적용 신앙은 성장해야 합니다. 큰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람의 초기 믿음은 어렇습니다.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니라” 말씀하실 때 “예 그것도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그렇게 물었습니다. 아브람이 그 넓은 땅을 소유로 준다고 하니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사실 아브람이 그 넓은 땅을 자기 소유로 삼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땅 한 평도 없어 무덤을 사서 장지 삼았습니다. 

     아브람의 신앙이 너무 미약할 때 하나님은 무슨일을 하셨고 어떻게 더 큰 믿음으로 나아갈 수가 있었습니까?

1. 믿음 약한 아브람

     하나님은 아브람을 위로하러 오셔서 하나님 자신이 아브람의 상급이며 방패라고 하셨습니다. 롯을 구하기 위해 적을 많이 만들고 재물을 잃고 허탈에 빠진 아브람을 의인이라고 선포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위로의 말씀을 들은 아브람은 오히려 속에 있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사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하나님이 지시하는 대로 가 살다가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기근으로 이민온 아브람 가족이 먹고 사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도 한 번 없이 애급으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하마터면 아내 사래를 임금에게 후궁으로 빼앗길 뻔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실수를 친히 수습해주시고 그가 쓰고도 남을 만큼 은금을 얻어 부자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물질이 많으니 가정에 불화가 왔습니다. 소유가 많아지니 불화가 생겨 롯과 헤어지기로 하고 롯은 소돔 고모라 지역으로 가고 아브람은 다른 지역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돔 고모라 지역에 살던 조카 롯이 전쟁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래서 용병을 이끌고 가서 구했습니다. 인명도 재산도 손실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적을 많이 만들어 불안했습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찾아왔을 때 아브람은 자식 주신다던 하나님의 약속은 안 지키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아브람이 답답함이 여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그는 하나님의 쓰실만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나중 아브라함이 되었어야 합니다.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훈련하여 믿음의 아버지로 성장시키시려 했지만 그의 성장은 아주 더딥니다. 아브람이 답답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더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자식을 주지 않은 것은 성숙한 신앙을 가질 때 자식보다 더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세계를 바라보게 하실 때 주실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답답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론에서 말씀했듯이 우리의 구원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켜서 예수를 고백하게 하신 일은 대단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변화시키신 것은 완전히 성인 만드시는 일이 아닙니다. 왜냐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성령님은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을 하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이 성화되어 하나님 기뻐하시는 자녀로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시키신 것입니다. 이를 잘 적용해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성장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이 되어가야 합니다. 성화로 점점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성숙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기까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성화가 아브라함의 축복입니다. 세상을 믿음으로 생각하고 성장하고 믿음을 의로 보는 하나님의 사상과 시각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믿음에 안주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복을 거둬차는 일이며 복을 내 쫓는 일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겠다고 하신 예수님을 베드로는 말렸습니다. 그러면 자기들의 꿈이 다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지 말고 악한 세상을 멸하고 악한 종교 지도자들을 다 멸하고 자기들이 큰 자리를 차지할 때까지 살아서 기적으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때 믿음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셨습니다. 신자에게 사탄이라 한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필요한 고통이며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아니 죽음을 저당하고 주를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베드로가 영적 존재인 사탄으로 죽어서 사탄이 된 것이 아니라 사탄의 영향을 받아 사탄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말씀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일에 반대되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 제자들이 예수님의 책망을 받습니까? 자기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경지까지 주님을 사랑하고 내가 죽으면 예수님이 부활시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참된 신앙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용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나를 기뻐하시고 나를 구원하시려고 성령님을 보내 중생시켜 예수 믿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증거입니다. 그런 증거를 가졌기에 우리는 세상을 염려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삽니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밖에 없는 그래서 천하보다 귀한 내 목숨을 내 놓을 때 나를 인정하십니다. 그것이 큰 믿음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죽음을 넘어선 믿음을 가질 때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죽음 문제가 걸리면 어쩔 줄 모르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등하는 믿음이 아니라 죽음에 태연하고 필요한 일이면 내 생명이 필요하다면 주는 심정으로 용감하게 사는 것이 기독교인입니다. 독감보다 못한 코로나 때문에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고 무엇을 그리 오래 살겠다고 염려하며 행여나 병 걸릴가 봐 해야 할 일도 하지 않고 예배도 안 드리고 오래 살아서 무엇 하겠다는 말입니까? 

    정말 하나님을 믿습니까? 정말 예수 위해 죽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내가 예수 믿는 것이 나의 생명을 연장해달라고 믿는 것입니까? 내 생명 주께 바칠 테니 주님이 사용하시라는 것입니까? 솔직하게 믿어야 합니다. 믿음 없으니 죽을까 봐 발버둥하는 것입니다. 이것 넘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담대함은 내가 내 생명을 포기할 마음으로 주를 섬길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앙은 죽음 문제가 해결 될 때 큰 신앙으로 변합니다. 종교가 아닙니다. 생명 문제입니다. 함께 마가복음 8:35을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신앙은 믿음으로 목숨을 거는 문제입니다. 그럴 때 성장하고 그럴 때 믿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2. 짐승의 시체를 갈라놓으라는 하나님

     아직도 믿을 것만 믿는 아브람에게 확실한 믿음을 심기 위하여 하나님은 명령합니다.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하나님은 아브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 짐승을 잡으라 하셨습니다. 제사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보이실 어떤 것을 위해 하나님이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람은 무엇인지 아마도 의식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당시에 중대한 계약을 맺을 때 국가 간 조약을 맺을 때 사용하던 언약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명령하신대로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언약식을 준비하라고 하셨을까요? 언약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금도 체결하는 계약을 볼 때 몇 가지 중요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계약은 두 편이 하는 계약입니다. 집을 살 때 파는 사람이 있고 사는 사람이 있어서 계약합니다. 양편이 계약이 성립될 때 매매 관계가 성립됩니다. 그때부터 계약이 성취될 때까지 다른 계약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둘 사이 계약관계는 배타적 관계가 됩니다.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끼어들면 계약은 파기 됩니다. 결혼도 계약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도 계약이기에 배타적 관계가 됩니다. 

둘째 언약은 반드시 행해질 행동과 조건이 기술됩니다. 집을 팔고 필요한 돈을 지불하면 그 소유권이 사는 사람에게 양도됩니다. 구체적으로 날짜 등을 정해 조건이 이행되도록 기술합나다. 

     셋째 조건 불이행시 반드시 벌칙이 수반됩니다. 벌이 없으면 계약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일수록 손해가 큰 벌칙을 붙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을 계약합니다. 결혼도 계약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잃는 것 같은 중대한 벌칙을 정합니다. 정조를 잃으면 결혼은 파기할 수 있게 되고 재산도 분할하고 서로 남이 되도록 돌아갑니다. 그만큼 언약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언약을 맺는 것도 배타적 관계 즉 아주 긴밀한 관계를 설정하기 위함입니다. 의롭게 여기는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과 관계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믿음을 적용하여 큰 믿음으로 자랄 수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만 사랑하고 우상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랑으로 이웃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 창조하신 직후 “창조 언약”을 맺었습니다. 물론 창세기 1,2장에 창조언약이란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부터 인간 창조 후 축복하시며 주신 “문화 명령”은 분명히 하나님의 언약 말씀입니다. 창조하신 온 피조물과 무관한 하나님이 아니라 언약 관계 속에서 인간에게 만유를 하나로 만드시고자 하신 놀라운 뜻을 이루고자 하신 언약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버린 것이 아니라 깊은 관계를 유지하시며 하나님과 인간 만물을 하나 되게 하시려는 놀라운 의지와 뜻을 가지고 아담과 하와를 축복하셨습니다. 문화명령 자체가 언약입니다.

    이러한 창조언약을 어기자 하나님은 벌하시면서 또한 인간 구원 계획을 세우십니다. 죄의 원인 사탄에게 장차 인류 구원을 말씀하시고 아담에게 생명을 낳게 하여 하나님의 온 인류와 피조물의 구원계획을 세우십니다. 이것을 “아담 언약”이라 부릅니다. 

     인간이 나면서부터 악하여 하나님이 세상 지으심을 한탄하실 즈음에 하나님은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고 노아를 선택 그를 통해 살아남은 피조물과 언약을 맺습니다. 창조하신 생명을 보존하시고 창조 질서를 유지하시겠다는 “노아언약”은 “보존언약”입니다. 이 때문에 자연 과학이 존재하고 창조 질서는 그대로 유지되며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가 필요할 때 기적을 베푸시지만 모든 것은 자연 질서 안에서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 재림 시까지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존 언약을 믿는 사람들은 과학도 하고 아플 때 먼저 병원에 가고 의사가 처방한 약을 복용하지 기적을 바라는 잘못된 신앙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습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행사하는 자연 질서의 일시적 차단이거나 능력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보존언약을 하신 하나님은 천지의 질서와 자연법칙을 지키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기적만 바라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바벨탑을 쌓고 정부를 만들어 백성을 탄압하고 전쟁이 쉬지 않음을 보고 아브람을 택하여 언약하여 한 민족을 믿음으로 훈련시키실 것을 언약합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믿음언약”입니다.

그들이 애급에 가서 430년 종살이 할 때 모세를 택하여 출애굽하게 하신 하나님은 그에게 5경을 주시고 율법을 주셔서 모세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선택된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며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남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며 죄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칩니다. 제사 제도와 율법을 주셔서 지키게 하십니다. 율법을 어기면 그들이 다른 민족에게 정복 당하고 포로로 끌려갈 것을 벌칙으로 율법을 순종토록 합니다. “모세 언약”은 “율법 언약”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은 성민으로서 도덕적 윤리적으로 가정을 잘 지키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예배 공동체로서 제사 제도를 통해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시대가 지나 하나님은 다윗을 세우십니다. 이방인들이 부족국가를 세우더니 연합하여 연합군을 만들고 나라들을 합쳐 방대한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합니다. 다윗을 선택 왕국을 건설케 하시고 다윗 언약을 세우셔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왕들이 어떻게 나라를 잘 다스리는가를 보여주며 장차 진짜 왕 그리스도를 보내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을 약속하는 다윗 언약을 세웁니다. “다윗 언약”은 “왕국 언약”이며 “하나님 나라 언약”입니다. 죄인인 인간들이 권력을 가지고 백성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을 때 위로는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고 권력도 왕, 제사장, 선지자 등으로 권리를 분산시키고 죄인인 왕이 절대 권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지키도록 선지자가 책망하도록 하는 권리 분산을 왕국의 모습으로 제시하십니다. 그것을 본 받은 것이 삼권분립이며 근대 민주주의 정부의 근본이 된 것을 우리는 청교도 지도자들의 이론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포로 시대에 예레미야를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아가 맺으실 "새 언약"을 예언합니다. 지금까지 돌에 말씀을 새겼던 하나님은 이제 마음에 새기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면화시킬 말씀을 성령님께서 하심을 보여줍니다. 믿는 자에게 성령 충만함이 새 언약입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심이 진짜 성전 됨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완전한 용서를 약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희생하심으로 누구나 선택 받고 주를 시인한 자는 이미 용서 받고 그 용서의 영원하심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또 죽으시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죽으심으로 영원한 용서가 되게 하신 것을 약속합니다.

    그 "새 언약"을 맺으신 것이 예수님께서 유월절 잡히시던 밤에 모든 기독교인들을 대표한 제자들과 자기 피로 맺은 성찬식입니다. 그래서 성찬식은 십자가만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새 언약을 채결하시는 것입니다. 후대에 사는 우리는 성찬식을 함으로 "새 언약의 백성"으로 언약식을 거듭 참여함으로 새 언약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저당하신 언약으로 확실하게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3. 시체 사이를 지나가신 하나님

      아브람은 그 말씀이 무엇을 하라는 말인지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짐승과 새를 가져다가 짐승은 쪼개고 새는 쪼개지 아니했다 했습니다. 죽여서 짐승 시체는 둘로 갈라놓고 새는 그냥 두었다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솔개가 고기를 먹으려고 달려들었는데 아브람이 솔개를 쫒았다고 했습니다. 죽은 시체를 먹으려고 위협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죽였는데 그 위를 솔개가 고기까지 먹으려고 위협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깊은 잠에 취하고 두려움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후손들이 이방에서 400년 동안 섬길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하셔서 큰 재물을 가지고 그 자손들이 나올 것이며 4대만에 이 땅에 돌아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불로 자신을 나타냅니다. 횃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신 것은 당시 언약 장면을 이해해야 합니다. 계약할 때 당사자들이 그 사이를 지나가는 것은 자기들의 생명을 저당하는 행위입니다. 언약 체결을 그렇게 했습니다. 생명의 저당이 바로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고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저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불신을 없애고 확신 주기 위하여 생명을 저당한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했듯이 믿음은 생명을 걸 때 그 효력이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며 나 살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발버둥하는 것은 어린아이 신앙이어서 능력이 없습니다. 생명을 내 던지고 주를 휘해 희생하고자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생명 바치고자 하는 사람은 기대 이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식을 하고 내 생명을 저당하며 주를 위하여 십자가를 나도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생명을 저당하는 것입니다. 

結   論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람을 배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신앙으로 키워 믿음의 조상 만들려고 그에게 생명을 저당하고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이스라엘은 애급에 들어가 430년 만에 출애급했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 아브람 소속인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다윗왕국을 건설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저당한 언약을 반드시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의 언약을 자꾸 잊어버리고 성경 말씀을 배우지도 않고 제사만 드리다가 주전 586년 나라를 영원히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1948년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국가를 가져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으나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의 억울한 죽음을 복수한 것이 아니라 이는 선택한 백성의 죄를 용서하는 영원한 희생 제물이었음을 선포하며 예수님을 부활시켜 믿는 자의 소망을 삼으시고 승천하신 후 본 모습 그대로 재림하셔서 성도들과 영원한 나라를 함께 살 그날을 십자가로 약속하셨습니다. 새 언약이 지금 우리 시대의 언약이지만 마지막 예수님의 재림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때를 기다리며 지금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새 언약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성찬식에 참여하여 새 언약을 확인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하신 대로 오실 것이며 우리는 내 생명을 저당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자유롭습니다. 내 생명 하나 지키려고 남을 꺼려하고 자존심을 지키고 조금도 나는 희생하지 않을 테니 당신이나 하라는 자세로 남에게 믿음을 요구하면서 자기는 자기 목숨 하나 챙기려고 비열하게 행동하는 미신 신자 노릇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로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개혁해야 할 과제입니다. 남이 아니라 나부터입니다.

     인간이 생명을 바치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 위해 생명 저당하시고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랑이고 기독교는 확실한 언약이며 새 언약은 이미 성취되었고 앞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 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믿고 확실한 것을 따라 사는 행복한 백성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복 아브라함의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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