創造言約의 恩惠 (2020년 6월 7일 주일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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創造言約의 恩惠
2020년 6월 7일 주일 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창세기 2:4-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16-17)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살게 하시고 그들에게 언약을 맺었습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창세기 6:18에 처음 나타납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여 동산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구 번역은 정령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청년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들어 두고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안 만들었으면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 것인데 만들어 두고 먹지 말라고 금하셨으니 호기심으로 먹고 싶게 만들고 결국 따먹게 된 것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며 그렇다면 원죄는 하나님께 원인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께서 범하도록 만들어주셨으니 차라라 안 만들었으면 인간에게 죄가 없을 것이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 아닐까 반문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만물과 함께 복되게 살기 위하여 인간에게 특권을 주셨습니다. 바로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왕권이었습니다. 인간을 만물을 지배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시기 위하여 특별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고 인간에게 소통할 수 있는 말씀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만물 위에 군림하여 왕 노릇을 잘 하여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의 질서를 유지하고 하나 되게 하여 창조주 인간 만물 혼연일체가 되어 영원히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 관계 형성입니다. 언약을 도입하여 만유를 통치하신 하나님은 바로 만물의 대표 아담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시려고 설정한 것이 금기였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선악과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가장 간단하지만 절대적 명령이기 때문에 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는 엄명을 내리신 것입니다. 창조언약이 갖는 특징은 무엇이며 언약이 인간 삶에 어떤 비중을 차지합니까? 하나님은 사랑으로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간에게 왜 이런 절대적 금기를 두어서 삶을 규제하려고 하신 것일까?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만드셨으면 인간 스스로 마음대로 살면서 행복하게 하시지 않고 왜 금기를 두셔서 죄를 짓게 만들고 왜 타락의 원인이 되는 창조언약을 두셨을까요?
1. 絶對的 言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져 생명을 갖고 사는 에덴 동산에는 2개의 특이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요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아마도 생명나무는 먹으면 영생할 수 있는 생명 유지의 나무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으면 자기가 선악을 알아서 선악의 기준을 정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윤리와 도덕 법률의 기준을 인간이 스스로 정할 수 있게 하는 그런 나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명나무에 대한 금기가 아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금하셨습니다. 왜 금하셨을까요?
선악의 판단은 하나님의 절대 권위 안에 속하는 창조주의 권한입니다. 피조물이 스스로 선악을 알게 되어 기준을 정하면 그것은 부족한 인간이 정하는 것이며 인간은 세간이 갈수록 스스로의 기준을 상대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무감이 사라집니다. 대표적으로 머슬림들은 부인을 4명을 두는 것이 저들의 윤리 기준입니다. 그래서 4명까지는 정당하고 아무런 죄의식도 없고 그것을 따라 삽니다. 여자들의 문제나 아이들의 출산이나 가정에 여자가 시기 질투하는 문제는 4명이라는 기준 때문에 문제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일부일처제입니다. 그래서 결혼한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와 사는 것을 간음이라며 처벌합니다. 일부일처로 함께 사는 것이 명령이며 기준이며 어기면 처벌을 하고 어기지 않은 쪽에서 이혼을 요청하고 결혼을 파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면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상대적 기준이기 때문에 선악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윤리 도덕의 기준은 인간 밖에 존재하는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이며 절대적이기 때문에 처벌이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금하시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며 어길 시는 벌을 할 수 있는 의무감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선악은 하나님이 정하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선과 악을 구분하면 됩니다.
그런데 왜 선악을 알게 되면 정령 죽도록 명령하셨을까요? 왜냐면 선악의 기준을 자기가 만들겠다고 선악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권한을 침범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하나님은 윤리와 행동 율법의 기준을 침범하지 모하도록 생명을 걸고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범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생명을 잃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금기를 두시고 정령 죽게 하신 창조 언약은 절대적으로 지켜 하나님을 위로 섬기고 자연을 다스려는 왕권으로 위로 하나님 아래로 자연을 다스리라는 절대적 명령인 것입니다.
왜냐면 인간의 모든 통치 행위와 활동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준으로 행동해야 되며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법을 순종할 때 깊은 관계를 유지하며 일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을 스스로 정하지 않고 하나님만이 선악을 구분하여 우리가 순종하도록 선을 그으신 것입니다. 피조물이 자기 마음대로 기준을 정하면 피조물 자체의 기준이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하고 부족하고 절대적 가치도 없고 지켜야 할 의무감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각기 자기들이 정하는 기준이 절대성이 없는데 어떻게 의무감이 생기겠습니까?
임마누엘 칸트는 “의무론”에서 윤리 도덕의 의무감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선한 일을 왜 의무적으로 해야 되는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목적론적 도덕이라고 하고 의무감에서 선을 행해야 하는 것을 의무론적 도덕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배제하니 S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면 그것이 기준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의무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한 것은 일반적으로 타고 났으니 의무론적 도덕률을 만들어야 한다고 칸트는 주장합니다. 그러나 외부의 창조주의 절대 권한을 배제하고 인간의 도덕률을 의무화할 수 없습니다. 자율을 주장하면서 도덕의 의무를 앞세우는 것은 자가당착입니다. 깊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왜 우리가 도적질하면 안 되며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결국 우리 한계 밖에 절대적 존재를 부정하면 도덕률의 의무감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많이 고민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 밖에 계시는 어떤 존재가 제시한 기준이어야 지켜야 할 의무감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정한 기준은 도덕적 의무감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금기를 두셨습니다. 도덕적 기준을 하나님이 지키시기 위함이셨지만 금기 자체가 언약을 세우는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집을 사고 팔 때 계약을 합니다. 그 계약에 금기 조항이 없으면 계약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날자를 정하고 어길 시 벌 조상을 두고 안 지키면 계약금을 떼일 수 있도록 금기를 둡니다. 그것이 계약이며 엄합니다. 물론 파는 주인이 마음이 넓어서 돌려주기도 하지만 하여간 계약이라는 것 언약이라는 것은 필수적으로 금기를 필수적으로 명시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절대적인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순종하게 하시기 위하여 언약하시고 금기 사항을 명시하신 것입니다. 먹는 날에는 정령 죽는 금기입니다.
2. 關係的 言約
금기를 조건으로 하는 언약은 언약을 맺은 쌍방의 관계를 맺는 끈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금기를 수행하는 자체가 언약을 생각하고 지켜야 하는 의무감을 동반하고 수행하는 자체가 관계이기 때문에 언약은 관계를 유지하고 지키는 조건입니다.
가장 언약을 이해하기 쉬운 것이 결혼 제도입니다. 대부분의 문화나 전통은 결혼 제도 속에 서약하고 지켜야 할 결혼의 금기가 있습니다. 가정의 핏줄을 지켜야 하는 점도 있고 가족의 질서를 지키며 역할을 분담 함께 의무적으로 같이 살아야 하는 점도 있고 하여간 대부분의 결혼 제도나 예식은 서약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면 결혼 생활은 언약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생을 언약 안에 금기를 지키는 것이 의무입니다.
예를 들면 결혼 언약을 자세히 봅시다. 서로 남남이 연애를 해서 같이 살고자 마음을 모읍니다. 결혼을 결정하게 되면 예식을 통해서 우리는 부부라는 것을 공표합니다. 그래서 결혼식을 하는 것이 정상이며 보통 사람들의 출발입니다.
결혼 언약은 정조를 금기로 정합니다. 만일 부부가 정조를 지키며 다른 사람이 끼어들지 않고 유지하면 가정은 안정되고 유지되며 함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삽니다. 자손들이 생기고 평안한 가정을 이룹니다. 그리고 부부 사이는 한국식으로 말하면 촌수가 없습니다. 자식은 1촌지간이지만 부부는 무촌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제일 가까운 사이입니다. 성경도 부부간 사이가 부자간 사이보다 가깝게 살도록 요구합니다. 서양 사람은 섭웨이를 타고 갈 때 부부간 같이 앉기 위해 아이를 다른 자석에 앉히고 부부간에 같이 앉습니다.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봅니다. 부부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조를 어기면 성경은 죄 없는 쪽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이혼을 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 금기를 깨버렸기 때문에 결혼이 무효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없는 쪽에서 이혼을 제기하고 이혼 후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습니다. 언약 관계이기 때문에 깨지면 남남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서약을 지킬 때 한해서 부부 관계는 유지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언약도 언약을 지켜야 유지됩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십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자기 생명을 저당해서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생명을 저당하는 것이 사실상 언약입니다. 절대적 언약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던지는 각오로 지켜야 하고 하나님은 창조 언약 이후 인간이 파기하여 죽음의 형벌을 받고 영혼과 육체가 죽음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신이 십자가로 죽으심으로 우리와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 언약은 지켜도 안 지켜도 되는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죽음을 저당한 언약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은 생명을 거는 자세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저당한 자세로 죽음을 각오하고 말씀 곧 언약, 신약과 구약 말씀을 지킬 때 하나님과 우리 관계는 유지되며 하나님 형상을 회복한 신자는 새로운 선택된 민족이 되어서 가정이 하나 되고 교회가 하나 되고 머리인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이 땅에 예수 통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뜻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한 덩어리가 되어 함께 살기를 기대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이런 하나님의 계획의 근본을 흔들고 훼방하기 위하여 하와를 유혹 인간이 범죄함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끊어버리게 한 것입니다. 타락 이후 인간은 전혀 하나님을 알지도 섬기지도 인연을 맺지도 관계를 맺지도 못하고 살다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막한 담을 헐고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임마누엘의 삶을 영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늘 내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성령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과 결혼한 신부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3. 恩惠의 言約
이런 관계성과 절대자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삶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와 소통하고 함께 살기 위한 하나님의 최대의 은혜였고 사랑이셨습니다. 사랑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금하셨고 은혜로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 은혜는 아담과 하와가 원한 것도 아니고 요청한 것도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시고 친히 주권적으로 설정한 은혜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3장에 가면 이 절대적 언약을 사탄은 인간을 유혹하여 자기가 하나님같이 된다는 유혹으로 언약을 파괴하기에 이릅니다. 절대적 언약을 파기하여 죽음이라는 가장 무섭고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존재 파멸을 자초한 것입니다. 절대적 언약을 어겼으니 정령 죽으리라는 하나님이 세운 기준과 룰을 하나님이 지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은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죽음을 주셨지만 인간의 죽음은 결국 인간을 통해서 이루려는 하나님의 근본 뜻을 실패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을 벌하신 하나님은 그를 다시 회복할 계획을 세우시고 줄기차게 인간 회복을 향해 역사를 운행하시고 섭리하십니다. 그것이 성경의 구속 역사며 인간 회복을 위해 수천 년의 이스라엘 역사를 주관하시면서 줄기차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시고 그의 오심을 예언케 하시고 우리를 위해 모든 죄 값을 치르게 하시고 부활하셔서 부활생명으로 우리에게 주셔서 세상 살면서 하나님과 다시 관계 회복을 하게 하시고 건전한 가정과 사명 있는 교회를 통해서 하나 되는 일을 이루게 하셔서 장차 예수 만유 통일을 성취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창조 언약을 보다 더 등급을 올려서 회복하시고 창조의 뜻을 완성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시는 꿈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구원역사며 예수 통일은 모든 구속 역사의 종착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이루실 마지막 과업입니다.
하나님은 조건적인 것을 거저 주십니다.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을 받을만한 대상이 아닌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계획하시고 그리스도로 구원하셔서 그리스도의 피로 언약하시고 언약을 세례로 인치셨습니다. 우리가 세례 받았으면 피로 하나님과 서약한 것입니다. 절대적이기 때문에 어기면 내가 죽습니다. 그래서 생명 걸고 예수 믿고 생명 걸고 순종하고 생명 걸고 신앙 생활해야 하지 종교로 믿고 싶으면 믿고 말고 싶으면 마는 그런 미신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신앙은 생명을 거는 절대적 신앙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런 운동이 지금 시급합니다.
왜 미국이 코로나 1위가 되었습니까? 생명 바쳐 지켜야 할 신앙을 버리고 자행자제하며 동성애 퀴어 축제로 성문란의 극치를 보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나라들이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브라질이 지금 2위가 되었습니다.
첨단의 과학, 최고의 의술, 가장 부자의 나라, 조금의 신앙도 있는 것 같은 미국이 지금 성경대로 사는 것을 무시하고 우습게 보고 믿는 자를 꼴통이라고 합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런 서구를 징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의 정수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의 언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신앙의 열을 되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짜로 사랑하지 말고 온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기독교 문화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 한국인들에게 주어진 책무이며 한국 교회의 사명입니다.
結 論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절대자 창조주로서 인간이 정당한 왕권을 발휘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려서 하나님과 한 몸이 되게 하는 일을 이제 예수 통일 왕국 건설로 회복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 언약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복음서에는 말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 나라 건설에 부름을 받은 소명자들입니다. 이 일을 부르시는 마지막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이루며 상급받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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