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은 무엇인가? (2020년 5월 10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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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은 무엇인가?
2020년 5월 10일 주일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창세기 3:26-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27)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사람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인류가 존재하고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 없이 질문되고 나름대로 답하려고 노력한 제목입니다. 우리말로 사람이 곧 인간이며 한문에서 유래하였고 한자는 성경과 같이 사람 사이라는 말을 넣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소통하고 사회를 이루는 존재로 관계가 형성될 때 인간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영어로는 Human Being이라고 번역합니다.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혹은 사회학적 혹은 경제적인 견해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성경은 인간을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마도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말씀이 성경 전체에서 인간에 대한 정의를 논의하는데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6일 동안 창조하시고 6일 마지막에 그 만물을 다스릴 인간을 창조하시는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 창조의 말씀이지만 다른 피조물과 달리 인간 창조는 좀 길고 아주 심오한 하나님의 숙고하심이 그대로 표현되며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특이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어서 이 말씀 자체가 인간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장 잘 말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기독교의 인간론과 현재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면서 사회주의를 부르짖는 무리들이나 공산주의 기타 무신론 철학자들이 보는 견해는 대부분 정 반대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진화론이 등장하여 인간을 우연의 존재로 보는 사람들 특히 이로 인해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부르짖고 있는 자들과 성경은 전혀 다른 인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사실상 그 사람의 일생을 지탱하는 철학이나 신념 혹은 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을 규정 짖는 중요한 기초가 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복수를 사용하시며 “우리”라는 복수단어를 쓰십니다. 그리고 복수의 하나님이 인간 창조는 의논을 통해서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라고 의논합니다. 하나님은 한분이라고 이슬람교도 유대인도 주장합니다. 여기 나오는 복수는 헬라어는 복수를 최상급을 나타낼 때 쓰는 말로 꼭 복수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 어떻게 상의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라면 자기 혼자 자기에게 말할 수 있겠으나 하나님이 영이신데 자기가 자기와 의논한다 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어짜피 구약 자체가 장차 올 메시야의 신성을 나타내고 성령님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나타내고 있는데 굳이 유일신만을 고집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배격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또한 삼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의 형상으로 말씀하는 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규정하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됨과 다름을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우리 형상”으로 지음 받아 사회적 존재가 되고 소통으로 하나될 수 있는 부부, 사회, 단체, 민족을 형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이라고 높일 때 무신론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을 원숭이가 진화된 동물에 지나지 않다고 낮춥니다.
또한 인간은 사탄의 꾀임을 받아 타락한 죄인이라고 말할 때 저들은 짐승이 하나님이라고 높입니다. 자가당착이고 성경과 정 반대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저는 진실로 구원받은 성도는 절대로 사회주의자가 될 수 없고 만일 사주의자라면 그것은 불신자가 스스로를 구원한 가짜 신자라고 확신합니다. 한국에 너무나 사회주의 교인이 많기 때문이며 교회 내에도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이 명백한 사실을 얼버무리며 마치 구원받은 성도로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아니면 교회의 중요 직책을 맡고 있기 때문에 일반 성도들이 헷갈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절대로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기독교인, 구원을 받은 신자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정말로 신자라면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충성할 뿐만 아니라 성경적 인간론을 심각하게 받아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 尊貴한 存在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곰곰이 생각하시고 삼위 하나님께서 소통하시고 상의하신 존재라고 하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고 하는 말씀 전에 나타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나가는 찰나적 생각으로 떠오르기 때문에 우연히 생각 없이 지어진 것이 아니라 심사숙고하신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피조물은 짐승도 모두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땅에게 명령하시니 땅에 기는 모든 것과 짐승들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심사숙고한 결과로 창조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처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심사숙고하였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금도 부모를 통해 나를 잉태할 때도 심사숙고하고 나 한 사람을 창조하셨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나중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잉태되기 전에 하나님은 나를 알았다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실 계획을 가지시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나를 잉태케 하셨고 나는 하나님의 심사숙고의 결과 즉 하나님께서 깊이 생각하시고 지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가지고 태어나게 하신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설이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2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내가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고 나를 의미 있게 하는지 모릅니다. 왜 사람들이 절망하고 왜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인생을 허비하며 무의미하게 살아갑니까? 하나님의 깊은 뜻으로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 아들의 형상을 입혀주시려고 계획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아 이미 이런 사실을 내 안에 성령께서 주신 믿음으로 확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의미가 있고 뜻이 있고 하나님이 선택해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계획 중에 태어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존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우리 모양대로 형상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닮도록 지으신 것입니다. 아무리 외모가 못생겨도 인간은 하나님의 혀상대로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만큼 존귀하고 조물주에 버금가는 피조물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이런 존재이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무신론자는 인간을 우연의 존재로 봅니다. 동물처럼 우연히 태어나 아무 의미도 없이 부모의 쾌락의 산물일 뿐이라는 정신은 인간을 한 없이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은 인간을 단순한 동물로 취급하고 심리학자들도 동물실험을 해서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그런 동물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생각이 깊은 생각하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나같은 존재를 맏아들로 삼으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셔서 성령께서 나를 변화시켜 예수를 고백하게 하신 이 구원은 나로 하여금 인생의 진짜 의미를 붙들고 나는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을 살 수 있는 선택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원래 자기 정체성이 분명했고 구원받은 인간은 목적이 분명하고 삶의 이유가 분명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분명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어정쩡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뜻을 이루는 목적이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입니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그럴만한 가치를 지니고 예수로 바른 인생을 살아가도록 지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그래서 성경은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셨는데 아직 세상 어디에 가서 목적도 잃고 자기 현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자기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고 사는 자가 바로 잃어버린 자입니다.
무신론자 사회주의자들의 철학으로 나를 바라보면 나는 참으로 못나고 실패한 자로 무엇이 목적인지 알 수도 없고 결국 내가 이기기 위해 내 옆 사람과 싸워 이겨야 하는 투쟁의 존재이고 그래서 내가 승리하려면 저 놈을 내 종으로 삼아야 하고 그래서 싸워야 하고 저 놈을 이기기 위해 나는 거짓과 선동도 해서 어떻게 하든 저놈을 이겨야 내가 살 수 있으니 내 형제도 부모도 자식도 다 내 적이고 원수이고 나 살기 위해 저놈들을 모조리 이겨야 되는 존재이니 짐승처럼 악하고 잔인해야 하는 인생일 뿐입니다. 성경의 인간관과 이런 인간쓰레기들이 만든 인생철학과 비교가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이런 쓰레기 철학을 믿고 물질이 지배하는 역사이니 없는 자들이 있는 자들을 처 죽이고 정권을 잡아 물질을 나누어 먹고 살면 평화가 온다는 아주 자가당착적인 미래상을 믿으라고 하니 조금만 공부를 한 사람들이면 속지 않고 알아차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살도록 만들어진 하찮은 존재가 아님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인생의 분명한 목적이 있고 지금 살아야 할 이유구 분명히 있습니까? 내가 사는 인생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인생입니까?
2. 社會的 存在
둘째로 하나님은 인간을 지을 때 남자와 여자를 서로 다르게 지었습니다. 그래서 남녀는 사람이면서 분명하게 다른 존재로 지었음을 명백하게 말씀합니다. 짐승을 지을 때도 종류대로 지었다고 말씀하며 진화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종류대로 지으신 성경말씀은 진화론자들의 진화가 가짜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종류대로 지어서 지금도 종류대로 다릅니다. 식물과 동물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를 종류대로 지었습니다. 아메바가 변하여 사람이 되기까지 많은 세월이 걸렸다고 했지만 적어도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 2000년 이상이며 석기 시대의 유물이나 원시인들이 그린 벽하나 수천 년 전의 인간이나 지금의 인간은 외모나 하는 일이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문화 문명은 발전한 것을 보지만 역사적 기록으로 보면 인간은 과거보다 문화 문명의 혜택을 보며 살고 있지만 어떤 면은 세월이 가면 더 악해지고 악랄해지고 잔인해지고 인류 도덕은 갈수록 잘못되고 세상은 지옥으로 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남녀를 따로 지으셔서 다르게 하시고 둘을 한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낳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성 평등은 지나치고 근본적으로 가정의 질서를 파괴하고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뒤섞어 가정 평화를 파괴하는 잘못된 운동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성 평등 역시 사회주의자들이 만들어내는 문화 막시즘(Cultural Marxism)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녀를 만드신 하나님은 먼저 삼위의 의논이 있었고 합의하에 인간을 복수 하나님 즉 삼위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은 서로 다르면서도 삼위 하나님이 하나인 것처럼 소통을 통해서 하나 될 수 있는 사회적 존재로 지으셨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원래 혼자 살 수 없고 만일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려는 것은 하나님의 근본 뜻을 어기는 일입니다. 바울도 혼자 살면서 사실은 이 점을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처럼 혼자 사는 것은 시대적 사명 때문이며 할 수 있으면 결혼하고 살도록 했습니다. 그것이 순리라는 입장입니다. 전쟁이나 특별한 일 때문에 혼자 사는 일도 있을 수 있지만 생각 없이 결혼 않고 살고자 하는 일은 하나님의 지으심을 역행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혼인시켜 하나 되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낳아 가족을 형성하여 살게 하셨습니다.
가족이 다르고 남자와 여자가 다르고 자녀들도 서로 다르지만 하나 되는 가정을 이루기 위하여 삼위 하나님이 소통하여 한 하나님이 되듯 인간도 그 형상을 본 받아 소통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소통할 줄 알아야 하고 소통으로 우리는 하나 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실 서로 다른 사람이 하나 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하나님을 본 받아 소통해야 합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소통 방법을 배우고 익혀서 삼운 하나님께서 하나 되는 것처럼 부부간에 하나 되고 친구들과 학우들과 그룹 속에서 교회 내에서 민족 간에 아니 세계 사람들 모두 하나 되는 일들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소통해야 되는가는 다음에 설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소통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구체적으로 소통 방법을 가르칩니다.
삼위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모두 동위입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 예수님은 몸을 입고 오셔서 제한적 인생을 살면서 철저하게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고 자기를 겸손하게 낮추셨습니다. 인간 구원의 필요한 죽음까지도 순종함으로 겸손하게 이행하시고 모든 영광을 아버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 자세가 소통의 자세입니다.
부부간에도 이런 자세와 행동이 소통을 원활하게 하여 진정한 부부 일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족끼리도 사회주의자들은 투쟁하여 이기라고 하지만 성경은 자기를 낮추고 순종과 겸손으로 하나 되라고 가르칩니다. 소통으로 하나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인간입니다. 개인이 중요하지만 혼자는 힘이 모자랍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끼리 하나 되라고 하십니다. 가정이 하나 되고 교회도 하나 되고 민족이 하나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개인은 똑똑한데 하나 되는 일은 너무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국가도 힘이 없고 교회도 나누기는 쉬어도 하나 되는 것이 참 부족합니다. 하나 되는 꿈도 없고 하나 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임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정말 잘못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지으신 하나님과 소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삼위간 소통으로 지으셨습니다. 지으신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과 만물과 서로 소통하기 위하여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들으시고 인간은 순종하고 기도로 소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소통이 원활하면 인간끼리의 소통도 원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해서 소통의 길이 막혔을 때 인간을 구원 다시 회복시켜서 소통의 길을 트신 것입니다. 그것이 막힌 담을 헐어버렸다고 바울은 기술하고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 사이에 막혀버린 막을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고 그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고는 사는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 보고 기도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3. 統治的 存在
하나님은 인간을 만든 목적 중 또 하나는 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흙이나 공기 식물이나 동물까지 인간에게 저들을 다스리라고 하신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을 특별히 하나님 형상으로 귀하게 만드신 것은 하나님과 소통의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아래 만물 들을 통치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래로 만물을 위로 하나님을 모시고 자연 질서를 유지하며 인간을 중간 통치자로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동물이 아니고 동물을 다스리는 왕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인간이 만물을 잘 다스려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위의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복있는 존재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창조물은 조물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서 인간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며 복을 주십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우주적 체7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을 통치하려고 하지 말고 서로 돕고 그러나 하나님처럼 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고 자기를 희생하고 낮추어 겸손하게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소통으로 서로 말하고 존중하고 협력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통치력입니다.
그런데 사회주의자들은 인간 서로를 투쟁으로 정복하고 자기가 다른 사람을 다스리려 합니다. 그래서 겸손이 아니라 이기려는 충동을 부추기고 서로를 원수로 만들고 거짓 선동까지도 동원해서 상대방을 누르려 합니다. 그들은 소통이 필요 없고 다만 힘만 가지고 원수를 이기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은 세상을 전쟁터로 만드는 사탄의 후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물을 다스릴 때 하나님은 인간 자신의 이기적인 동기로 만물을 학대하고 자연을 파괴하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물론 자연 자체가 파괴하고 인간에게 재앙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럴 때 자연을 정돈해서 인간에게 유익하고 자연을 보다 잘 보존할 수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것이 수리 시설이며 물을 보호하이 농사를 잘 짓게 만드는 일입니다. 오늘날 환경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기독교가 마치 폭군처럼 자연을 손상하는 자로 지목하는 것은 성경을 잘 모르고 오해하는 까닭입니다.
성경은 자연을 학대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고기를 먹되 마구 잡아먹고 자기 즐거움을 위해 짐승을 마구 죽이는 일 같은 것을 장려하지 않습니다. 셩경은 자연을 보호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스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자연환경을 보호해야 하며 생산을 위하여 자연을 학대하고 공기를 오염시키고 방치하는 일은 성경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자연은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입니다. 우리 환경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환경으로 지키는 일이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할 일입니다.
結 論
성경만 인간을 가장 확실하고 현실적이고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인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만이 가장 행복한 인간 사회를 바라보게 하시고 가장 행복한 의망의 내일을 약속합니다.
성경만이 인간이 가장 보편적이면서 행복하고 즐거운 가정관을 심어주고 가장 바람직한 친구와 교재를 하고 사람끼리 행복한 사회를 구성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바른 인간관을 심어줄 수 있게 해 줍니다.
성경만이 인간에게 삶의 가치와 목적과 삶의 이유를 가르쳐주며 인간 정체성을 발견하여 자기 의지를 가지고 분명한 동기로 최선을 다하여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그 모든 것을 창조의 기록인 인간 창조 사 하나님은 한마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합니다.
인간은 그러면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소통 대상으로 만물을 중간에서 만물을 다스리며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제사장 직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소통하며 살아야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찾지 못하면 인생이 허무하고 불행합니다. 하나님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중요합니까? 내 존재의 중요성은 스스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세 전에 선택, 예정하셔서 태어나게 하신 것을 믿고 위로 하나님, 아래로 만물을 다스릴 왕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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