敎育遺言(Educational Testament) 2020년 3월 15일 산타페 한인장로교회( 초청 설교 ) 말씀: 마태복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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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育遺言(Educational Testament)
2020년 3월 15일 산타페 한인장로교회, 알버커키한인교회 연합 예배 초청 설교
말씀: 마태복음 28:18-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18-20)
설교하기 전에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중요한 활동 예배와 교육 중 어느 것을 더 중요시하고 강조하셨을까요? 예배? 교육?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명령, The Greatest Commandment 혹은 The Greatest Commission 등으로 부르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교회에 남긴 유언적 말씀입니다.
제가 UBF라는 대학생 성경공부 운동에서는 선교 명령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성서한국 세계 선교라는 Catch Phrase를 걸고 우리는 “World is my Parish.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요한 웨슬레의 말을 인용 선교의 불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가서 헬라어를 배울 때까지 선교명령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법적으로 보니 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유언과 마지막 명령은 교육 명령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한국에서 교육대학을 나와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다 이민 와서 뉴욕 근처의 Christian Missionary Allince 교단에 소속된 Nyack College를 나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하고 New York University College of Education에서 Ph.D. 과정을 공부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니 역시 교육을 중요시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박사 논문은 포기했습니다. 유대인 지도교수와 맞지 않았습니다.
물론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을 보면 승천 장소는 갈릴리 지방이 아니고 다시 예루살렘 근처인 베다니에 가셔서 승천하신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 후 상당한 시간을 처음 복음이 시작되고 대부분의 제자들을 부른 갈릴리 지역에 방문하셔서 베드로를 다시 세우고 그들에게 사명을 다시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실상 제자들에게 주신 위대한 사명의 말씀으로 중동 사회에서는 법보다도 강한 효력이 있는 유언이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모든 의무도, 권리도 중단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강력한 자녀의 의무가 부여되는 부모 권리가 있습니다. 자손들은 무조건 지켜야 하고 국가도 이 유언만은 변경하지 못합니다. 그 말이 곧 Testament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전 유언 신 유연 즉 Old Testament New Testament 라고 부릅니다. 언약의 강력한 의무를 표현하는 번역입니다.
원래 이 말은 히브리어의 “베릿” 언약이란 말을 헬라말로 번역할 때 적당한 말이 없어서 그렇게 번역한 것입니다. 교회가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지켜야 한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생명 바쳐 순종해야 할 하나님 말씀입니다. 유언인 성경 전체의 핵심 유언이 교육 명령입니다.
신약의 예수님 사상은 바로 구약의 사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배의 대상이지만 교육을 강조하시고 보여주신 교육자이셨습니다.
성경적 교육관을 지금도 잘 이행하는 민족이 유대인입니다. 지금 미국에서 제2 유대인이라고 유대인이 부르는 민족이 한민족입니다. 지금 인구 비율로 하바드에 들어가는 숫자가 한국인이 유대인보다 더 높습니다. Political Correct로 인종별 할당량에 손해를 보면서도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성경과 탈무드 방식의 교육으로 세계적인 지성인들이 많이 나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독교 전통과 정체성을 가진 미국이 첨단 세속주의 나라가 되어가는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충분한 자질이 있고 열심히 있으며 잘 살아보겠다는 American Dream을 어느 민족보다 찐하게 소5한 소수민족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어떻게 미국의 미래를 바라보고 주류 속에 파고 들어가 세계에 공헌하는 민족으로 우뚝 설 수 있겠습니까? 저는 우리 민족이 이 시대의 “새 이스라엘”로 부름 받았다고 확신하는 목사입니다. 충분한 근거와 신앙적 증험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신앙과 교육에 대한 확실한 신학적 바탕을 세우고 확립하는 일입니다. 유대인이 중시하는 교육의 밑바탕을 알고 이를 실천, 성경은 하나의 종교적 책이라 무시하지 말고 시대가 바뀌어도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교육 방법을 살펴보면서 우리 자녀들이 어떻게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인가 교회는 어떻게 교육을 회복해야 할 것인가를 조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1. 쉐마 교육
이스라엘 교육을 쉐마 교육이라고도 합니다. 요사이 한국 학부모들이 이스라엘 교육에 대해 관심을 갖고 탈무드에 관심이 많습니다. 저는 오늘 이스라엘의 탈무드가 어떻게 나왔는가를 살피면서 구약에서 말하는 교육이 어떻게 실현되었는가를 말씀 드림으로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
“쉐마”라는 말은 신명기 6장 4절에 “들으라” 는 뜻의 히브리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이 말을 꼭 듣고 행하라고 명령한 말씀에 교육이란 말을 붙여 “쉐마 교육”이라 부릅니다. 사실 신명기 자체가 모세의 유언적 말씀입니다. 그는 가나안 입경을 눈앞에 두고 꿈에도 그리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모압 땅 느보산에 올라 멀리 약속의 땅을 바라만 본 후 죽기 전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2번째 언약입니다. 첫 번째 언약은 이미 출에굽기 민수기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언약을 맺은 출애굽 노예 해방 1세대는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여호수아 갈렙을 제외하고는 가나안 정탐보고 사건으로 10명의 정탐꾼 지도자들과 함께 두려워 울던 세대들은 모조리 꿈의 땅을 밟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하고 출애굽 이후로 태어난 제 2세대들과 다시 언약한 것입니다. 새로운 내용이 아니고 그들 부모 세대가 겪었던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주지시키고 다시 저들 부모가 맺었던 언약을 보충하며 교육 언약을 첨가하여 맺은 것입니다.
신명기 중에 두드러진 교육 명령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첫째 여호와 신앙 활동은 교육 중심이라는 사상입니다. 모세 오경은 제사법, 도덕법, 사회법이 있습니다. 고대 법령으로 가장 뛰어난 법입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제사가 중요함을 역설하며 아울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소위 쉐마교육을 강조했습니다(신명기 6장) 사실 이 쉐마 교육은 모세가 창시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라”(창 18:1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그의 자손을 번성케 해서 민족을 이루어 쓰시고자 아브라함을 부르셨는데 그 목적은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즉 여호와의 말씀을 잘 지키도록 교육 사회에 하나님의 의와 공도 즉 정의(Justice)를 실현하는 민족을 삼고자 하심이라 분명하게 교육에 두고 있씀을 봅니다.
모세의 제사법인 레위기는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제사법을 아주 세밀하고 중요하게 명령했습니다. 예배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제사법을 다른 민족의 우상숭배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우상에게 춤과 노래, 제물을 드려서 달래며 예배자에게 재앙으로 화를 내지 말고 도와달라는 그런 주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가 전적으로 죄 문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짐승을 잡아 내 대신 죽게 하고 피를 흘려 생명을 드림으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윤리의 기본으로 가르치면서 대속의 속죄 제사를 통해 장차 하나님께서 장차 메시야를 보내 그들의 죄 값을 지고 죽으심으로 용서 받고 구원받을 것을 수 없이 반복 배우고 익히도록 하는 교육적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에 소고기 양고기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죄 해결의 방법이었습니다. 예배도 교육 예배였습니다. 심리적 주술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둘째로 교육의 권리와 의무는 국가가 아닌 부모라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가정교육을 아주 강조한 것입니다. 오늘날 서구 교육이 국가 소관이 되면서 이 원리를 근본적으로 깨버렸습니다. 교육이 국가 기관이 되면서 많은 나라들이 기본 교육비를 국가가 담당 무상 교육을 실시한 장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초등 교육만 국가가 무상으로 교육하고 대부분 학부모들이 수업료를 지불하면서도 학교는 국가 기관이라 부모의 교육 권한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국가 전유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지금 학교에서 성해방 교육이라는지 동성애 교육에 대해 학부모들이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은 학교가 국가 기관이라는 관념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학교가 세워져야 하고 국가 기관 학교도 있지만 기독교 학교도 있어 국가의 교육비를 학생 수대로 학교에 지불하도록 하고 학부모들이 교육 기관 선택권을 갖도록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주지할 것은 이런 교육 국가화는 군국주의 건설을 위한 프러시아를 본받은 일본의 국민교육 제도를 도입하면서 그 권리를 부모에게서 빼앗아 국가가 관리했습니다. 국민 대부분이 문명화되는 좋은 점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국가의 가장 무서운 군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만든 국민 교육 제도는 결국 부모의 교육 권리와 의무를 박탈하여 국가가 원하는 아이들을 양성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이 공산국가들의 정부 주관 교육입니다. 중국은 공산당 이론을 시험에서 통과하지 않으면 석사 박사 입학을 할 수 없고 모든 학교는 공산당 정부에 소속되어 있어서 부모들과 상관없이 공산당 이론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흡사합니다. 공교육 제도를 일본에서 배워와 공교육을 만든 이후 정교 분리 원칙을 반대로 적용 모든 교육의 권한을 빼앗아 갔습니다. 부모의 교육 권한을 되찾아야 합니다. 성경은 부모에게 있는 교육을 회당 중심의 교육기관에게 부모의 권한과 의무를 연장 전문 랍비들이 가르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유대인을 만들었습니다. 교육의 타락은 교육의 정치화 기업화 대량의 기술자 양산을 통해 교육의 질적 타락에 있었습니다. 갈수록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교육의 평준화 원칙에 따라 하나님이 주신 개인의 역랑을 무시하고 대부분의 질이 낮은 무식자를 배출하는 것이 현대 국가 교육의 현실입니다.
셋째로 성경적 교육은 지식 혹은 기술교육만이 아닌 전인교육사상(全人敎育思想)입니다. 인간에게 물론 지식이 필요하고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의 최소한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먹고만 사는 동물이 아닙니다. 영적 존재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성경 말씀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떡으로만 산다는 것이 무신론 사회주의 막스 공산주의입니다. 인간을 돈의 노예로 보았기 때문에 실패한 사상입니다. 미국의 실용주의 교육도 근대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산업 시대에 필요한 실용적 교육에 치중하다 보니 도덕과 가치 교육에 소홀 오늘 미국 국민의 가치관과 영적 실존을 파괴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 인간이 돈 벌 수 있는 기술자로서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가정을 이루고 사회 안에서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함께 더불어 보다 행복한 사회를 건설 복을 누리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여기에 절대 필요한 것이 상식을 이해가고 전통적 문화를 지켜나가며 소통하고 행복을 나누고 서로 롭는 인격을 소유해야 하며 당하는 고통을 참고 인내하며 미래를 바라보고 열심히 살 수 있는 인격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런 인간을 교육하는 것은 단순히 부모의 소원만은 아닙니다. 사회 공통의 목적입니다. 민주시민을 기르는 것이 미국 공교육의 목표입니다. 전인적 인격을 갖춘 성인을 배출하는 교육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이 지금 미국 교육에서는 사라지고 교육자 혹은 선생님들은 지식만 전달하는 데 그치고 인격 따위는 안목에 없습니다. 선생님들이 자유주의의 선봉자가 되어 교육 현장은 철저하게 정치화, 세속화, 실용화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성경적 교육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넷째로 교실 학습 아닌 환경 교육 사상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외우고 기억하도록 모든 환경을 만들라는 것을 아주 강조합니다. 우리는 이런 종교적 환경을 만드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강조합니다.
이 사상은 첫째 부모가 먼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진실한 신앙은 학교생활만으로 불가능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부모의 생활에서 자녀들은 직접 배웁니다. 신앙이 진실하면 자녀들은 평생 신앙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부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당부합니다. 이 원리는 지금도 필요합니다. 부모의 신앙 생활 모범은 학교에서 많은 돈을 들여 배우는 모든 교육 이상으로 값지고 자녀들의 영적 자산이 되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말씀 환경을 만드는데 2가지 다른 견해들이 있습니다. 한편은 교회는 세상 속에 있는 것인데 지나치게 말씀 위주로 환경을 만들기 위해 티비도 세속 음악도 가정에서 틀고 보고 듣는 것은 너무 지나치게 자녀들을 사회와 고립시킨다는 우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은 티비도 안 보고 온통 말씀으로 환경을 만들어서 자녀들에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2가지 방법 모두 장단점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유대 역사와 예수님의 방법을 보면서 성경적 기준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히 함께 살면서 자신의 삶 전체를 보고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멘토로써 중요한 말씀 환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말씀 기준으로 바로보도록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녀들 교육은 먼저 신앙의 바른 자세를 끊임 없이 정립하는데 최선을 달하도록 하면서 세속적 눈이 아니라 영적 성경적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 사회에 어떻게 적응할 수 있는 사명자가 될 것인가에 초점을 둔 것입니다. 그래서 텔레비전을 집에 두고 두지 않는 것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왜냐면 아이들이 세상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 세속화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자기 정체성을 기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차단한 교육환경이 아니라 말씀을 위주로 하고 기독교 문화를 중심하여 가정 생활하도록 하며 그 입장에서 자녀들에게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고 성경의 해결점을 토론하고 자녀들에게 기독교 가치관 세계관을 스스로 세울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육환경입니다.
다섯째 학교 교육은 국가 이념 교육이 아니라 부모의 위임 아래 실현되는 위임 교육 사상입니다.
국가가 교육권을 부모에게서 빼앗아 국가 이념을 가르치는 정치교육을 일삼았습니다. 공산주의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주의 국가 미국도 사회주의 영향을 받아 부모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국가의 이념 실험기관으로 타락한 것입니다. 교육은 부모가 책임이 있지 국가가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닙니다. 책임 질 수도 없습니다. 교육의 열매는 훨씬 미래에 나타나기 때문에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성경적 교육 사상을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잘 지켰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쉐마 교육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이스라엘 역사에 어떤 과정으로 정착되었는지 살펴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쉐마 교육을 처음 명령했습니다. 이를 언약으로 이스라엘에게 명령한 분은 모세입니다. 모세 이후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느라 이를 수행할 시간과 능력이 없었습니다. 여호수아 이후 사사 시대는 정치적 불안정으로 국민을 교육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왕국 시대에 이르러서야 성전이 지어지고 성전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전 예배가 국가 종교의 통일의 기반이 되어야 하였지만 예배에 치중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말씀 교육은 부족하게 되고 지방에 흩어져 사는 레위인들이 이를 방기함으로 교육 없는 종교적 예배만 치중하다가 이스라엘은 결국 종교적 타락을 가져와 멸망의 길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왕국의 교육 실태를 고찰해봅시다.
이스라엘의 성전 중심의 예배는 전적으로 다윗 왕의 예배 개혁이었습니다. 그는 모세의 희생제사에 그의 특기인 음악을 첨가시켜 성전 찬양대를 만들고 악기를 연주함으로 예배가 한층 부드럽고 감성을 자극하고 집중시겼던 장본인입니다. 그 때부터 이스라엘의 예배 음악은 서양 모든 음악의 기초가 되었고 교회 음악은 오늘날 음악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서양 음악의 아버지 “바하”는 철저한 종교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성전을 만들어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음악을 첨가하여 훨씬 좋은 모습의 예배가 되게 하는데 기여한 예배개혁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꿈에도 소원인 성전 건축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그 자손 중 하나가 성전을 지을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모든 건축물 준비를 완료하고 아들 솔로몬 왕 때 성전이 건축되도록 했습니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왕상 8:17-18을 보면 솔로몬은 이 말씀을 자기를 지칭한 것으로 해석하고 성전을 완수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하나님은 이 성전보다 더 크고 위대한 분이기 때문에 성전 공간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러나 성전을 짓는 것은 기도할 수 있고 이 성전을 기억하도록 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의 성전은 제한적이고 크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불편한 곳이기에 장차 씨를 통해 성전을 주실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모으기 위해 성전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중앙 집권적 정치적 목적이었습니다. 종교의 정치화는 때로 참 위험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중심을 흐리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은 성전의 한 모퉁이에 두루마리 저장되고 그것을 가르쳐야 할 레위인들은 할 일이 없게 된 것입니다. 결국 예배 중심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교육이 빠졌습니다. 주전 722년 북쪽 이스라엘이 망하고 586년 남쪽 유다가 망했습니다. 결국 유대 민족만 역사에 남아 이스라엘 민족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남북 국가는 결국 말씀이 희귀하여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 이방 땅에서 종살이를 할 때에야 비로소 말씀 교육의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방 땅에서 말씀을 베끼기 시작했습니다. 서기관이라는 직책이 시작되어 성경을 두루마리에 복사해서 회당이라는 것을 만들어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구약 에즈라는 대표적인 서기관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노예 시대에 탈무드라는 설교집 책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탈무드는 지금도 진행되는 방대한 분량의 토라 해설집입니다. 이를 중심으로 아이들에게 구약을 중심한 성경 중심 교육을 시작한 것입니다. 특히 레위인이 아닌 랍비들이 자기 직장을 가지고 회당을 중심으로 구약 말씀을 현실에 적용하는 지혜를 모은 책입니다. 매우 실용적이고 실질적 삶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는가 하는 책입니다.
우리는 이방 군인에게 자기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하나님은 무관심했습니다. 자기 성전을 하나님은 헐어버리도록 내버려둔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 저들은 회당 제도를 만들고 예배 형식을 만들고 쉐마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바벨론에서 시작된 소위 유대주의는 첫째 성경을 공부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후대에 성경이 전해지는 큰 계기를 이룬 것입니다. 둘째 성전이 무너진 상태에서 회당을 만들어 교육 센터로서 예배까지 드리는 교육 중심의 교회당 모범이 된 것입니다. 종교 개혁 이후 예배 대 개혁을 이룬 칼빈은 바로 이 회당의 예배 형식을 받아 케돌릭 예배를 개혁하고 말씀 중심 찬양 기도 축도등 순서를 만들어 신교의 예배 모범으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포로 이후 만들어진 이스라엘의 회당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회당은 예수님 시대 예수님의 사역에 여러 번 등장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게 한 곳입니다. 다시 말해서 새 언약시대 이후의 새로운 교회 시대를 여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레위사람 아닌 랍비들이 레이사람이 아닌 선생님들을 모시고 그들이 자비량하고 살면서 회관에서 청년들을 교육함. 13세 성년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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