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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形象이란 무엇인가? (2020년 5월 10일 주일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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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명길목사
댓글 0건 조회 2,578회 작성일 20-10-17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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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形象이란 무엇인가?


2020년 5월 10일 주일 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창세기 3:26-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27) 


      지난 주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창세기 말씀을 보면서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영이시기 때문에 보일 수 없는 창조주께서 보이고 만질 수 있는 피조물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습니다. 영이시기에 외모나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외모나 육체적인 면을 말씀하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형상”이란 이 한 말씀 안에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주신 천부적 가치와 본질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일까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기독교 역사상 인간이 가진 하나님 형상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어왔습니다. 아직도 딱이 무엇이라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신교와 구교의 해석이 다르고 교파마다 강조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대부분 인간이 가진 이성이나 도덕과 윤리적 성품 등 동물이 소유하지 못한 내면적 성품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데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 형상을 타락으로 전체를 잃은 것일까? 부분적으로 잃은 것일까 부분적이라면 어떤 것을 잃은 것일까? 이 문제는 심각한 쟁점입니다. 왜냐면 성경의 구원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구원은 잃어버린 인간 회복을 말하는데 구원 받은 인간은 받지 못한 타락한 인간과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교는 부분적 타락 혹은 절반 타락론이 우세했습니다. 왜냐면 타락한 우리에게는 아직도 이성이 있고 합리적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남의 형상은 바로 우리의 이성으로 타락한 인간도 이성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였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다 잃었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내용을 보면 인간의 타락은 전적 타락으로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존재임을 분명히 합니다. 

     특히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강조하며 그래서 전적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구제 불능자임을 강조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능력도 없고 구원의 필요성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전적으로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성경은 명확하게 이거다 정의를 내리진 않지만 형상이란 말을 곳곳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내면성을 설명하기도 하고 영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적 존재임을 명시하기도 하며 특히 인간과 함께 하시고 내주하신 점을 볼 때 그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다음 3가지 특징 모두를 포함 영적인 존재라는 포괄적인 말씀으로 받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하겠습니다. 인간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일까? 


1. 共有性品 

     조직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이 가진 성품 중 하나님만이 가진 것과 하나님 인간이 공유한 성품을 나누어 왔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형상으로 만든 인간도 동물이 가진 사랑과는 훨씬 더 고차원적인 사랑을 가지고 결혼도 하고 자식도 키우고 하나님을 사랑한다. 인간의 사랑은 동물의 본능적 사랑보다 훨씬 더 진하고 희생적이며 자손 번성의 본능으로 잠깐 자랄 때까지만 돌보는 모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사랑입니다. 

     특히 진리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적 능력을 주셨고 인간이 진리를 추구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고 참된 것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동물은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진리인지 알 수도 없고 찾지도 아니합니다. 다만 본능적으로 행동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 또한 인간도 거룩을 추구하고 그래서 세상 사람과는 구별되게 행동하고 구별되도록 노력합니다. 거룩을 사모하고 열망합니다. 거룩을 존경하고 가치를 높일 줄 압니다. 거룩을 흠모할 줄도 알고 스스로 거룩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참고 인내하고는 것도 공유적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인간이 돌아오기를 기대하며 참습니다. 잘못할 때 바로 벌하지 않고 회개하기를 기다립니다. 인간이 현재의 고난을 극복하며 내일을 기다리는 인내심은 동물과는 전혀 다릅니다. 

     인간은 현실을 보고 내일을 예측할 능력을 가지고 그 목적을 향해 역경을 참고 견디며 지속적을 목적을 향해 질주합니다. 이 역시 공유적 성품입니다. 

    의를 추구하고 공의를 기리는 것도 또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자도 자기 잘못에 대해서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는 못하더라도 자기 자식만은 나보다 거룩하고 나보다 의로운 삶을 살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쁜 사회도 그 사회의 정의와 공의를 세우기를 원하는 기본적인 열망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까닭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더욱 그렇습니다. 인간은 한계가 있고 완전하지 못하며 타락한 인간은 죄성으로 인해서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기억해야 할 본분은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일입니다. 분수에 넘치는 것은 교만이며 스스로 속이는 일이 됩니다. 이간의 능력은 제한적이며 전능하지 못하고 인간의 지식과 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고 높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무변하시나 인간은 변합니다. 변질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無所不在하셔서 어디에도 계시고 시간과 거리의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적 공간적 제한을 받습니다. 인간은 유한적 존재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구원받아 성령의 9 가지 열매를 맺는 것이 삶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9 가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생활은 자기 혼자 구원받았다고 믿는 가짜 신앙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한 하나님은 구원 받은 우리가 성장하여 점점 하나님을 닮아 가고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를 구원 받은 자의 필연적 열매임을 강조합니다. 성화는 잃어버린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 5:1-2). 


2. 영성(靈 性)

하나님께서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인간도 영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플라톤은 물질세계와 이상세계 혹은 영적 세계가 서로 다른 이원입니다. 플라톤은 물질세계보다 영의 세계가 훨씬 더 본질적이고 완전한 세계라 보았습니다. 후에 이를 보완한 신플라톤주의는 이 높은 영의 세계와 낮은 물질세계 사이에는 계산과 같은 존재로 물질세계에서 영적 세계로 가까이 갈수 있으며 높이 갈수록 더 진실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영향으로 신앙도 영의 세계에 가까워지려면 물질세계를 무시하고 영적인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한때 빠진 영지주의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신학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만들 때 이미 물질인 인간의 육체에 혼을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육체 속에 단순하게 호흡을 불어 만든 생명체가 아니라 생령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을 육체로 대표하지 않고 영으로 대표하게 하신 것입니다. 영적 존재라는 말입니다. 

     굳이 헬라적 이원론으로 설명하자면 물질과 영의 세계 둘 다 소유한 특유한 존재란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영적인 존재로서 만물의 영장이 되고 영성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하나님 형상이었습니다. 영적 존재임을 망각하고 육체적 욕망으로 사는 것은 인간임을 포기한 동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영성의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이며 내면에 하나님을 알만한 능력 곧 양심을 넣어주셔서 하나님의 법도대로 순종하는 윤리적 도덕적 기준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가장 자기를 자기답게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어로 이웃과 소통하여 하나 되고 하나님과 소통하여 하나 되어 만유가 하나 되는 소통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언어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언어를 구분하여 육체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인간이 영성을 잃으면 언어도 타락하게 됩니다. 

     요사이 신앙을 버린 서구나 한국에도 말로 할 수 없는 언어폭력, 언어타락은 영성을 버린 까닭입니다. 싸이버 상의 언어 구시는 도를 넘어 이미 영리한 짐승의 세계에 불과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빼놓고 양심을 논할 수 없습니다. 무신론자는 자기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기가 양심의 기준이 됩니다. 스스로 양심을 조절하는 것은 자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축출했기 때문에 자기의 도덕과 윤리 기준을 자기가 정해서 삽니다. 그러니 자기 양심은 본능적 욕심에 따라 검어지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양심의 기능은 점점 마비되고 양심 있는 자들이 볼 때 이해가 되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이 마비된 사람은 양심을 되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 묵상으로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함으로 양심이 하나님 말씀의 기준을 따라 작동하도록 양심을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세속주의자들은 양심이 엄어지고 변질되고 작동하지 않게 악화됩니다. 양심이 결코 자기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기준이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에게 양심 없다고 탓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하는 일을 옳다고 생각하기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옳은 일을 대적하는 일에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3. 인간 성전(人間 聖展)

    메레딧 클라인 박사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을 입힌 성령님 옷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말로 바꾸면 성령의 두루마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 부흥목사님이 기도하면서 자주 쓰던 말씀입니다. 성령의 두루마기를 입혀주시옵소서.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한 것입니다. 신약적 표현으로 말하면 인간을 하나님의 전 즉 성령의 전으로 지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구약 성경에 인간을 성전이라 지칭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후에 모세의 성막이나 솔로몬의 성전 구조가 당시 이방 것과는 특이하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왜 하나님의 형상을 성령의 두루마기라고 했는가? 신약에서는 왜 성전이라고 했는가? 우선 성전의 모체가 되는 성막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 때 뜰과 성소와 지성소를 만들고 언약궤를 지성소 안에 두시고 그 위를 시은좌라 명명하고 스랍들이 두 날개를 각각 펴서 스랍들을 세워두신 것을 봅니다. 포이트리스 교수는 바로 이 성막의 지성소와 성소를 커튼으로 막고 지성소 언약궤 증 시은좌 위에 스랍들을 두어 하나님과 인간을 접근하지 못하도록 상징적으로 만든 것이 곧 에덴동산의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고 인간과 함께 거주하시며 하나님의 형상과 함께 혼연 일체가 되어 살도록 하셨으나 에덴에서 쫓겨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 가나안 땅에 들이면서 거룩한 한 곳을 택하여 성전을 짓도록 하셨는데 그 성전이 바로 에덴동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성령님은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그들을 둘러싸 부끄럽지 않게 하셨고 그들이 곧 성령님의 형상으로 보이도록 하신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는 뜻을 사용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Tabernacle 했다고 말씀합니다. 장막화한 예수님이 바로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메시야 사역을 하셨습니다.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시고 성령님이 함께 하는 육신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바로 성전이셨습니다. 

     제 2 아담으로서 에덴에 계셨던 그 모습이 바로 성전의 진짜 모습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은 건물 성전을 자랑하는 제자들에게 “돌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무너질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 때 성전 건축을 준비하고 그가 죽자 솔로몬이 다윗에게 주신 말씀을 따라 성전을 지었습니다. 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말씀을 떠나 불순종하자 바벨론 군대가 성전을 무너뜨리도록 그냥 보고만 있었습니다. 성전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 후 70년 만에 스룹바벨에 의해 제 2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그리스와 로마에 의해 무너졌고 헤롯이 제 3 성전을 지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본 것은 헤롯이 지은 성전이었습니다. 너무도 아름답고 큰 대리석으로 지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성전을 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성전이 돌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게 무너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성전을 짓게 하셨는데 성전을 무너뜨리도록 내버려두셨을까요? 성전은 바로 하나님의 상징적 건물인데 왜 그랬을까요? 바로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모형에 지나지 않고 실제적으로는 에덴동산에서 성전으로 아담과 하와를 지었고 그들을 에덴에서 살게 하신 것을 타락 이후에 인간을 다시 성전 삼아 내주하시려고 그래서 진짜 성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인간 성전을 회복시키려고 그러신 것입니다. 건물은 임시적인 하나님의 거주지였으니 이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성전이 회복되어 그 곳에 내주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된 인간에게 거룩한 하나님이 거주할 수 없어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시고 인간을 희다고 의롭게 여기셔서 하나님 성령이 내주하기에 깨끗한 인간 성전에 돌아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6장을 보면 인간이 나면서부터 죄로 가득한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인간 지으셨음을 한탄했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서 성령님이 떠나셨기 때문에 인간은 육체가 됨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떠난 인간은 아직도 하나님의 성품의 일부를 가진 영적 존재였지만 사실상 영적으로 죽어버린 인간이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대속의 제물로 희생되심으로 인간이 성전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서 교회시대로 오는 부활 승천후의 성령 강림은 바로 이런 말씀의 마지막 성취로 기록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정말로 구약 시대에 없었던 놀라운 성령 강림이셨습니다. 그 때 이후 구원받은 성도들의 내면에 거주하시면서 그 사람을 성화시키시고 말씀을 조명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 지상에 하나님 나라를 걸설할 일꾼 삼으신 것입니다. 성전은 교회 건물이 아니고 우리 육체가 성전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니라”(고전 6:16-17). 원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에덴동산의 원래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인간이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나 방황하다가 예수님의 온전한 희생으로 의롭게 된 인간을 다시 성전 삼으셔서 내주하심으로 성전을 회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성령 충만을 위한 것이었고 성령 충만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 모두가 하나가 되어 영원히 살 수 있는 회복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는 성령 충만으로 사는 것이 복되어서가 아니라 자기 회복이며 인간 회복의 진짜 모습이며 성령께서 내 안에서 나를 인도하시고 나의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것이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신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바로 형상의 회복입니다. 


結 論 

     타락으로 인간은 원래 입었던 성령님이 떠나버리고 구약 기간 동안 소수의 지도자 들에게만 강림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었고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소수에게만 보다 하나님 형상을 입게 하셔서 백성을 이끌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나라를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들을 기를 부은 것은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상징하는 예식이었습니다. 특히 선지자와 제사장 그리고 왕을 세울 때 기름을 부어 세웠고 장차이 세가지 분리된 역할을 종합한 한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신 분을 진짜 기름부은자 메시야란 이름으로 보내주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 곧 성령 충만의 대 역사를 제공하려고 진짜 성전을 만들기 위하여 죄 용서를 받도록 그리스도를 희생하신 후 우리의 왕으로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주님 부활하신 그대로 재림하실 것을 약속하시고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초림으로 성전 회복하여 성령님의 인도로 아직도 죄인인 인간을 사용 이 땅에 복음 전파하게 하시고 이제 오실 예수님의 재림으로 모든 구원을 완성하셔서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새 하늘 새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하여 구원의 파노라마를 시작하신 하나님의 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과정에서 사는 복된 새 이스라엘 민족임을 깨닫고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도 성전 건축이 꿈입니다. 구약을 다시 보아야 하고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왜 자기 상징인 성전을 3번이나 헐어버리셨는가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 받아 이방인과 함께 새 이스라엘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천년 왕국이 꿈이 아니라 마지막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하는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알버커키에 거주하는 새 이스라엘 민족으로 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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