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두려워하라 (2020년 3월 22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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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두려워하라
2020년 3월 22일 주일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마태복음 10:34-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18-20)
요사이 코로나바이러스 문제로 전 세계가 두려움에 휩쌓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며 믿는 신자들까지 이 두려움에 쌓여 고생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어려울 때 진면목을 볼 수 있다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구정물을 놔두면 위는 맑기 때문에 그 안에 더러운 것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휘저어보면 그 안에 더러운 것이 떠올라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피상적으로 감싸고 있을 때는 안 보이지만 이런 일이 닥치면 사실상 세상 사람들보다 교인들이 더 야단인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빠지게 되면 인간 본색이 드러납니다. 곳곳에서 인종 차별적 본색이 드러나고 특히 중국이 발원지라고 하니 동양인 차별이 눈에 보이게 나타나고 밖에 나가지 않고 굶지 않기 위하여 사재기를 해서 상점이 텅텅 비고 사람을 못 만나게 하니 자연적으로 사람이 자신에게 가두어지게 되며 이런 시기에 인간으로서 구실이 멈추게 되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닌 현상을 보게 됩니다.
지난 3일 주일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왜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에굽에서 탈출한 출에굽 1세대는 다 광야에 시체로 죽게 하고 새로운 2세대만 가나안 땅을 들게 하는 특단의 조치를 왜 하나님은 취했는가를 살펴보면서 두려움을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21세기 최고의 문명에 살고 있는 오늘의 인간도 역시 변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성경을 우습게 보는 현대인들은 사실상 죽음이라는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질병이나 죽음을 가져오는 문제에 대해 인간 노릇을 못할 정도로 사회를 마비시키는 일들을 정부라고 하는 지도자들이 정책적으로 실현해서 인간을 스스로 가두고 마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좋은 때만 하나님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두운 때도 하나님 말씀이 필요합니다. 해결점은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잘못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만으로 해결이 안되고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그 근본인 두려움이 사실을 더 왜곡시키고 인간 구실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사회가 마비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어떻게 두려움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이 병이 장기화할 때 모든 인간이 이대로 죽어야 할가요 아니면 이 질명이 오래 가더라도 사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말씀에서 무엇을 찾아 질병 중에서도 역사의 참된 빛을 발하며 이 어두운 때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어떤 것일까요?
1. 진짜 죽음의 병: 두려움
두려움은 왜 생기는 것입니까? 생명체는 자기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자기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본능은 두려움에서 시작해서 공격으로 이어지도록 방어할 수 있는 본능을 살리기 위해 두려움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본능이며 인간 실존의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서 두려움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대 명제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살아보려고 하는 본능은 자신의 한계로 인해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죽음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고 그래서 두려움은 죽음 때문에 일어난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죽음의 두려움이 인간의 본질적 병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에서 염려가 발생하고 근심이 생기고 걱정이 앞서는 것은 이 큰 죽음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은 한번은 죽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이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장 부활절에서 부활을 미화시켜 사망을 희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이긴 사망을 정복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5). 사망을 이긴 것을 말하면서 사망을 조롱하고 있는 바울입니다. 왜냐면 두려움은 바로 사망의 화살이기 때문입니다.
키엘케골은 두려움이 죽음의 이르는 병이라 정의하고 실존적 본질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런 두려움이 얼마나 인간적이고 얼마나 하나님께서도 문제를 삼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직접 역사 안에 개입하셔서 해결코자 한 것이 죽음이고 죽음에 기인하여 오는 두려움 문제였고 광야 40년간을 고생시키며 이스라엘 민족의 가슴에서 없애고자 한 것이 두려움이었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짜 두려운 것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바이러스를 두려워하는 두려움입니다. 왜냐면 이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이 가장 경계하는 두려움이고 그것을 해결 받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결국 신앙의 연약함을 나타내는 것이며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을 우리는 삶 속에서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훨씬 더 두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두려움의 병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가를 살펴봅시다. 서론에서 말씀한대로 지금 당장 죽는 것도 아닙니다. 독감보다 사망률이 적습니다. 걸려도 꼭 죽는 경우는 노인이나 면역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걸리면 다 죽는다는 병이 아닙니다. 독감보다 못한 병입니다. 단지 전파율이 강하다는 것이며 지병이 있는 사람 면역력이 부족한 노인들에게 치명타를 입힌다는 잘못입니다. 그런데 독감 유행 때는 아무런 조치도 안 취하더니 이 병은 지나치게 두려움에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두려운 것은 교회들이 더 야단법석입니다. 부활신앙은 어디 갔고 죽음을 이긴 신앙은 어디 두고 교회에서 일어나는 두려움의 현상은 세상보다 더 심합니다. 실제적으로 천국을 믿는 신앙은 찾을 수 없고 과거 순교를 각오하고 나환자 곪은 상처를 입으로 빨아주던 손양원 목사의 신앙은 전설에 불화합니다. 선배들이 죽음을 이기고 순교자 정신으로 물려준 신앙은 그 자취를 찾을 길이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환란에서 살아남으라고 하는데 살아 남기는커녕 교회가 더 야단법석입니다. 침착해야 하고 우리 신앙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진노의 뜻을 찾아야 하는 때입니다. 그것이 참된 재앙을 당한 기독교인의 자세입니다.
2. 참된 십자가 신앙의 진수
오늘 봉독한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십자가로 죽을 자신의 일을 설명하면서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을 책망하시며 어떻게 죽음의 병을 이길 수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말씀하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직접 제자로서 마태는 이 제자들에게 주시는 강론을 중점적으로 길게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꼭 죽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그가 힘을 빌려 로마 속국에서 나라를 해방시켜 살려야 하는 명제가 우선이고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목적이기 때문에 알려주면서 제자들에게 이 심각한 죽음의 병을 이기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이기는 것은 심리적인 것으로 부족합니다. 왜냐면 심리적인 것은 말로 위로나 피상적 용기를 부추기는 것이지 실제적으로 죽음이 임박한 상태를 이길 동기 부여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로만의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까지도 피상적으로 들립니다. 그런 믿음의 말씀을 수천번 들었지만 막상 죽음이 임하면 기독교인들이 더 야단인 것은 그 피상적 말에 너무 익숙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두려움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사실은 자신도 십자가 지실 때 그 고통스러움 때문에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달라고 기도하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기독교의 핵심인 십자가 부활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야 하는 사실, 그래서 구약의 수백년 동안 내 대신 짐승을 죽이는 것이 제사였던 사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기에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당해야 하는 사실을 전제하고 이를 두려워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아니 죽음에 참여하는 신앙으로 이겨야 할 것인가를 지금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에게 가장 큰 위력은 죽음을 각오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순교를 각오하고 순교를 축복으로 기뻐할 수 있는 신앙이 참된 신아이며 그 신앙에 도달해야 결국 인간은 죽음을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신앙이며 그 신앙이 진짜 세상을 밝힐 수 있기 때문에 말씀합니다. 심지어 가족을 버릴 각오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을 갖지 않는 자는 자기를 따를 수 없고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기독교는 십자가 종교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부활한 부활신앙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하게 신자는 이미 이 십자가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고 선언합니다. 그것은 사상이나 이념이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서 이미 나라는 존재는 십자가를 지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은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한 삶으로 바꾸어졌음을 말합니다. 죽음을 이미 이겨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생각 속에서 현실로 이것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죽음을 이긴 믿음이며 이런 신앙이 구원신앙이고 이런 신앙이 참 신앙입니다. 내가 신앙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해 나를 변화시켜 주신 믿음이 바로 이 구원신앙입니다. 이 신앙이 보여지는 사람은 이미 십자가를 지고 따르며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에 죽음의 두려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결심한 사람들에게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전우의 죽음을 넘고 나면 총탄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동지애고 그것이 전우애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신앙이며 그것이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부활신앙인 것입니다. 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질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 살자고 병균도 없는 사람들에게 피하고 사람 구실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환자라 할지라도 저를 용기를 주고 실망시키지 않고 살아있는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이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이고 손양원 목사님의 신앙입니다. 나환자의 상처에서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는 신앙 그것이 산 신앙입니다. 그것을 피상적으로 믿기 때문에 믿음의 힘이 없습니다. 그런 경험은 선교사역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입니다.
3. 부활신앙의 산 역사
초창기의 기독교 역사는 순교자의 역사였습니다. 순교자들이 있었기에 유대 땅에서 이단 취급 받는 사람들이 로마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상 이런 질병은 때때로 일어났습니다. 아직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지구상에 역병이 일어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판데믹 질병을 하나님의 진노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자라 할지라도 전염병으로 죽게 됩니다. 그런데 전염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전영되어도 그 질병에 대한 태도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이 초대 교회의 살아있던 부활 신앙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기독교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던 것입니다. 아니 기독교인으로서 섬김을 통해서 오히려 두려움은 사라지도록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14세기 유럽 인구의 삼분지 일을 죽게 한 콜레라 질병도 역시 중국에서 출발했습니다. 몽고족을 통해 유럽으로 번졌습니다. 몽고족이 유럽을 정복할 때 당시 실크로드(비단길)에 있는 강한 성을 정복하려 하다가 코레라 병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많은 병사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정복 못한 도시 성 안에 죽은 시체를 던졌습니다. 병걸려 죽으면 정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있었던 병균 폭탄 원리였습니다. 이로 인해 도시는 전멸했고 이곳 상인들이 상선을 타고 이탈리아 시실리 섬 항구로 갔는데 배 안에 죽은 시체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럽에 퍼진 콜레라는 당시 인구의 삼분지 일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 질병을 향한 케돌릭 사체들의 태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피상적 기도만 했지 자신들을 목숨을 위해 휴양지로 도망갔습니다. 교황이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거짓말이 그대로 들통이 났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믿지 않게 되었고 교황과 사제들의 권위는 크게 손상을 입었습니다. 당시 일어나는 르네쌍스 물결로 성경 원어 공부가 유행되었고 성경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발견하기 시작해서 결국 마틴 루터를 비롯해서 칼빈 등의 종교 개혁 운동이 유럽 사회를 진동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어가는 교회를 심판하시고 새로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저들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구호로 케돌릭 신앙을 버리고 성경적 신앙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오늘과 같은 문명 세상을 기초를 놓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진정한 개혁이 바로 이 피할 수 없는 질병의 진노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질병에 대한 초대 교회의 산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교회가 새로이 개혁되고 개신 교회는 오늘날 서구 문명의 기초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신앙인은 환란의 시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있을 때에 기독교인다운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지금처럼 교회가 더 법석을 떨고 죽지 않기 위해서 두려움에 사로 잡혀 일는 자들은 이스라엘 광야 40년을 방황하게 하고 그들을 사막에 시체로 죽게 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이 일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결 론
코로나 바이러스는 분명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보는 것이 본인의 견해입니다. 지금 현실을 직시할 때 사회의 빛이 되어야 할 기독교가 죽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미국 기독교가 신신학으로 성경을 버리게 되더니 이제는 교회라는 모임 속에서 온 갖 대형교회 위주의 자본주의 비즈니스로 예배가 쇼가 되고 교회의 거룩성은 어디 가고 세속주의가 지배하는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한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말씀은 사라지고 신학교 70%가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어 있습니다. 신자들이 죽고 사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얼마나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고 미국사람 만큼 전쟁에 나가서 도망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내가 죽겠다고 하는 희생정신은 바보 취급을 당하고 진정한 부활신앙은 뒤떨어진 신앙으로 간주됩니다.
이런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과 교회 성장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한국에 가서 대형교회를 이루고 자본주의에 빠진 교회들이 돈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신신학을 부끄러움 없이 가르치고 신학교에서 성경을 믿지 않고 발트 신학을 가르치는 학교가 대부분이며 그러기 때문에 교회도 하나의 군중에 휩쓸리다 보니 공산주의, 주사파가 점령을 해서 김용민같은 사람들이 전도사라고 성경공부를 해대고 있으니 가증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한국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환자가 생기고 지금은 사회주의 정부로 오래 동안 점령당한 이탈리아가 모든 기간산업을 중국에 빼앗겼기 때문이 중국을 괄시하지 못하다가 이제 본색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 사건으로 대형교회들이 재정으로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길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떠나고 있습니다. 다행히 이를 깨닫고 교회가 중심이 되어 한국 정치를 바꾸려고 하나 주사파가 원체 강하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피를 흘려야 될 것 같습니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나라가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각오한 신앙이 필4하고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남은 자들에게 심어주기 위하여 대 재앙을 내리신 것으로 점점 믿게 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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