復活 信仰의 能力 (2020년 4월 12일 주일예배 설교) > 설교본문

본문 바로가기
  • book 월간 새 이스라엘

설교본문

復活 信仰의 能力 (2020년 4월 12일 주일예배 설교)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명길목사
댓글 0건 조회 2,457회 작성일 20-10-13 18:34

본문

                                                     復活 信仰能力

 

2020412일 주일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로마서 6:6-11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8-9)

 

사람들은 흐르는 세월의 반복을 다양화해서 의미를 부여하여 절기를 지키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연수와 월수와 날짜를 정하고 때로는 절기를 정해서 반복되는 일과의 지루함을 해결하며 연차적으로 변화된 절기의 즐거움을 누리고 의미를 되새깁니다. 우리 문화도 설날이 있고 추석이 있고 국가 경축일이 있습니다. 좋은 문화는 좋은 의미의 절기들이 많습니다.

성경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기를 정해서 지나간 역사를 되새기며 구원의 특별한 은총을 기억하도록 한다. 그래서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속죄일 등을 정해 지킨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완성시킨 후 오히려 이런 명절을 지키는 것에 별로 관심 두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그랬을까? 사실상 천주교나 후에 개혁 교회들도 성탄절이나 부활절 교회에 따라 사순절, 성령강림절 등을 정하고 계절에 따라 목사님의 복장을 다르게 하며 교인들의 신앙을 일깨우는 일을 합니다.

왜 성경이 절기를 중요시하지 않을까? 그것은 명절을 지키면서 내용보다 형식이나 절기에 따른 문화에 중점을 두어 주객이 전도되는 안간 본성 때문이라고 봅니다. 성탄절이 예수는 없고 선물 주고받는 날로 바뀌는 것이나 계절의 인사로 타락한 오늘의 모습이 말해줍니다. 부활절도 어쩌면 이렇게 되기 쉽습니다. 왜냐면 부활절이 죽은 인간이 살아났다는 기이한 현상으로 얼른 받아들이기 어려운데다 사실상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줄기차게 과학으로 증명되지 못하는 사건을 옛날 사람들의 신화적 효과를 필요로 하는 인간 종교 본성에 맞추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신자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부활할 수 있었고 부활은 예수님이 신이란 증명으로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을 대부분이 역사적 사건으로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 사건을 성경이 어떻게 설명하고 있으며 예수의 부활은 내 인생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고 내가 믿는 믿음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확증하고 있는지에 대해 무관심하다. 내가 가진 신앙이 나의 선택이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믿음 정도로만 믿어주는 자의적 인식에 지나지 않는 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내게 전설이나 이야기 이상의 효력이 없는 단순한 이야기 거리거나 지식에 불과한 것이다. 신학을 공부한 자는 부활이라고 믿어주는 것이 성경적 질서에 부합하고 내가 예수 믿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믿어주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그래서 부활신앙이 기초하지 못한 미지근한 신앙으로 무늬만 신자의 생활에 별 문제를 삼지 않는다. 부활절을 당할 때마다 이런 신화 정도의 인식을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화가 아니고 이야기도 아닌 역사적 사실로 지금 나의 구원과 뗄 수 없는 현실이다.

사실 십자가와 부활을 현장에서 보지 못한 후대 사람들에게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은 잘못 이해하면 신화 이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절에 이 문제를 정말 잘 깨우치고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한 일들을 깨달아 믿음의 깨어나야 한다.

1. 예수와 함께 죽고 復活한 나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몸소 체험하지 못했다. 그는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신앙 생활을 시작했지만 십자가와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만 인정하는 신앙이 아니었다. 보지 못한 사건이지만 그는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6:4)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연합체로 나도 같이 죽고 부활하였다고 말하고 기독교인의 삶의 현장은 바로 이런 십자가와 부활이 체험된 연합적 삶에 기초하고 있음을 중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개념적으로 지식적으로 신학적으로 과거의 십자가와 부활이니 인식속에 지식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실제적 현실로서 체험된 사실이 삶 속에서 신앙의 실천의 밑바탕이 된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날마다의 삶이 어두운 로마 폭정 시대에 그 장벽을 뚫고 전파된 것은 바로 그의 삶 자체가 십자가와 부활의 삶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내가 아는 것은 실제적이 아닌 형이상학을 벗어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지식으로 그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믿지만 현실 생활에서는 동떨어진 신화로만 알 뿐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나의 현실과 무관한 어려운 문제를 이성적 사고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바울은 어떻게 이 사실을 믿고 알게 되었다고 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바울 서신의 전체가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사상과 예정론을 구원 역사의 핵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기독교의 구원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으로 역사와 구원사를 무작정 감성에 의해 운행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약 체계를 통해서 구원 역사를 계획하고 실천하십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계획하신 그대로를 실천하시기 위하여 인간과 언약하시고 언약하셨기 때문에 중간에 바꾸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실천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실하고 변치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고 인간 구원은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한 역사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언약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예정되고 계획된 사건과 인간의 선택을 먼저 결정합니다. 그 선택된 자들과 이제 근본적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언약의 특성인 연합이라는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장차 메시야를 보내 이루실 죄의 값 십자가 사건과 죽음을 이긴 부활 사건을 대표자 예수님과 선택된 모든 자와 연합시키십니다. 그리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함께 죽고 부활할 때 함께 부활시키십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제한된 신자들이 아직 인식을 못합니다. 역사적 사건과 언약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신비일 뿐입니다.

그런데 내가 태어나고 하나님의 예정이 나의 생명으로 실현되어 자란 후 어느 날 성령님의 인도로 내가 말씀을 접하게 되고 예수에 대해 소개를 받고 고민도 하고 미래도 생각하며 말씀을 적용하기 시작할 때 성령님이 나를 변화시켜서 거듭나게 하십니다. 사랑에 따라 느리기도 하며 빠르기도 하고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내 인식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게 합니다. 그것은 절대로 나의 자연적 인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 인식이라면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 아닙니다.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은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를 구주로 인정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믿음을 고백하게 될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하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나를 변화시킨 결과이지 나의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론이 가르쳐지지 안기 때문에 가짜 신자가 나오고 자기 혼자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며 혼자 좋아하고 천당 간다고 착각하는 잘못된 신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것이며 기독교인들이 처음부터 구원신앙으로 출발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짜 신자 힘 없는 신자 지식적 신자 신학적 신자 습관적 신자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한 자들에게서 나오는 진실한 구원신앙이 발판이 되어 성장하는 응용신앙으로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도 십자가를 보지 못했고 바울도 보지 못했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언약적 구원관을 통해 십자가와 부활이 확실한 자기의 역사적 사건으로 믿게 되고 그런 확신의 믿음이 그의 신앙생활의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십자가와 부활의 참된 설명이며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를 확실하게 믿으면 성경이 가르치는 언약적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믿고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과 중생과 내 속에 있는 믿음 모두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된 것을 확신하고 믿음이라는 작은 씨앗이 그 모든 것의 증거이기 때문에 확신을 기초로 실 생활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재현하며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큰 믿음의 모습입니다.

2. 言約 안에서 聖靈으로 거듭난 나

우리가 중생이 믿음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구원사역의 출발이라는 점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65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셔야만 일어나는 일이지 저절로 일어나지 아니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언약 안에서 죽고 부활한 자들을 성령으로 변화시키지 않으면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예수의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에서 말합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또 고린도 후서 3:3에 바울은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영이 마음 판에 쓴 편지가 신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스스로 쓴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살리시고 쓰신 편지가 되는 것은 성령께서 택한 자를 중생하여 변화시켰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신자는 구원의 확신이 있는 자요 하나님이 마음에 써 주신 가장 확실한 믿음이 보입니다. 그것이 안 보이면서 장로 집사 하는 사람들은 미안하지만 자기 혼자 정하고 혼자 착각하는 자기 자신을 믿는 가짜 신자입니다.

우리가 영적 중생을 가장 잘 묘사한 것은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 사건입니다. 그는 학문적으로 구약에 정통한 산헤드린 멤버입니다. 정치적, 종교적, 신학적 지도자인데 중생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중생은 보이지 아니하는 바람과 같은 현상으로 일어나지만 그 결과를 보고 중생의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람이 강하게 약하게 쌔게 부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그러나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처럼 중생의 결과는 눈에 보이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믿음을 시인하고 자신의 세계관 인생관이 새로워진 것을 고백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습니다. 자기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거만을 가지고 확신하는 믿음을 가집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구원의 감격을 실 생활에 적용하게 됩니다. 점점 신앙이 자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에 의해 구원신앙을 은혜로 받은 거듭난 기독교인들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첫째 무엇보다도 자기 정체성이 뚜렷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선백산 확신이 있고 소명의식이 생깁니다. 성경 속에서 자신의 인생 목표를 발건하고 주를 섬기며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알게 되며 소명이 생기기에 적극적으로 교회나 주님의 일에 동참합니다. 점점 눈치 보면서 슬그머니 해보고 안 되면 딴 교회 가는 그런 류의 좀비 신자가 아닙니다.

둘째 성경과 기도에 대해 마음이 열리고 흥미를 갖게 되며 기도하며 말씀 보는 습관을 즐거워합니다. 성경 보며 자꾸만 하품하면서 공부에는 요리조리 빼면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으로 중생시킨 확실한 구원 신앙의 소유자는 내면에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나 영적 일에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며 죄에는 죽은 반응자가 됩니다.

셋째 고난을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신앙생활이 즐겁게 됩니다. 마지 못해 교회 나가거나 직분 때문에 의무감에 메이지 않고 예수 믿는 즐거움으로 가득 찹니다. 물론 고난이 때로 옵니다. 그러나 고난이 올 때 기도와 십자가 정신으로 대처합니다. 그래서 훨씬 쉽게 고난을 이기고 고난을 통해 많은 교훈을 얻고 더 좋은 미래의 삶을 향해 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사명감과 소명감이 생기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인생에 가장 어려운 일은 용서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해하거나 싫어하는 사람과 상대하기를 꺼려합니다. 목사도 자기 욕하는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좋아하는 사람과만 무리지어 교제합니다.

그러나 복음에 눈을 뜨면 용서할 줄 알고 자기를 해한 사람과도 주 안에서 함께 섬기고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먼저 논을 내밉니다. 이런 것들이 중생의 열매로 나의 삶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이 없으면 나의 구원이 내 스스로 믿고 혼자 즐거워하는 착각일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께 대해 살아있는 나

바울은 주님과 함께 죽고 부활한 자들이 세례로 죽고 부활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서 주는 세례 의식은 나의 죽음과 부활을 예식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이는 예식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사실을 세례 예식의 의식과 의미를 통해 인쳤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은 신자는 정식 교인으로서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이며 삶을 통해 날마다 죽고 살아나는 삶을 살아가는 자임을 고백하고 공중 앞에서 예식으로 시인한 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 역사를 보면 세례와 성찬을 정말 잘못 이해해서 교회의 한 가지 예식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교인의 자격을 얻는 과정으로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대단한 잘못입니다. 성찬도 언약의 죽음과 부활을 세례도 언약의 죽음과 부활에 관계가 있습니다. 그에 이미 동참했고 지금 동참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십자가 삶을 살겠다고 하는 결단의 참여이며 의미를 되세기며 믿음의 삶을 결단하는 것이 2가지 성례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중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살아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일에 반응이 빠르다는 뜻입니다. 또한 죽음과 부활에 언약으로 참여한 신자는 십자가 삶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미 체험을 했기 때문이며 죽으면 산다는 예수님의 제자를 향한 교훈을 삶으로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보다 먼저 죽고자 하고 남을 이용하기 전에 내가 먼저 희생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고 이런 사람들이 날마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부활의 삶 곧 확신과 열정과 즐거움과 희망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은 그 삶으로 세상을 이깁니다. 그래서 죽음이 없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가 먼저 희생하고 순교하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정도가 구원신앙을 가진 자들의 삶입니다.

예수 믿는자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왜 내가 예수를 믿고 예수 믿어서 내가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의 위로입니까? 그 정도의 유익을 얻고자 주일 시간을 보내고 헌금 내고 신자인 척 하며 손해보고 살려고 합니까?

신신학자들이 근대 기독교인들에게 충고했습니다. 나를 위하여 믿는 종교적 신앙의 하나님은 이미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종교는 나를 위한 인본적 미신이기 때문에 내가 이미 과학으로 지식으로 현대를 사는 능력의 인간이 되었으니 신이 필요 없다는 인식입니다. 종교적 신은 이제 필요 없습니다. 나에게 사실은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미신입니다. 내가 필요로 해서 예수가 나의 일이나 도와주는 좋은 나의 종님 나보다 능력 있는 나의 종으로 부리고자 믿는 하나님은 이미 죽었습니다. 인간은 이런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구원하시는 의로운 사랑의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사용해서 역사를 이루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워 하나님의 창조의 원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시는 창조주입니다. 그 분이 나를 부려야 정상이지 내가 하나님을 나의 종으로 부리려 종교를 갖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수 맏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종으로 부리며 하나님을 나의 종 정도로 생각 내 마음대로 하나님이 해주기를 바라고 내 뜻대로 하나님이 도와주기를 소원하는 인본주의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부활신앙이 없는 인본주의자는 무능하고 자기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좀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신자는 새 시대의 빛이 될 수도 없고 자기 인생하나도 책임질 수 없는 무능하고 실패한 인생을 살기 마련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