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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터기 信仰 (2020년 3월 1일 주일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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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명길목사
댓글 0건 조회 2,454회 작성일 20-10-1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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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루터기 信仰

 

202031일 주일 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이사야 6:8-13

그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12-13)

 

요사이 한국 교회와 정치 현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알버커키와 같이 신앙 환경도 마치 사막 같은 곳에서 어떤 신앙을 갖는 것이 중요할 것인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신앙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을 아들이요 구주로 믿는 신앙 이 신앙은 성숙된 신앙이기보다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고백하게 된 신앙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로 주어진 구원 신앙은 현실 생활 속에서 역경과 고난과 많은 시련을 통해 더 큰 믿음으로 성장하게 되고 적용하는 지혜를 배울 수 있기에 신앙은 각양각색으로 다를 수 있지만 적용 신앙은 더 성숙해진 진실한 신앙으로 큰 믿음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직 초기 구원 신앙에서 믿음에 이르는 신앙으로 성숙하게 될 때 대부분 사람들이 자기 편한 길로 사는 무늬만 신자들에게 휩쓸리지 않고 살기 위해 현실 속에서 어떤 신앙이 중요한가를 생각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은 나라가 기울어져 망해가고 있는 정치 사회 혼란 속에서 부름 받고 혜성처럼 나타나 이스라엘 민족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가장 확실하고 뚜렷하게 예언하며 그래서 전무후무한 많은 영적 영향을 주었던 이사야 선지자를 생각하며 이사야 선지자의 신앙을 배우며 난세에 사는 믿음과 지혜를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부르실 때 그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준 신앙의 극치를 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길잡이로 삼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특히 나와 같이 얼마 남지 않는 노년에게 어떤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신자를 섬기고 자신을 바쳐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미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중심적으로 말씀하는 그루터기 신앙은 어떤 특징이 있으며 어떤 신앙이었으며 그것이 어떻게 이사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를 살펴봄으로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믿음을 배울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1. 苦難逆境으로 부른 자

이사야 선지자의 그루터기 신앙의 시작은 그의 부르심에 응답에서부터볼 수 있는 특징입니다. 남은자로 살기 위한 고난과 역경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평범하고 쉬운 삶을 살 수 있는 왕족이었습니다. 비록 나라가 망한다 할지라도 그는 입지적 조건이나 사회적 지위가 충분하게 다른 사람들보다 잘 살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타고난 부를 누릴 수 있는 그를 역경과 고난 속으로 부르실 때 이사야는 즉시 응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마냥 축복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는 하나님으로 만나지 아니했습니다. 왕족으로 수도에서 정치하며 고관대작으로 생을 편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그루터기 신앙을 갖도록 고난과 역경으로 부를 때 응답했습니다. 시대에 남은 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고난과 역경 속으로 부르심을 받아야 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이를 따를 수 있는 신앙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이 이사야와 같은 위대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오늘 신자들은 축복해주기를 바라는 기복 신앙 때문에 예수 믿고 계속해서 복 받기 위해서 신앙 생활하기 때문에 남은 자의 신앙으로 살지 못합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둘째로 남은 자 신앙을 가진 것은 그가 베임을 당하는 숫한 죽음의 기회를 이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나무꾼이 왜 남겨두었는지 알 수가 없지만 모든 나무 상수리나무까지 베임을 당할 때 그 나무가 살아남는 것은 도벌군의 선택이지 나무의 선택은 아닙니다. 그럴 때를 만나면 자기도 짤려 죽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숱한 세월을 보내고 그런 고비와 역경을 실제로 체험했던 고난에서 살아남은 신앙입니다. 진정한 남은 자 신앙은 고통 없는 행복한 신앙 생활한 사람에게서 나타나지 아니합니다.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겪고 아예 살아남을 소망도 희망도 없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많은 나무들이 속절없이 잘려 나갈 때 그 위험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은 역경을 이겨낸 그루터기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살아남기 원하는 신앙인은 결코 믿음에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루터기 신앙을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이스라엘이 멸망을 받고 나라 땅과 삼림의 나무가 베이고 폐허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그루터기만 남은 상태의 모습입니다. 그 나무의 그루터기를 쓰신다는 신앙을 말합니다.

나무는 대부분 제대로 자라자면 수 년 혹은 수십 년이 걸려 자랍니다. 그런 나무들이 어떤 이유로 잘리고 밑 부분만 남았습니다. 어떤 것은 죽어있고 말라 있고 볼품이 없습니다. 황폐한 곳에 남은 앙상한 그루터기는 숲으로 깊은 산을 비교할 때 황폐한 곳이 된 것입니다.

이런 그루터기가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군대들이 지나가고 벌목꾼이 지나가고 아름다움이란 것은 없는 그런 그루터기는 오랜 고난과 역경과 침략과 패배 속을 지나온 나무들의 흔적입니다. 때로는 불로 타버린 곳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루터기를 쓰신다는 말은 이와 같이 침략을 받고 패배들 경험한 고난을 거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쓰실까요?

고난과 실패와 역경을 경험한 사람들은 우선 겸손합니다. 인간의 역경을 경험했기 때문에 다가오는 고난을 예견하고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극복하면서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불평하지 않을 수 있으며 참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고난과 역경을 지난 사람들을 역사의 빛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루터기는 보잘 것도 없고 사회적 지위도 없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죽어있는 그루터기도 많고 다시 그 지역이 나무들로 빼곡빼곡 1여 아름다운 삼림이 될 소망이 거의 없는 모양 없는 그루터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존재감이 없는 사람들을 사용하여서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고난과 역경은 그래서 인생의 가치와 경험을 축적하여 시대를 이길 수 있는 요소를 많이 가진 사람들로 고난을 통한 삶에서 얻은 경험과 지혜로 고난을 훨씬 쉽고 가치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을 사용하시고 고난을 통해서 연단 받은 사람들을 귀하게 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도 거룩한 모습으로 이사야를 용서하시고 그의 입술을 지져주셔서 하나님 말씀만을 전하게 하시는 놀라운 체험을 했기 때문에 그는 부르심에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그는 얼마동안이나 이렇게 힘든 역사 망해가는 이스라엘 국가의 모습이 계속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2. 뿌리에 굳게 붙어 남은 자

나무가 아무리 커도 그루터기가 약하면 자랄 수가 없습니다. 뿌리에서 물과 양분을 빨아들여야 무성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무를 벨 때 그루터기는 무시를 받습니다. 그래서 자르고 남겨두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바로 보잘 것 없는 그 부분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면 뿌리를 연결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뿌리가 중요합니다. 뿌리에 붙어있는 신앙이 바로 그루터기 신앙입니다. 그 곳에서 신앙의 물과 양분을 공급 받아야 다시 말해서 신앙의 뿌리에 붙어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쓰신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신앙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 붙어있는 신앙이 뿌리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지금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감동으로 써져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성경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체험도 환상도 아닙니다. 꿈에 예수님 보고 그것을 뿌리로 여기는 사람은 이단으로 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에 뿌리를 둔 사람은 성경에 뿌리를 두는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을 보면 이미 시대에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신앙을 배척했습니다. 신신학이 들어와 성경을 난도질하고 그런 신학교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버젓이 대 교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주사파에 물들게 되어 있고 목사들도 주사파에 물들게 됩니다. 오늘의 교회 문제는 바로 뿌리가 강한 그루터기 신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루터기 신앙은 구원신앙을 가진 구원의 확신자 신앙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마치 장로교가 만든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성경이 구원의 확신을 빼버리면 복음이 아니게 되고 전체적으로 신실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가치인 하나님의 주권 신앙과 내가 믿는 것이 은혜라는 기본적인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목사에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갈 수 있다며 그 따위로 행동하는 목사는 천당에 못 간다고 어느 감리교 목사는 자기 교회 교인들에게 전화하는 목사들을 저주합니다. 본인이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이며 그것은 성경을 전반적으로 부정하는 신학인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을 단편적으로 그렇게 볼 수 있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용한 본문은 근본적으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가짜로 하는 주여 주여지 구원받은 사람은 가짜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본문은 대부분 목사님들에게 적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확실하지 않는 구원을 붙들지 못하면 사실상 그루터기가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삶의 목적과 사명이 있는 자임을 말합니다. 자기를 왜 구원하셨는지 그래서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지 그 인생을 살아갈 방향은 무엇이며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복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루터기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삶의 목적을 알고 내가 지금 하나님 나라에서 어떻게 교회를 섬기고 내가 살아가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것을 평생 붙들고 살면서 거기에서 양분을 얻고 거기에서 생명수를 얻어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루터기의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말세 신앙이며 이렇게 살아가는 자들이 하나님이 쓰시는 말세의 일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부러워하지 말고 말씀에 굳게 서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질 생명 행여나 죽을까 두려워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던 말던 오래오래 살고자 하는 사람은 뜬 구름을 잡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번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요 찾으심입니다. 하나님은 그루터기 신자를 지금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3. 生命이 살아 있는자

지금까지는 이론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알지만 실천하며 그것을 삶으로 옮기는 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으로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힘이 없습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그루터기에 남아서 생명을 유지한 삶입니다.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 생명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씨앗은 작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씨는 온도가 있고 물이 있으면 자랍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나무를 키웁니다. 생명은 싹이 트고 자라는 힘이 있습니다.

그루터기가 자라는 것은 작은 싹에 붙은 생명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확신이 있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삶 속에서 실현되기 위하여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 생명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주시는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그루터기의 생명이며 그 생명이 하나님이 쓰시는 부활생명입니다. 그래서 말세에 우리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생명력 있게 만듭니다.

그래서 말세에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고 확신 있는 자들에게 성령의 내주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걸어다니는 성전이 되게 하셨고 그 성령께서 알고 있는 말씀이 우리 안에 실현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육체의 힘으로 하려고 하지 말고 성령께서 내 안에서 나를 움직이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기도하고 예수 안에서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필요하고 신앙의 공동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공동체가 가지는 생명력에 사회를 변화시키고 나라를 바르게 하는 동력이 됩니다.

그루터기의 생명력은 대단합니다. 어떤 오렌지나 그레임 프룻 나무는 베어내고 그로터기 가에 접목을 합니다. 그러면 또 새롭게 나무가 됩니다. 뿌리가 크고 단단하니 얼마나 잘 자라는지 모릅니다. d를 뿌리는 것보다 접목하는 것이 훨씬 바르고 잘 자랍니다. 뿌리가 튼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접목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뿌리에 접목된 사람입니다. 그 뿌리에 접목되어야 잘 자랍니다. 그것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結 論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세입니다. 지금 한국은 너무도 빨리 전염되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지금 보니 사람들이 얼마나 죽음에 대해서 무방비 상태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행여나 자기에게 병이 옮길가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을 보면서 인생들이 얼마나 죽음이라는 공포 앞에 저리도 무력한가 하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정말 공포에 쌓인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깝습니다. 빨리 예수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 믿어도 진짜로 믿어야 하고 과학적인 지식을 기초로 믿음 위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바로 됩니다. 공포가 인생을 얼마나 두렵게 하는지 모릅니다.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혼돈입니다. 지금 역병을 앓고 있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거짓을 모르고 정권만 잡고 돈만 있으면 된다는 좌파 사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인간은 정권을 잡은 사람들에 의해서 결코 지배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지금 역병이 도는 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진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바라보고 진심으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정말 회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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