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으시는 하나님 (2020년 6월 21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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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으시는 하나님
2020년 6월 21일 주일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창세기 3:7-18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사탄의 유혹에 빨려 들어간 하와는 이제는 범죄하지 않을 수 없이 죄의 사슬에 얽매이게 되었다. 얽매임은 인간의 의지를 범죄 쪽으로 속박하는 힘이 있다. 이런 상태에 빠지면 죄 짓는 것이 더 유익하게 보인다. 하와가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가 되어버렸다. 자기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금기의 나무가 먹음직스러웠고 아릅답게 보였고 탐스러워 따서 손에 가지기에 좋을 열매로 보인 것이다. 하와는 육신의 육감 감정을 온통 빼앗겼던 것이다. 소위 안목의 정욕에 휩싸여버렸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눈은 독특해서 마음의 창, 등불이라 불리웁니다. 마음에 심어진 감정에 가장 영향을 주어 마음을 조절해버리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이 일으키는 안목의 정욕은 대부분의 죄악된 행동의 시발점이 된다. 예수님은 여인을 보고 지나치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이미 간음죄에 속한다고 경고하셨다. 안목의 정욕을 잘 조절할 수 있는 인격 양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볼 것을 보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은 삼가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비결이라 할 수 있다. 안목의 정욕은 자기를 얽어매는 힘을 발휘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뜨리기 때문이다.
하와가 나무를 보고 견딜 수 없어 따서 먹도록 행동화시킨 것은 사탄이 손을 끌어 시킨 것이 아니라 하와 자신이 행동했다. 하나님의 금기 사항을 어기게 된 것이다. 사탄은 인간의 이런 약점을 잘 알고 선악과를 자기가 따서 준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에 안목의 정욕을 일으켜 불순종하게 한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하와보다 더 이런 정욕에 차 있는 죄성의 소유자임을 자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딴 선악과를 남편에게 주어 같이 범죄하는 장본인이 되었다. 남편을 도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도록 해야 할 아내의 역할이 남편을 함께 범죄에 동참하게 하는 아내로 돕는 배필의 역할을 완전히 실패했고 결국은 인류를 죽음으로 모는 죄를 범한 것이다.
죄를 지음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어떤 결과가 오고 하나님은 죄 지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를 유혹한 사탄에게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1. 스스로 숨은 죄인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 그리고 유혹한 사탄에게 벌하기 전 범죄한 아담 부부에게 먼저 자신의 행위가 달라졌습니다.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는 즐거움은 없어지고 그들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의 벗은 몸을 보고 수치심을 나타냈고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서로 둘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반가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나무 사이로 숨었습니다.
하나님의 형벌을 받기 전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 하나님의 낮을 보는데 어려움을 느꼈고 음성을 듣고 오히려 자기를 숨기는 죄의식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근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아주 세밀하게 인간의 본질적 상태로 잘 묘사했습니다.
인본주의 계몽 철학이 하나님을 몰아내고 인간 스스로의 자율권을 선언했습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하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 없고 이제 과학이 발달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다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인간 만능주의, 인간이 스스로 윤리 도덕의 기준을 마련하고 인간 스스로 자기의 일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한 후로 서구 사회는 인간 낙관주의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정치가 바뀌고 교육이 바뀌고 점점 서구 사회에서 하나님이 설 곳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몰아낸 독일 이성 철학자들은 결국 공산주의를 만들고 히틀러 독재 정권을 창출했습니다. 1,2차 세계 대전으로 수많은 목숨을 잃은 후 인간을 낙관적으로 보지 않고 실존 그대로 보는 운동이 일어난 것이 실존주의 철학입니다. 낙관이 비관이 되었고 인간에게 있는 실존적 현실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간의 죄의식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왜 근심과 걱정이 누구에게나 내면에 자리 잡고 있을까? 왜 인간은 근본적으로 고독한가? 왜 인간은 항상 불안한가?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실존을 그대로 파악하고자 한 것입니다.
인간이 실존적 존재가 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어긴 죄의 결과로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기 전 이미 죄의식으로 휩싸인 실존적 존재로 타락한 것입니다. 이 실존적 본질은 이미 창세기 3장에 나타난 인간의 기본 모습입니다. 이런 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쾌락에 빠지고 육신의 쾌락을 위해 자해할 정도록 이상한 행동을 하며 육신을 충동해도 잠시 뿐이고 근본적으로 인간은 불안하고 고독하고 어둡고 좌절하고 절망적인 것을 찾아낸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이 절대적 언약을 어긴 후 나타난 자신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아담은 먹으면 자기들이 하나님 같이 될 출 알았는데 실존적 존재로 타락한 것입니다. 하나님 낯을 피하여 숨게 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거북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피하게 된 것입니다. 죄인은 성경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하나님을 대하기를 참으로 꺼려합니다. 자기 죄성에 대한 반응이 비정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하나님의 벌을 받기 전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또스또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이 소재로 소설을 써서 유명해졌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라스콜리니코프는 사회주의자였습니다. 주인공은 영특한 수재였는데 돈이 없어 공부하기 참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그가 물건 잡히고 돈을 받은 전당포 주인은 나이 많은 늙은이였습니다. 그래서 이 늙은 망구를 죽이고 그 돈을 빼앗아 자기같이 유망한 청년이 공부하여 위대한 사람이 된다면 사회에 유익이 될 것이라고 확신 그를 죽였는데 죽인 후 상황은 영 달랐습니다,. 8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 전부가 그가 형을 살기 전 받은 죄의식으로 고통스러운 생활을 묘사한 것이 대부분의 소설 이야기입니다. 죄 짓는 것이 정의처럼 보였으니 사실은 마음에 못처럼 박혀버린 죄의식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엄청난 형벌이었습니다. 그것이 소설입니다.
인간의 실존적 불안과 죄의식은 심리학의 가장 큰 관심거리입니다. 프로이드는 죄의식이 모든 정신 질환의 원인으로 정신분석학을 정립했습니다. 그 죄의식은 성적인 욕망을 거부당함으로 마음에 생긴 것이라 해서 정신 질환자를 분석해보면 이런 욕망 좌절의 아픔이 있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잘못된 분석입니다. 인간을 성적 욕망의 동물로 본 잘못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것은 죄의식이 얼마나 정신 질환에 영향을 주는가를 발견하 것입니다.
어려서 무슨 일을 당하거나 용서할 수 없는 공격을 받거나 죄를 짓고 나면 평생 죄의식이 작용해여 불안한 정신 질환을 앓게 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실존적 모습입니다. 불행은 하나님의 진노로 출발한 것이 아니고 범죄 그 자체가 이미 자신을 불행으로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공포가 커집니다. 마음의 미움과 원한이 더욱 자기를 얽어매어 죄의 노예로 삼습니다.
2. 어디 있느냐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숨은 아담 부부를 찾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그가 숨어 있는 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알고 계셨지만 찾으셨습니다.
스스로 괴로운 범죄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찾으셨습니다. 모르고 찾은 것이 아니라 찾아 죄의 상태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찾으신 하나님은 마귀에게 내리신 형벌 가운데서도 장차 인간 곧 여자의 후손들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를 약속하며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도 잃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가복음15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를 보십시오. 99마리가 있음에도 한 마리 양을 찾으시는 하나님, 드라크마 비유를 통해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찾았을 때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찾고 기뻐하시는 하나님, 잃은 둘째 아들이 돌아오자 그를 영접하며 송아지를 잡는 탕자의 비유 모두가 찾으시는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내가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예정하시고 성령님을 통해 나를 이미 변화시켜서 성경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먼저 찾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찾으십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한 사람을 찾으셔서 구원해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돌아옵니다. 그 간절한 사랑에 감탄하게 됩니다.
물으십니다. “어디 있느냐?” 왜냐면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이 대단해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을 지금 하고 있는지 자각하는 것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교회에 교회와 관련되거나 전도하는 장소에 있을 것이지만 죄를 범하고 있으면 남이 보지 않는 곳에 비밀스러운 곳에서 남에게 하나님께 들킬까 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비밀스러운 곳에 있을 것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과 장소에서 빨리 탈출하는 것이 죄를 빨리 회개하는 길입니다. 빨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입니다.
베드로가 실망하여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던 어부로 돌아갔을 때 예수님이 찾아가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3번을 물으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는 야수님의 마음을 깨달은 베드로는 사도가 되어 순교를 당했지만 천국 열쇄를 쥔 사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질문하십니다. 나를 회개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3. 행위대로 벌하시는 하나님
질문하는 하나님께 자신의 죄부터 솔직하게 고백하지 아니하고 아담은 자기의 뼈였던 하와가 주어서 먹었다고 핑계했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회개보다는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죄를 졌다고 변경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아내가 주었다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이 있으니 나는 먹을 수 없고 당신도 먹지 말아야 한다고 결단코 먹지 말라 했어야 하는 남편인데 먹고는 그가 주워서 먹었다고 했습니다. 언제는 한 몸이고 언제는 범죄하도록 협조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참 사실적이고 정확한 고백이기는 합니다만 남편으로 할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내가 죄를 짓도록 유혹해도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는 것이 남편의 의무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죄가 없다는 핑계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그 여자라는 말 속에는 자기는 결혼하고 싶지 않은데 누가 여자를 달라 했습니까? 주신 그여자가 범죄케 했으니 하나님 당신이 범죄의 원인입니다 라는 주장입니다.
핑계거리를 찾는 것은 본능적입니다. 그러나 “나 때문입니다”를 말할 수 있도록 자기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회개한 자의 기본자세입니다. 자기는 아니고 누구 때문이라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은 핑계 잘하는 사람들을 경계하십니다. 하와도 같은 핑계입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사탄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금기를 언약 삼아 지키도록 함으로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언약 관계를 설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뱀이 꼬였지만 넘어진 책임은 하와에게 있고 그것을 아담도 먹게 한 장본인입니다. 돕는 아내의 직분을 망각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뱀에게 먼저 벌을 주시며 장차 뱀을 멸망시키고 인간을 구원하실 원시복음을 말씀합니다. 사실상 구약 전체는 하나님께서 이 말씀 한마디를 이루기 위한 구원역사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수 천년 후에 일어날 메시야로 하여금 사탄을 말살시킬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하와에게는 자녀 낳는 축복이 고통을 겪도록 임산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셨습니다.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지배하려고 하고 하는데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라 했습니다. 협력의 부부간을 지배욕의 싸움이 계속될 것을 주신 것입니다. 이 때부터 부인은 남편 지배욕으로 싸우고 고통하는 부부 생활이 된 것입니다.
아담에게는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팽셩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셨습니다. 자연이 순종하는 창조 질서가 파괴되어 아담에게 수고하도록 자연이 반역하고 나중에 보면 땅에 씨를 뿌리면 엉겅퀴가 나서 인간이 소망하는 대로 순종하는 자연이 아니라 방해하고 힘들게 하는 자연으로 바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주신 징벌입니다. 그 벌은 지금까지 진행되며 예수 안에서 해결되고 죄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인간을 괴롭히는 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 완전한 타락은 결국 인간에게 고통과 절망 아픔과 좌절의 생을 살며 땀 흘리고 고통을 수반한 죽음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벌하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쫒겨나 방황하며 생을 살다 죽어야 할 존재가 되었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고독과 절망과 낙담 속에서 죽음을 향해 가는 죄인이 된 것입니다.
結 論
범죄한 인간을 찾아오신 공의 하나님은 인간을 벌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형벌로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구속의 약속을 합니다. 찾으셨으나 죄는 벌하시는 사람과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죄를 졌어도 사랑하십니다. 찾으십니다.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무참히 죽이실 만큼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러나 쓸모없는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값으로 주실 만큼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죄는 아들을 죽일 만큼 미워하시고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되 아들만큼 사랑하십니다. 나는 예수만큼 값이 나가는 존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구원은 영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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