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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가정의 비극 (2020년 7월 12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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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명길목사
댓글 0건 조회 3,043회 작성일 20-10-22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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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家庭의 悲劇


2020년 7월 12일 주일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창세기 4:1-15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


     아담과 하와가 첫 아이를 낳았습니다. 가인이라고 지었는데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해서 지은 이름입니다. 부모인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낳은 아들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아들이라 했습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아벨이라는 뜻은 물방울 혹은 허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이름을 지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두 번째 날 때쯤에는 아담과 하와도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기 때문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월이 지나고 가정을 꾸려갔지만 죽어야 하는 자기 인생을 포현하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 그대로 아벨은 허무한 생을 죽음으로 마감했습니다. 사실상 자녀들의 이름도 잘 짓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름대로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쫒겨났지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습관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배드리는 첫 가정이 된 것은 축복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 되어 자기 농산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아벨은 양치는 목축업을 했기 때문에 양 곧 양의 첫 새끼를 잡아서 피흘려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안 받으셨을가요? 혹자는 가인은 곡식으로 드렸고 아벨은 양으로 드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화가 난 가인을 카운슬링하는 것을 보면 제물에 따라 어떤 것은 받으시고 어떤 것은 안 받으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후에 제사 제도가 생긴 후에 하나님은 곡식의 제사도 받으시고 양의 제사도 받으셨음을 볼 수 있다. 둘 다 필요한 제물이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3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헌신이고 하나는 대속이며 세 번째는 감사입니다. 내가 전체를 불 태우듯 제사는 “생명을 죽여서 내가 죽음을 저당하는 제사를 드립니다”는 뜻으로 아벨은 짐승을 죽였을 것이며 가인은 그런 정신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언약할 때 짐승을 죽이는 것은 자기 생명을 저당하는 뜻입니다. 내가 약속을 어기면 이와 같이 죽겠습니다는 자기 생명의 저당이 제사입니다. 그래서 제사 때 번제는 전체를 다 태워 자신을 드리는 대신에 짐승을 죽이고 태워 전체를 드립니다. 내 자신을 전부 드립니다 이런 뜻입니다. 대속의 제사는 모세가 율법을 줄 때 제사 제도로 짐승에게 손을 얹어 죄를 전가시켜서 죽입니다. 대속의 뜻입니다. 양을 내 대신 죽이고 나는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대속의 제사 제도가 생기기 전이기 때문에 아벨이 특별히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다고 해서 아벨의 제사를 받아드렸다고 보는 것은 사실상 모세 이전의 첫 제사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은 해석은 아닌 것 싶습니다. 아직 인간에게 육식을 허락하신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양을 죽여서 제물로 드린 것이 후에 대속의 뜻을 가진 제사제도로 아벨의 제사를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아마도 제사의 자세와 정성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경고하며 죄짓지 말라 하시는 것을 보면 결코 제물 때문이 아니고 그의 제사드리는 자세 때문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여간 하나니은 제사 드리는 태도를 보시고 받으셨습니다. 아마도 대속의 뜻은 아니지만 짐승을 죽여 드리는 정성을 보고 아벨은 내 생명을 바치듯 짐승의 생명을 바쳐 생명의 제사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대속의 뜻만이 아니라 헌신의 뜻을 더 기리십니다. 제사의 헌신의 뜻은 대속의 뜻보다 앞섭니다. 지금도 예배는 헌신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에 헌신의 뜻이 사라지면 예배가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한 예배는 거부하십니다. 요사이 예배가 참여자를 즐겁게 하는 예배로 전락하는 것은 대단히 예배의 뜻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헌신입니다. 예배는 내가 죽는 죽음이요 용서를 받고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 예배이며 함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 순서나 방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비슷하게 짜서 편하게 드리는 것이 새로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예배 모범으로 거룩하게 드려야 하며 감사로 헌신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1. 慈悲로운 警告

     가인은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하나님께 몹시 화가 났습니다. 안색이 변했다고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 창조주로 절대적 하나님이십니다. 안 받으시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럴 때 인간의 자세는 먼저 원망하고 하나님께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께 분노를 한 것입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판단의 근거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판단으로 하나님께 화를 내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된 까닭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약의 기준을 자기에게 둔 까닭에 하나님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타이릅니다. 그에게 더 큰 죄를 짓지 아니하는 3가지 중요한 충고와 함께 경고 멧세지를 보냅니다.

     첫째 양심의 소리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가인에게 양심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양심이란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좋아하시는 것을 알 수 있는 거울 역할을 알아 하나님의 선악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볼 수 있게 하는 거울과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양심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것인데 그 양심은 변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기도로 하나님과 늘 접촉하면 양심의 거울은 빛이 나고 깨끗해져서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쉽게 볼 수 있게 깨끗해집니다. 그런데 양심을 닦고 깨끗하게 하지 못하면 검어지고 못쓰게 됩니다. 그런 양심을 가진 자들을 양심이 없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양심이 깨끗해지지 못하기 때문에 불신자가 진실한 양심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불신자는 자기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양심대로 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생각대로 선악을 정하고 자기 생각대로 판단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자기를 신봉하는 미신을 만들어 자신을 섬깁니다. 그것이 무신론자들이 악해지는 방법입니다.

     둘째 악의 유혹을 받지 않으려면 선을 끊임없이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악을 물리치는 방법은 악한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은 여유가 있으면 선보다는 악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씀합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무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엎드려 있다는 말은 죄가 나를 내 집 앞에 와 기회를 노린다는 말입니다. 선을 쉬지 않고 행하면 죄가 우리 집에 방문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도적질하는 자에게 비난만 하지 말고 그에게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서 바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선을 행하면 악이 방문하는 기회가 낮아집니다. 유혹받는 기회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대가 사람들이 죄 짓는 것을 보면 한가해서 할 일이 없을 때 죄가 찾아오는 것을 봅니다. 한가할 때 나쁜 짓이 유혹합니다. 일에 부지런하고 시간이 모자라게 선을 행하는 자는 죄지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바쁘게 선을 행하여 악이 찾아올 기회를 주지 말게 하라고 하십니다. 아마도 가인에게는 정성드린 제가가 아니라 곡식으로 드리면서 시간이 많이 남아 자기 제사를 받지 아니한 하나님에게 불쾌감이 들었던 모야입니다. 바쁘게 선을 행하면 선으로 악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셋째 죄의 속성을 알고 죄를 다스리라고 권면합니다. “죄가 너를 원하니 너는 죄를 다르실지니라.“ 여기 원한다는 말은 전에 말씀 드렸습니다. 하와가 범죄한 후 마음에 생긴 욕망이 ”원한다“는 말입니다. 전에는 이 말을   ”사모한다“로 잘못 번역했습니다. 여기 하와가 원한다는 단어와 사탄이 원한다는 단어가 같은 히브리어입니다. 죄가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바로 가인을 지배해서 죄를 짓게 만드는 소원입니다. 죄가 가인을 다스리려는 욕망을 ”원한다“고 표현했습니다. 하와가 범죄했을 때 도와야 할 남편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기기 된 것입니다. 가인에게 죄가 문에 엎드려 기회를 보면서 가인을 지배할 기회를 노리는 것입니다. ”지배욕, 권력욕“은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돕는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돕는 자(에젤)“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는 유혹하여 나를 지배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범죄하게 만듭니다. 그런 지배욕이 작용하기 전에 가인은 스스로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가인에게는 아직 죄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죄가 문 앞에 오지 않도록 선을 늘 행하여야 하지만 어떤 때 찾아오거든 죄의 속성을 알고 죄를 다스려서 더 이상 범죄의 길로 가지 말라는 경고이며 가이드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 兄弟를 죽인 가인

     하나님의 충고를 들은 가인은 더 분이 치솟았습니다. 마음에 이미 아우를 죽일 계확을 한 것입니다. 8절을 보면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았을 때에 아벨을 쳐죽였다고 했습니다. 고대 사본을 보면 “우리가 들로 나가자”란 말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맞을 것입니다. 가인이 죽일 마음을 가지고 동생을 들로 유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들로 나가자 왜냐면 부모가 있는 집에서는 불가능하므로 들로 나가서 쳐죽이려고 유혹한 것입니다. 분노는 살인을 낳게 됩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성불가침의 성역에 속합니다. 누구도 생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신성하고 고귀하며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역사를 보면 이런 신성한 생명이 수 없이 죽임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독재자나 전체주의자들은 자기 생명은 고귀하게 여기면서 남의 생명은 함부로 짖밟았습니다.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남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았습니다. 전쟁으로 수많은 생명을 한 번에 죽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과학이 발달해서 단번에 수 많은 인명을 죽일 수 있는 살상 무기를 수 없이 만들어 놓고 국가끼리 서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원자탄 수소탄을 만들어 전 인류고 단번에 몰살될 수 있는 무기까지 만들어 서로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사람 죽이는 것이 과학이며 그것이 국가의 힘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전쟁으로 죽이기도 하지만 낙태 등으로 죽입니다. 배 속에 있다고 함부로 꺼내서 죽입니다. 아기가 무슨 저항할 힘이 있겠습니까? 여자들이 임신할 짓을 해 놓고 함부로 아이를 꺼내 죽입니다. 생명 경시 사상입니다. 내가 귀하면 뱃속의 아기도 귀한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명이라고 자기가 죽일 수 없습니다.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무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내 생명이니 자살해서 끝내버리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박원순 서울 시장이 비서를 농락하고 고소가 들어오자 와룡공원에 가서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자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전에 못된 짓하여 짓밟은 여인의 삶은 누가 보상합니까?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무책임한 무신론 공산주의 좌파 생각입니다. 저들에게는 생명의 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을 하고 수천만의 생명을 죽였습니다. 스탈린이 그랬고 모택동이 그랬고 캄보디아 폴폿이 그랬고 김일성이 그랬습니다.

어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사람을 죽인 살인자를 사형시키는 것은 두 번 살인하는 것이기에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생명은 고귀하고 신성한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이를 어기고 생명을 빼앗은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것이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살인자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사형시키는 것이 공의를 이루고 경각심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죽음을 선물 받은 아담과 하와에게 지신들이 처음 죽음을 맛 본 것이 아니고 자신들이 낳은 아벨이 처음으로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데려간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인간의 죽음이 인위적으로 올 수 있음을 인간은 알게 된 것입니다. 이후로 사탄과의 전쟁에서 이런 죽음이 자주 등장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비극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었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자기가 죽여놓고는 가인은 대답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죄 지은 자가 얼마나 당당합니까? 엄청난 범죄를 모른 척하고 지유를 댑니다. 자기는 동생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는 이론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라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자연도 죄를 고발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자연도 알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땅이 너를 저주할 것이라 했습니다. 땅이 생명의 피를 받았으니 땅이 저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을 갈아도 효력을 발생하지 않고 너는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연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가인을 반항하고 방해하고 땅에서 살 때 유리 방황하게 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제야 가인이 고백합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그렇습니다. 아직은 가인이 직접 징벌을 받기 전입니다. 죄 값이 무거워 견딜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또스또 예브스키의 “죄와 벌” 주제가 됩니다. 아무리 이유가 있는 살인 어쩌면 사회주의자가 생각하는 공의로운 살인이라 할지라도 일단 범하면 너무 무거운 죄의식이 짓누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망치는 것입니다.

     이 때 가인은 고백합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니리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를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고백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제는 자기의 적이 되어 자기 생명을 노릴 것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해치는 자는 벌을 7배나 받을 것이라 약속하고 그에게 표를 주어서 지킵니다. 죄인이지만 보호하는 것입니다. 악의 씨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계속되는 싸움을 없애지 아니하고 계속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해서 주님 오실 때까지 선과 악의 줄기들이 싸우게 하고 선한 자가 가끔씩 지고 고난을 받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악을 통해서 하나님은 놀라운 훈련을 받게 하시고 여자의 후손들이 세상을 바르게 이루도록 하십니다. 벌하시는 하나님은 약속을 함부로 변개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인간 역사입니다.

3. 셋을 주신 하나님

     첫 가정에 한 부모에게서 나온 사탄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들의 싸움에서는 여자의 후손이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후손이 죽여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은 계속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임신하게 해서 셋을 얻었습니다. 셋이라 이름을 지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했습니다. 아벨을 잃고 셋을 낳을 때까지 상당한 세월이 지난 것으로 보입니다. 5장을 보면 130세에 셋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800년을 살면서 자녀를 낳았고 930세에 죽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 곧 아담의 손자를 낳았으니 아담이 235세에 셋의 가정에서 손자를 얻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사탄의 줄기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여자의 후손들은 자세하게 가족의 이름들과 죽은 나이를 기록합니다. 

     결국 셋의 후손에서 노아가 나왔고 노아의 아들 가운데 또 사탄의 씨와 여자의 씨가 보입니다. 결국 노아의 가족 외에는 사탄의 씨는 모두 멸망을 당합니다. 그렇다고 사탄의 씨가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선과 악이 싸우는 것이 인류 역사입니다. 선이 당하는 고통은 값이 있고 나중에 악을 이기는데 큰 지혜를 갖게 합니다. 여자의 후손 가운데 그리스도가 탄생하여 사탄의 머리를 칠 때까지 그리고 역사의 종말에 사탄을 영원한 무저갱에 집어 넣을 때까지 역사는 선과 악의 싸움이 계속됩니다.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악은 그래서 존재하고 싸움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結  論

     하나님은 아담 언약을 그대로 지키십니다. 세상을 선과 악의 싸움으로 인간 역사를 운영하십니다. 악은 항상 존재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이행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여자의 후손 곧 메시야를 준비하시고 인류 구원의 대 장정을 이끌어가십니다. 누가 인류 역사를 이렇게 정확하게 가르쳐줍니까? 어떻게 역사가 정반합의 다이얼렉트 공시이 적용됩니까? 역사는 악이 한 번도 떠난 일이 없고 악이 이기더라도 반드시 선이 이기는 것을 수 없이 보여왔습니다. 인간은 두 편으로 나누어져 언제나 투쟁하고 싸웠습니다. 정반합의 원리로 싸운 것이 아닙니다. 악이 인간 본성에서 따로 유전 인자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원리입니다.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하시기까지 인간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훈련하시고 예수 통일왕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운행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홀로 창조주로서 주권자로서 역사를 지배하십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리스도로 선택한 자들을 훈련하시고 지키시고 때때로 고난과 패배를 당하기도 하지만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최후의 심판의 날로 정하고 그 때에 무저갱에 사탄을 집어넣고 영원히 고통 속에 그 동안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방해했던 악의 씨를 말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십니다. 그 때에 신앙을 지키며 고통 받던 인간을 완전하게 구원하셔서 처음 창조 시 세웠던 것 보다 훨씬 지위를 높이고 하나님과 자연과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예수 통일 왕국을 만들어 영원히 사는 나라를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승리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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