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무서운 결과 (2020년 3월 8일 주일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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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무서운 결과
2020년 3월 8일 주일 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신명기 1:28-33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29)
요사이 코로나바이러스 19 때문에 전 세계가 죽음의 공포 속에 있는상 싶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만들어내는 많은 불상사들이 세상을 시끄럽게 합니다.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무차별 인권적 린치를 가하는가 하면 또한 이런 세상의 반응을 모르는 눈치 없는 사람들은 아무런 주의를 하지 않고 자신을 절제하지 못해 많은 욕을 먹기도 합니다.
하여간 사람들의 아우성을 보면 신자든 교직자든 장로든 믿는자나 믿지 않는 자들이 별반 차이 없이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삶을 잃어가는 현실을 보면서 목회자로서 사실 한탄이 납니다. 더구나 죽음을 무릅쓰고 사지에 가서 이런 죽을 고비들을 두려움 없이 감당하다 온 선교사들로서는 어딘지 지금 이시대의 기독교 모습을 보면서 한탄이 절로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사실상 신앙이 무엇이며 어떤 신앙을 가져야 진정한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이 죽음을 넘어선 믿음인데 이렇게 아직 죽음에 임해보지 않은 분들이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떠는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의 십자가 정신은 어디 가고 자기 한 목숨 살고자 그렇게 신경을 쓰는 현상은 도대체 어떻게 고칠 수 있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물론 자기 생명을 가치 없이 이런 질병에 버리는 것은 하나님도 원치 않을 것입니다. 생명은 무엇보다 귀한데 어떻게 이런 질뱅에 속절 없이 죽어간다는 것은 인생 전체를 허무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그런 죽음을 죽고 싶지 않은 까닭이라고 변명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쩧든 죽음의 공포가 세상을 참으로 무섭게 만들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런 죽음의 공포가 질병의 확신으로 수그러들 전망이 없는 이 때 우리는 여행객은 교회 나오지 말라 우리 교회 점심은 먹지 말자 아니 아니들 있는 사람은 교회 오지 말라 이런 임시 방편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
예수님이나 구약의 신자들은 결포 이런 식으로 문제 해결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공포는 질병 확산으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어쩌면 불신자들에게는 인생 전체의 가장 깊고 강한 두려움의 대상이며 죽음의 공포는 결코 스스로나 인간 철학이나 과학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코로나 바이러스 19로 죽는 숫자는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매년 아무 때나 찾아오는 바이러스성 감기보다 훨씬 죽는 비율이 적지만 감열률이 빠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만 죽음의 두려움이 어디 질병에서 뿐은 아니지 않는가? 죽음은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고 사실상 기독교는 죽음을 초월한 신앙을 가져야 참 신앙이라 할 수 있지 않는가? 그래서 죽음의 두려움은 성경으로만 해결될 수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며 참된 구원의 축복을 누릴 수 없는 허위 신앙임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때 비로소 그 가치와 댓가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은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1. 메뚜기같은 이스라엘 민족
본문 신명기는 약 40여년 전 일어난 민수기 13-14의 정탐군 사건을 다시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훈을 모압 광야에스 이스라엘 제 2세대들에게 들려주는 역사 교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꿈을 꾸면서 에굽을 탈출하고 홍해를 건너 광야 길에 들어 선 것입니다. 저들은 이제 방향을 틀어 바로 가면 1주일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혀 광야 40년의 고생을 할 필요가 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가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이 따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러 각 지파에서 수령 한명씩을 뽑았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상 가나안 사정을 아시고 이스라엘 형편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 그냥 앞서서 인도하시지 왜 정탐을 뽑아서 가나안 땅을 먼저 점령하라 하셨을까요? 바로 저들의 신앙을 태스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명령을 받아 가나안 땅을 40일 동안 정탐하였습니다. 생전 가보지 못한 곳을 가서 보니 정말 광야에 비해 살기 좋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큰 문제는 그 곳에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강한 사람이었고 자기들 노예와 같은 그런 인종이 아니라 장대하고 신체적으로도 일당 백을 할 만한 장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생각할 때 자기들은 메뚜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200만의 인구이지만 메뚜기들은 참 약합니다. 싸워서 이겨 그 나라를 차지한다는 것은 너무 현실과 동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보면 이들이 자기들을 메뚜기에 비교한 것을 보면 여러 가지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 저들은 사실적인 사람들입니다. 매우 현실 감각이 뛰어납니다. 지금도 거짓보다 훨씬 좋은 것이 사실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까지도 믿음은 허황한 것이며 사실적이어야 하며 사실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모든 것이 뒤틀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사실보다 더 중요한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눈은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보는 눈이 더 진실하고 더 넓고 너 포괄적이고 더 역사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긴다는 현실 파악입니다. 역사는 이런 눈을 가진 자들이 이겼습니다. 왜냐면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을 기초로 사고하는 것은 자기 능력만큼의 그 이상을 생각하거나 사고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메뚜기 사고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 저들은 자신들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성찰하고 바라보고 미래까지도 자기들 입장에서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스스로 작아진 것입니다. 자기만을 바라보면 참 작아집니다. 저도 요사이 나 자신을 보면 얼마나 작아지는지 모릅니다. 내 인생이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기초로 사고하고 나의 부족한 자신을 기초로 무슨 일을 기획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아 중심의 사고는 결국 자신을 비하시키고 메뚜기 콤플렉스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이런 메뚜기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은 결코 용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좌절하고 비관적이고 미리 겁먹고 실패합니다. 결코 이 싸움을 이길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참 현실적입니다.
넷째 이런 메뚜기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은 두려움으로 가득하고 그 생애와 사상을 죽음이 지배하여 패배자 비극 운명론자가 되게 합니다.
다섯째 이런 사람은 모든 생각이 부정적입니다. 부정적이기 때문에 남을 비판하고 자기 자신에게 대해 매우 예민합니다. 남이 자기를 비판하는 것은 예민하게 반응하며 자기는 남을 자기 입장에서 무작정 비판합니다. 부정적으로 인생을 보며 사건을 풀이합니다.
여섯째 폭행이나 폭행적 말이 저들의 무기가 됩니다. 저들의 폭행은 자기들이 옳다고 하는 사고에서 행동으로 즉각 연결됩니다. 행동에 주저하지 않고 돌로 치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만을 보는 사람들은 항상 부정적이고 얼굴에 철판을 깐 것처럼 행동합니다. 한국의 좌파들을 보는 듯 합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자아가 무너지고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자아를 잃어버리고 할 수 없다는 자기 비하의 찌들은 자화상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분명한 자화상 개발이 되어 자기가 누구이며 무슨 일로 태어났고 그래서 인생의 궁극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지금 살아 생활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사람입니다. 두려움은 그래서 살아 있으나 죽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죽음의 병입니다.
2. 능히 이기리라는 갈렙
그런데 소수지만 12명 중 2명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보고를 했습니다. 능히 우리가 이길 수 있으니 지금 당장 처들어가자고 한 것입니다(30). 그 때 대다수 지도자들이 그 땅을 악평했다고 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고 과일이 너무 커서 어깨에 메고 온 땅을 악평하며 그 땅 사람들은 너무 장대하고 성은 견고해서 결코 싸울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이 부정적 보고를 받고 울고 있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두려워하지 말라.” 똑 같은 것을 보고도 어찌 여호수아 갈렙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는 그의 신앙적 눈이었습니다. 지는 것도 여호와의 눈으로 보면 이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우선하기 때문에 자아가 아무리 작아도 그것으로 생각을 추리하지 않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에 기초를 두고 사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사상과 생각의 기초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이 코로나 사태도 바라보아야 할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두려워 벌벌 떨며 행여라도 자기들에게 병균이 옮기지 않을가 노심초사합니다. 그래서 온갖 방법을 구상하며 미리 막아보려 합니다.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조심하고 방편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과학이 아무리 튼튼해도 나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이며 하나님은 이런 질병 속에서도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하고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며 그런 일을 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사용하시고 역사를 창조하십니다.
중세 코레라가 번질 때 아무도 병자를 치료하고 죽은 자들을 장사하는 일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진실한 기독교인들이 일어나 죽음을 무릅쓰고 병자들 소굴에 들어가 치료하고 죽은자 시체를 장사해주었습니다. 그것이 소문이 나자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는 담력있는 신앙입니다. 믿음 있는 의사 간호사들이 열심히 치료하려고 뛰어드는 모습을 우리는 보며 감사합니다. 내가 의사라면 전염될까 두려워 벌벌 떨지 말고 그 소굴로 들어가 담대하게 치료해주어야 합니다. 종종 순교를 당하고 종종 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을 가지고 끝까지 용감하게 적과 싸우게 됩니다. 죽더라도 이런 사람은 하늘 나라에 가고 장차 죽음에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비겁한 자는 병을 피하지도 못하고 죽어도 영혼의 두 번째 죽음을 면치 못하고 영원히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왜냐면 지나친 죽음의 두려움은 구원 신앙이 없는 것이요 구원 신앙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구원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두려워 떨다가 영원히 지옥에서 신함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예수의 부활로 거듭난 사람은 다소의 두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정상적인 생각하고 이 때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지금 내가 옆 사람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가르쳐주어야 할 것인가를 현명하게 깨달아 알고 행동하는 용기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수아 갈렙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코로나바이러스 시대에 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 내리는 재앙을 어떻게 슬리롭게 이겨야 하고 이런 때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절호의 기회를 회개 운동으로 삼아 깨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답입니다. 그것이 두려움을 이기고 정상적인 생각으로 두려움에 찌는 죽음의 사람들을 깨우치고 시대를 이기고 질병을 이기게 하는 성경적 방법인 것입니다. 여호수아 갈렙은 지금 오늘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고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3. 어느 때까지 믿지 않겠느냐?
부정적인 말을 듣고 엉엉 우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달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지만 이스라엘의 죄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전염병을 걸리게 해서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세상을 향해 우리들의 불신앙을 벌하시는 심판의 때입니다. 이런 심판의 때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믿음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말씀으로 복을 주시고 나라를 세우시고 민주주의 행복한 나라를 건설하시고 믿음 위에 복을 주셨지만 이 모든 것을 보고 누리고 있는 세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죽음의 그늘이 오지 심지어 성직자까지 욕하며 아무 확진자도 없는 도시에서 학교 문을 닫고 행사를 접고 정부와 공립학교는 아직도 문을 열고 무사 태평한데 미리 겁을 먹고 벌벌 떨며 서로 만나지 않고 의심하며 정부 기관에서 입국 검사를 한 것도 믿지 못하고 그가 설명해도 자기들의 두려운 처사를 정당하다고 하며 온 갖 성직자를 모욕하고도 마치 생명을 자기들이 지켜 사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예수 없는 자들은 가능하지만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까지 믿음 없는 행동을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언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노ㅜ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말은 “죽음을 무릅쓰고 두려워하지 않고 사지에도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부활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의 선배들은 이런 순교적 부활신앙을 가지고 세상을 밝혔습니다. 이런 부활신앙이 세상의 등불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직분만 장로니 권사니 안수 집사니 가지고 아직도 죽음 신앙으로 사고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자기 신앙을 철저하게 점경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은 세상에 남기시고 다음 세대에 쓰십니다. 그래서 에굽에서 나온 모든 성인은 다 죽이고 광야에서 신생한 백성들만 가나안 땅에 들여서 하나님의 백성을 유지하신 것입니다.
結 論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부활신앙이 있습니까? 실제 질병이 닥쳐와도 부활신앙으로 이길 자신이 있습니까? 없는 자는 이미 실패자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죽이실 때 당신도 함께 죽이시고 부활하실 때 당신도 함께 부활생명으로 부활시켰습니다. 그것을 믿는 믿음이 나타날 때 “나는 주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그것이 없으면 주님의 복음을 다시 생각하시고 주님 앞에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두려움에 사로 잡힌 당신을 부활의 생명으로 이끄시고 살든지 죽든지 주의 것임을 고백하며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정상적으로 활동하면서 사실상 죽음을 두려워함 없이 다른 사람을 조심시키면서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두려움에 떠는 어우둔 밤의 참된 빛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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