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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산 祭物 (2020년 3월 29일 주일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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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명길목사
댓글 0건 조회 2,398회 작성일 20-10-1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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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한 산 祭物

 

2020329일 주일 예배 설교                                                                                                                            이명길 목사

 

말씀: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

 

로마서 12장부터는 실천장이라고 성경학자들은 말합니다. 1장부터 8장까지는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 어떻게 은혜로 구원받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교리적으로 설명합니다. 9-11장은 이방인을 구원하였다면 그러면 그 동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삼아 말세에 쓰려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것인가를 설명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도 이방인도 다 예수 그리스도로 접붙여 새 이스라엘로 만들어 그리스도를 통한 선택된 백성으로 삼아 새 이스라엘 민족으로 삼으신 것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한 족속으로 구원하시는 사실을 설명한 후 12장부터는 그 구원을 은혜로 받은 새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 가를 설명합니다.

12:1-2에서 바울은 구약의 제사지도를 가져와 이제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로 더 이상 짐승을 죽여서 드리는 제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구약의 제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쳤으니 이제 우리는 형태를 달리하여 구약의 제사가 의미하는 제사를 드림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새로운 차원의 참된 영적 예배가 시작된 것을 선포합니다.

이제 우리가 드리는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우리는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삶 전체를 통해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라고 설명합니다. 희생은 형태가 바뀌었지만 짐승을 죽이던 그 자리에 내 자신이 희생 제물이 되어 거룩한 삶 곧 희생적인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참된 신약 시대의 예배라고 가르치며 삶 속에서 헌신된 거룩한 삶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실천적인 생활에 대해 바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짐승을 대신 죽여 내 죄를 사함 받게 하는 예배가 아니라 이미 죽은 우리가 죽고 산 제물로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통해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것이 바로 산 희생이 되는 길임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에 떠는 자를 싫어하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제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가 우려움을 갖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려운 백성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싸워보기 전에 이미 두려움 가진 이스라엘 백성을 사막에 모두 시체로 묻어버리고 사막에서 태어난 2세들을 다시 재 언약해서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 땅에 살도록 하신 것을 우리는 민수기 14장에서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두려움에 사로 잡힌 자들을 경계하십니다.

어떻게 두려움을 이길 수 있을가요?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대로 십자가를 지는 신앙입니다. 아니 죽고자 하는 희생의 신앙을 가질 때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와 함께 무서울 것이 없는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이미 죽은 자임을 자각하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살아난 신앙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로마서 12장에서 말하는 산 제물로 사는 삶입니다.

1. 犧牲되는 것이 祭物입니다.

본문을 이해하려면 구약의 제사 제도를 모르고는 알 수 없는 말씀입니다. 구약 시대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만나기 위하여 반드시 거룩하게 되는 과정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죄 용서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죄 용서를 받기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데 짐승을 선택해서 죄를 그에게 전가시켜 짐승을 죽임으로 내 대신 짐승이 희생되는 것입니다. 죄 값으로 짐승의 생명을 받은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해주십니다. 그것이 예배였고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신약 시대의 바꾸어진 제도를 설명하며 변화된 몇가지를 전제합니다. 구약에는 내 대신 양이나 소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는 대신이란 것이 없습니다. 내 스스로가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제사장도 필요 없습니다. 내가 직접 드리는 제사입니다. 우리 믿는 자 모두가 다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예수 이름으로 우리가 직접 드립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제사로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거룩한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완전한 희생 제물을 받으시고 우리 사이의 모든 막힌 담을 허시고 우리를 모두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만들어 이제는 중간을 거치지 않고 직접 드리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14절에 말씀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을 하나로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그 육체로 허시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후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을 성전 삼으시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행동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제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죽는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예수의 흔적을 몸에 지니려고 제물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제자들은 제물되기 싫어했습니다. 자기는 살려고 했는데 구약의 제사처럼 살려고 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제물이 된다고 하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으라고 십자가를 말씀했습니다.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기독교인의 삶은 그래서 자기 몸을 살려고 하는 자가 아니라 제물로 드리는 삶을 살려고 하는 자로 직접 제사를 하나님께 자신이 드리는 삶으로 제사장이 필요 없이 직접 자기가 기도하고 자기 스스로를 희생 제물로 드리는 삶을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 예배의 첫 일보입니다. 스스로 제물이 되는 것이 기독도의 삶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 대신 제물 되지 아니하고 짐승도 내 대신 제물 되지 아니합니다. 내가 제물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죽을 때 이미 우리 자신이 함께 죽었습니다. 로마서에 이 사실을 확실하게 가르칩니다. 언약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말씀이 전혀 이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상상이나 추상적인 것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전혀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언약은 실제적인 것이며 언약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못 박을 때 선택된 자의 둘째 아담으로 그 대표 안에 선택된 모든 사람들을 함께 묶어 죽게 했습니다. 주님이 죽을 때 나도 죽었습니다. 그것이 구원신앙의 토대입니다.

성령님은 현실 속에서 말씀을 듣든지 교회 멋모르고 출석하든지 여러 환경을 인도합니다. 그 가운데 말씀이 효력이 있게 하십니다. 왜냐면 우리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식 체계가 동물과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효력적 방법을 택하게 하십니다. 그런 사람이 듣고 거듭나는 경험을 주십니다. 그 마음을 중생시키십니다. 그런 중생이 일어난 사람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이미 내가 구원받은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과거형입니다. 내가 믿을 때에 그 때에 구원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가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 거듭남의 증거요 내가 이미 죽은 근거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지금 중생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믿음은 전적으로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이런 고백을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굳게 믿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동시에 내가 죽고 산 산 증거가 됩니다. 내가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 때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죽은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세례 받고 그것을 확인했습니다. 내가 죽고 부활한 것은 인치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 때야 죄를 씻는 예식이 아닙니다.

2. 救援받은 자는 산 祭物犧牲합니다.

구약의 제물을 영어로는 Sacrifice라고 합니다. 이 말을 제물이라고 번역하기보다 사는 동안 내가 손해보고 희생하는 삶을 말할 때 동일하게 사용합니다. 바울은 새 시대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되는 신약 시대의 예배는 구약의 성전 예배가 아니라 죽여서 드리는 희생 제물이 아니고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祭物犧牲이 되어 삶을 통해 나타납니다. 내가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삶이 제사요 예배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 대로 12장부터는 기독교인의 실천 장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에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는 첫 마디에 이 말씀을 쓴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행동으로 구원받은 사람으로 행동하고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하여 가장 먼저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은 내가 희생 제물이라는 인식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희생해야 할 제물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전제하지 아니하고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사랑을 베풀려면 희생정신이 앞서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할 때 가장 먼저 우선해야 하는 것은 희생이라는 정신입니다. 희생이 되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헛말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 없이 기독도가 될 수 없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꾼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다 보면 손해를 보게 됩니다. 내가 아낌 없이 줄 수 있어야 되는데 그 사람이 그런 은혜를 몰라주면 섭섭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제물 곧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대개 신구약의 흐름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완전한 희생물이 되었으니 우리는 더 이상 구약적인 제사제도와는 상관이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약에 세우신 것들이 지금도 여전히 형태나 기능은 바꾸어졌지만 그 뜻을 새 시대에도 받들며 사는 것이 성경 전체의 맥락을 언약적 입장에서 잘 적용하는 삶이 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구약에서 가르쳤던 것을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여 신약 시대의 우리가 계속 지켜야 할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야 합니다. 구약의 안식일의 문제가 없어지고 신약 시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만 남아 구약의 안식일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구약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지금 그대로 드리지 아니하고 그래서 구약식 성전은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내 죄를 대신하여 짐승으로 하여금 죄 값을 받게 하고 나는 용서를 받는 그런 제사 형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짐승 대신 나 자신이 살아있는 제물이 되어서 산 제사를 드리는 것은 그대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죽은 제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제물이 되어 희생을 기초한 살아 있는 희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비워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제사는 자기희생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희생한 완전한 언약적 희생으로 죽었고 주님과 함께 살아난 사람으로서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으나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나 살고자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죽고 또한 죽었다가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부활의 삶을 날마다 체험하는 삶, 죽고 사는 일이 날마다 실행되는 희생적 삶이 기독교인들의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께 십자가에 지실 것을 말씀하실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지만 예수님께서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 저들의 생각과 상식이 완전히 박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도저히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반응은 저들이 죽음이 무엇이며 부활이 무엇인가를 완전하게 깨닫지 못한 까닭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희생적 삶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나 살고자 노력하고 그것이 궁극의 인생 목표고 되자 않고 오히려 주를 위하여 죽고자 하는 삶을 즐거워합니다. 그것이 십자가 삶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자들을 하나님은 날마다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생의 삶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산 제물이 된다는 말은 내가 목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지만 자신을 희생하여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약 시대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다시 삽니다. 주님과 함께 살아난 사람은 희생을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날마다 생명 있게 하시고 살려주십니다. 부활이 생활이 되고 부활의 즐거움이 날마다 경험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는 구원신앙을 통해서 십자가 위에서 이미 죽었고 주님의 부활과 살았음을 확신하며 계속해서 희생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3. 犧牲하는 거룩한 삶이 靈的禮拜입니다.

이제 신약 시대에 우리는 삶을 통해서 예배하는 자임을 배웠습니다.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삶을 통해 하나님께 제물이 되는 삶을 살겠습니까? 자신이 제물이므로 하나님께 받으시는 희생 제물임으로 우리 마음속에 제물 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가 희생정신입니다. 희생정신이 앞서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수가 없고 사랑 자체가 희생을 빼고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높이 인정합니다. 왜냐면 어머니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자녀에게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이며 설령 자식에게 돌려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바라보고 엄마 노릇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랑하다 보면 많은 면에서 손해를 보고 배반을 당합니다. 누가 내가 한 일을 갚아주는 사람 없습니다. 자식이 부모 은혜를 압니까? 자식이 부모가 자기에게 한 만큼 보답합니까? 섭섭하지만 그것을 마음에 두지도 않습니다. 그런 정신이 믿음을 실천하는 기본입니다.

희생 제물은 자기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인간 죄 때문에 억울하게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물은 말한마디 하지 못합니다. 죽이면 죽습니다. 그것이 동물의 자세입니다. 희생은 말이 없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축복이고 그것이 예수님이 지신 것이며 나도 함께 죽은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겸손한 자기 인식입니다. 이런 십자가 삶을 살리면 내가 살아서는 절대로 기독교인으로 살기 힘듭니다. 한 없이 낮아져야 합니다. 조금 아는 것 가지고 함부로 무시하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가르치려는 자세는 절대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예수 이름을 더럽힐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생활화되고 내가 낮은 것이 기정사실임을 알고 자숙하면 낮아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정말 별것 아닌 사람이라는 생각이 쉽게 들지 않습니다. 누구나 혼자 자신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낫지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같이 있을 때 겸손한 척은 하지만 속으로는 아니 혼자 있으면 자신을 높입니다. 세상에서 또한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로 자신을 용기 준다며 자신을 높이게 합니다. 이런 자심감은 얼마 가지 않습니다.

바울의 자신감은 자신이 잘 나서 자신감을 가졌을 때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행동대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죽었습니다. 그리스도로 다시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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