失樂園의 悲哀 (2020년 7월 5일 주일예배 설교)
페이지 정보

본문
失樂園의 悲哀
2020년 7월 5일 주일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창세기 3:22-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24).
성경이 다른 주된 종교와 다른 점은 하나님은 창조 후 가장 좋은 낙원에서 살도록 첫 가정을 거기 두셨으나 범죄로 잃어버렸는데 죄로 낙원을 상실하고 괴로운 세상에서 살다가 하나님께서 회복하여 주시는 더 좋은 낙원을 바라보게 한 것이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우리가 갈 더 좋은 낙원에 이르기 전 우리는 아직도 괴로운 인생길을 가야 합니다. 참 살기가 뻑뻑합니다. 예수 빼버리면 사는 것이 지옥이며 고난의 연속입니다. 인생을 누가 기쁘다고 하겠습니까? 예수 없는 세상은 사실상 지옥의 연장입니다.
우리가 상실한 낙원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성경은 미사여구를 사용 아름답다 묘사하지 않습니다. 사실을 기록합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실과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르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하모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셀째 강의 이름은 헷데길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8-15)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낙원을 지으시고 거기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낙원에서 쫒겨나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실낙원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 돌아가는 허무한 인생으로 징벌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실낙원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만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불행한 삶을 사는 동안 인생으로서 너무나 소중한 것들을 상실하고 그것 때문에 인생은 더 불행하고 불쌍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실낙원으로 잃은 근본적 인간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왜 실낙원보다 이것들이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까? 왜 인본주의자들은 스스로 낙원을 인위적으로 건설하는 실패를 거듭하면서 고집스럽게 공산주의를 실현하려 합니까? 이런 죄악들이 아직도 인간들에게 삶과 역사적 도덕과 윤리적 문제가 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아직도 치열한 사탄과의 전쟁을 해야 되는 고달픈 인생들이 된 것입니까? 왜 지금도 코로나 병이 번진 가운데 사회는 불안하고 무질서하게 됩니까?
1. 目的失踪의 悲哀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 언약을 파기함으로 하나님은 인간을 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공의를 실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점이 아닙니다. 천사의 세계가 있고 사탄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공의로운 의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벌했습니다. 그런데 구체적 저주를 하기 전에 이미 그들이 범죄함으로 인해 인간에게 축복으로 주신 사명 성취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부부간에 하나가 되고 만유를 다스리는데 협력하고 도우라고 결혼을 시켰는데 그만 여자는 남자 지배욕이 생겼고 남자는 무력으로 이를 제지하고 오히려 여자를 다스리는 부부간의 투쟁이 자연적으로 내면에 생겨버렸습니다. 죄의 본성들이 나타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생의 목적인 하나 되게 하는 목적이 상실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만물을 잘 다스려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간에 벌써 투쟁이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왜 인간이 존재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창조 시 주신 목적을 수행할 수 없게 투쟁의 인생이 되었습니까? 타락입니다. 죄인은 자기 존재 이유를 알 리도 없고 그것을 인식할 능력도 없었고 내면에서부터 경쟁하고 싸우는 심리적 갈등이 생겨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산에서 쫓겨나 죽는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목적을 상실한 인간은 징벌로 주신 고통과 해산의 고통을 지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목적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길을 가는 사람이 가야 할 목적지가 없다면 방황하게 되고 갈 길이 멀게 느껴지고 가는 것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인간이 살면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고 사는 이유구 분명하지 못하면 매일 사는 의미를 찾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대학 입시가 목적이면 학교에 가든 과외 공부를 하든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시험을 합격해야 한다는 구체적 목적 때문에 공부하는 일이 의미가 있고 그렇게 되어야 좋은 대학 가고 돈 벌어서 잘 살 수 있는 두체적인 할 일이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목적을 찾아 사는 존재임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축복은 사실상 목적으로 말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담을 만드신 분명한 이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약에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보면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4:1-6). 하나님께서 가정을 주시고 교회를 주신 것은 처음 주신 것은 하나 되는 일이었는데 이 목적을 상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구원하시고 다시 회복하여 만유가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는 목적을 찾아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이 하나 교회가 사회와 국가가 하나 세계가 하나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로 만유 통일을 해야 할 사명의 전초지로 교회를 설명하며 은사는 각기 다르되 이를 합하여 한 몸으로 교회를 이루어야 함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 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지금도 사탄이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미 타락한 우리 내면에 이미 죄성이 작용하여 하나되는 것을 방해하며 부부간에도 계급투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문화 막시즘으로 여성 운동가들이 활발하게 남성을 비판하고 남자 위에 군림하려고 합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대우가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에서조차 근본적으로 여성 비하는 없습니다. 물론 죄인된 인간들이 살았던 성경 시대 유대인이나 이스라엘 나라에 있었던 죄악들은 표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로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영어에 Differnece와 Discrimination은 다릅니다. 차별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르게 만든 것은 만물을 다른 종류로 만드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3위로 서로 다르게 존재하면서 다른 역할을 하면서 일체의 하나님으로 존재하는 것과 같이 인간도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하나 되는 일로 소통을 통해서 일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영장으로서 제일 먼저 실행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하나되는 일을 할 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또한 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질서 체계를 세우고 가정을 질서 있게 꾸려나갈 때에 서로 다름이 오히려 장점이 되어 더 풍부한 인간관계를 도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이며 축복입니다. 그런데 목적을 상실한 인간은 이렇게 다투며 할 일도 못하고 살다가 허무하게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목적이 없으니 인생이 허무하고 의미가 없고 살 이유가 없으니 허망하고 좌절하면 넘어지고 살맛이 나지 않는 절망적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는 분명한 목적 의식이 있기 때문에 삶에 힘이 생기고 사는 이유가 분명해진 것입니다.
2. 善惡自律主義 悲哀
두 번째 비극은 2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시며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말씀하면서 내보냈습니다.
선악을 아는 것은 어떻게 보면 좋게 보입니다. 인간이 선악을 알아야 선을 행할 수 있지 선악을 아는 것은 참 좋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선악의 기준과 정의는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임을 분명히 하며 이를 안다는 것은 선악을 인간이 결정하고 자기 결정으로 선악을 판단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해야 할 선악 결정권을 인간이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나쁜 것입니까?
근대 이성 철학자들 까지도 인간에게 왜 악이 존재하게 되고 인간이 선한 것을 행해야 할 의무가 왜 주어지는 것일까 참 의문을 가졌습니다. 가령 다른 곳에는 일부다처 사회인데 왜 우리는 한 여자 혹은 한 남자와만 평생 살아야 하는가 의문이 생깁니다. 서로 싫으면 헤어져 살면 되는 것이지 꼭 내가 낳은 자식만 내 가족인가? 데려다 살면 되지 왜 한 여자에게 메여야 하는가 바꾸어가며 살면 안 되나? 바로 지금 동성애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도덕적 의무감을 정하려면 스스로 정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외부의 절대적 존재가 부여하여 의무감을 주어야만 도덕적 윤리적 의무감을 지켜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에서 질문하고 설파한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도덕 윤리는 종교 분야가 다루어야 할 문제지 철학자들의 소관이 아니고 특히 기독교적 윤리 전통은 절대적 하나님께서 정해서 주어야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 오다 가다 만났다 하지 않고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여 부부가 되었다고 선언하는 이유는 그래야 부부가 우연이 아니라 절대적 숙명이 되어 헤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도덕은 인간이 스스로 결정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이 선이라 하면 선이고 선악의 기준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철학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시스탬입니다.
선악을 알게 되어 쫓겨난 인간은 이후로 여러 부분에서 스스로 선악을 결정하고 자기가 옮은 대로 행했습니다. 죄인된 인간이 정한 것은 죄 있는 기준밖에 정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 하나님이 되어 자기 편할 대로 정한 기준은 죄악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행위의 기준을 정하는 것을 자율주의라 합니다. 그 실례를 들겠습니다.
지금 미국이나 한국의 초등학교에서 성교육을 시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들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어 성생활을 통해 사랑하며 자식을 낳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좌파 동성애자들은 성이 양성이 아니라 성 전환자 성 습관이 다른 자 여러 종류의 다른 성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성으로 살든 중성으로 살든 성전환으로 살든 동성애로 살든 13살 아이가 스스로 정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그런 잘뭇된 성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다른 상대방을 골라 어떤 형태로 성생활을 하든 자기가 정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잘못 정했다고 부모가 간섭하는 것은 인권침해라고 합니다. 우기고 간섭하러 들면 아이 자율권을 침해했다며 인권보호법을 적용해 부모를 감옥에 보내고 이런 동성애가 잘못되었다고 가르치는 목사를 감옥에 보내는 것입니다. 자율권을 빼앗아 스스로의 삶을 자기들이 정했다고 좋아하지만 지금 젊은이들이 얼마나 퇴폐문화에 빠져고 성 도착증에 빠져 자신의 생을 망치고 있고 마약이나 기타 중독에 빠져 인생을 망치고 있습니까? 이런 것을 부추기는 것이 기독교와 가정을 파괴할 목적으로 암암리에 활동하는 문화 막시즘입니다. 어제 트럼프 대통령이 일부러 대통령의 얼굴을 새긴 러쉬모어산 아래에서 독립기념식을 하면서 첫 마디에 미국의 문화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좌파 문화가 사회적 문제를 이용 이 땅에 민주주의 국가를 설립하고 고귀한 가치를 심었는데 저들의 문화를 완전하게 파괴하고 있다고 전쟁 선포를 했습니다. 저는 문화 막스주의를 공부하면서 지금 심각한 미국의 퇴폐 문화를 경험하면서 위기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법을 순종하면 되지만 하나님을 내 쫓아버리고 자율자가 된 인간의 비극입니다. 그래서 동성연애나 퀴어 축제가 강한 나라 별로 하나님의 코로나 징계가 나려지고 있는 것을 아는 나는 미국이 이번 기회에 진심으로 회개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참으로 교회가 회개하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회개하고 성경을 무시하는 교만한 인본주의 철학자들이 회개해야 하며 좌파 민주당이 회개하고 우파의 편견자들이 회개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지금 자율주의의 썩은 열매를 먹고 사는 21세기 기독교 국가들의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참으로 말세가 다가온 것입니다. 심판이 무섭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생각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기준을 정하고 율법을 주시고 십계명을 주신 대로 순종하여야 할 인간들이 스스로 도덕률을 정하고 자기 소원대로 행함여 다른 사람을 짓누르고 하나님을 배척한 삶이 결국 스스로를 멸망으로 빠지게 만든 구덩이를 파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자율주의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어 사니 의견이 모아지질 않고 개인이 다 하나님입니다. 분열되고 일치돔이 없고 싸움만 계속되고 계급 투쟁이 끊이지 않는 현실인 것입니다.
3. 永生喪失의 悲哀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에서 내 보내며 에덴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했습니다. 죽어야 할 인간이 생명나무를 훔쳐 먹지 못하도록 천사들을 동원 불칼로 길목을 지킨다고 했습니다. 영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평생을 지배해서 죽지 않고 살아보려고 발버둥하며 인생을 온통 건강에 관심 갖다 아무 일도 못하며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영생의 소유자로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영생이 가능할 것인가? 그런데 제 딸이 고등학교 졸업 논문이 원래 인간에게 있는 세포의 수명 문제였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인생이 영원히 산다 했는데 왜 죽을까를 연구해보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원래 세포는 영생하도록 지어졌지만 노화되어서 죽게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왜 노화되어 죽을 보녀 인간이 화를 내거나 스트레스로 마음이 괴로울 때 스스로 몸에서 나는 효소가 있어 그것이 세포를 죽인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평화롭게 아름답게 즐겁게 살아야 하는데 죄악된 세상을 살며 온갖 고통과 번민 실패와 낙담 사람간 투쟁과 불목으로 스스로 세포를 죽이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질 사나운 사람들이 빨리 죽는 이치가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즐겁게 살면 오래 살고 건강합니다. 즐거울 때 나오는 효소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활장에서 죽음의 공포에 대해 말합니다. 죽음의 영향을 “사망아 너희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5) 이렇게 질문합니다. 예수 부활로 죽음을 승리한 기독교인의 부활을 설명하면서 죽음을 독화살에 비유해서 그것을 맞으면 독이 몸에 퍼지는 것처럼 죽이의 독화살이 인생을 쏜다는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독화살입니다. 이것을 맞은 사람은 죽음 때문에 실망감 좌절감, 절망감, 낙담으로 살맛을 잃습니다. 그래서 자살합니다. 영생을 모르기 때문에 한 번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 생각해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살려고 발버둥입니다. 안 죽으려고 약을 먹고 몸에 좋은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 먹습니다. 너무 이기적입니다.
코로나 질병이 돌기 때문에 더 발버둥칩니다. 행여라도 병을 옮길까 봐 사람 만나기를 꺼려하고 제가 선교를 갔다 와도 자기에게 병을 옮길 수 있다고 욕을 바락바락 합니다. 참으로 자기 목숨만 연장하려는 참 이기적인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불신자 초신자가 아니라 교회 권사가 장로가 그런 죽음의 독화살을 맞아 바른 인생을 살지 못합니다. 참으로 불쌍한 존재입니다. 영생을 얻지 못했고 믿지 못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은 예수님이 죽으실 때 십자가에 같이 죽었고 부활할 때 같이 부활했습니다. 그것을 알게 하신 이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변화시켜 중생한 사람으로 내가 구원받은 확실한 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 믿을 때 이미 나는 부활한 사람으로 영생이 보증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 살 때는 주님 하나되는 일을 위해 살고 죽으면 하나님 나라에 가도록 보증된 삶인데 무엇이 그리 두렵고 안 죽기 위해 발버둥하며 목사에게 욕이나 퍼붓는 그런 망난이 구신자들이 됩니까? 이런 무늬만 신자들이 바로 코로나 질병의 심판을 인식하고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알렉산드리아에 페스트 병이 창궐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기 살기 위해 가족도 자식도 부모도 버려두고 피신했습니다. 거리에 병자들이 득실거리고 버려진 아이들을 돌볼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나타났습니다. 병에 걸려서 죽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기독교인들이 돌보다 병 걸려 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죽어도 천국가고 살아도 주 위해 사는 것을 안 기독교인들은 거리의 병자를 거두어 돌보고 시체들을 장사해주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 지식층은 병에 걸려 도망해서 자기 혼자 살리 했습니다. 그러나 이 병이 지난 후 기독교인들을 사라들은 인정하기 시작해습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 전파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참으로 죽음을 무릅쓴 희생적 정신이 그들을 영원히 살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복음을 위해 죽으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혼자 살려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안죽기 위해 발버둥하는 기독교인들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허무한 인생을 자기 목숨 위해 살다가 결국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 절망으로 울며 지옥을 가게 될 것입니다.
結 論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락원은 근본적으로 인생의 목적을 상실하게 했고 스스로 하나님 역할을 하려고 자율권을 행사하는 자신이 자신의 신이 된 자율적 인간은 스스로 무덤을 팠습니다. 그 무덤 때문에 인생을 절망하고 죽음의 위협에 쌓여 혼자 살려고 발버둥하다 지옥에 빠지는 것입니다. 참 허무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여 목적을 찾아 주셨고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셨으며 우리를 건강하게 하고 복되게 하려고 하나님이 기준을 정하시고 우리에게 순종을 통해 복된 삶을 의미 있게 살도록 권면하시고 필경은 타락하여 하나님을 저버린 인생들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셔서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부활시켜 우리들의 주가 되게 하셨으며 우리에게 예수 통일 나라 건설의 역군이 되어 살다가 하나님 부르시면 영원히 함께 살도록 영생이 바로 오늘 시작되도록 구원하신 것입니다. 완전힌 인생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 이전글첫 가정의 비극 (2020년 7월 12일 주일예배 설교) 20.10.22
- 다음글아담 言約의 特徵 (2020년 6월 28일 주일 예배 설교) 20.10.1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